오늘날같이 지적 생산이 풍요롭게 이루어지는 문명세계에서는 철저하고 깊이 있게 책들을 읽지 않는다면 그 흐름을 쫓아가기 힘들다. 그럭저럭 살아갈 수는 있겠지만 제 의지대로 방향을 잡고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일어나는 변화 속에서 좌충우돌하거나 시행착오를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 삶은 피상적이고 밀도는 성기고, 그리고 독선과 아집에 빠지기 쉽다. 독서인은 단순히 책을 읽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책 읽기의 최종 목적은 지식의 습득이 아니다. 스스로 사유를 하는 것! 책 읽기를 통해 지식의 전체상에 접근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식을 ‘통섭’할 수 있는 사유 능력의 총량을 키워야 한다. 읽는 행위의 능동성은 뇌 회로를 새롭게 여는 수단이 되고 궁극적으로 사유의 복잡성을 견뎌낼 수 있게 한다. --- p.113
세상에는 책을 많이 읽은 사람과 그보다 조금 덜 읽은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살아간다. 책을 더 읽었다고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책에 몰입하고 뭔가를 창조해낸 사람들 덕분에 이 세상은 보다 더 살 만한 세상이 된다는 건 사실이다. 밥을 먹듯이 날마다 책을 골라 읽어라. 세상의 혼란과 잡답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척도로 온전히 살고 싶다면 지금 당장 그렇게 하라! --- p.116
우울한가? 따분한가? 화가 나는가? 무력하다고 느껴지는가? 나는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하기 위해 책으로 달려간다. 책 읽기는 인생의 슬픈 터널을 지나서 의식의 고양(高揚)이라는 신세계로 가는 길이다. 내가 읽은 모든 책들이 나를 의미의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 이 가을 아침 가슴이 뛰는 삶을 살기 위해 나는 책을 읽는다.
--- p.258
“빛과 따뜻함과 웃음”은 행복한 가정의 표상들이다. 허나 내 가정은 행복한데 바깥세상이 불행하다면 그 행복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개별자의 행복은 가정의 행복과 하나의 묶음으로 연동된다. 밖에서 고단했을지라도 가정으로 돌아오면 상심한 마음은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다. 내 가정에 깃든 “빛과 따뜻함과 웃음”에만 취해 방랑자들과 바람들을 나 몰라라 하는 태도는 어리석다. 앙드레 지드가 “가정이여, 나는 너를 미워한다!”라고 했던 까닭도 그 때문이다. 좋은 아버지라면 “밀봉된 가정, 굳게 닫힌 문, 행복의 인색한 점유”에 머무는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행복의 점유는 폐쇄적이어서는 안 된다. 행복을 배타적으로 점유하는 사람은 타인, 낯선 것, 나눔, 이타주의를 싫어한다. 제가 싫어하는 것들이 제 행복의 토대라는 것을 모르는 어리석음 탓이다. 토대가 단단하지 않다면 집은 위험하다. 더불어 나눌 수 있는 행복이 진짜 행복이다. 쥐고 있는 게 행복이라면 너무 꽉 쥐지 마라. 행복은 움켜쥐면 사라지고, 버리고 놓으면 머문다. 행복이 누구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가 누려야 할 것이라 그렇다. --- p.264
우리가 날마다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고, 제 삶을 어떻게 꾸리는가보다 더 중요한 철학의 토대는 없다. 현대 철학은 이것들을 배제하고 스스로를 분리함으로써 철학의 기본을 망각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삶의 실체적 진실과 유리된 철학은 공허해진다. 아타루는 니체의 “여름의 더운 오후에 샘물을 남김없이 마시듯 내 책을 읽어달라”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철학은 ‘잘 모르겠다’는 자기 무지에 대한 인식, 목이 말라야 하는 상태, 즉 삶의 실체적 진실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말한다. --- p.277
유행이라는 덧없는 유토피아로 도피할 것인가, 아니면 시장의 유혹을 떨쳐내며 금욕주의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만들 것인가. 이 선택의 압박에 대처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유행을 만들고 퍼뜨리는 시장은 히드라이다. 이 괴물이 주겠다는 행복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 행복을 좇으면 좇을수록 수렁에 빠진 발은 더욱 수렁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우리를 구해줄 사람은 없다. 우리 스스로 복잡한 매듭을 풀거나 끊어야 한다. 현대의 예언자들은 이렇게 외친다. 이미 통제력을 잃어버린 시장이라는 괴물에 저항하라! 속도의 프리미엄들을 포기하고, 세계화가 약속하는 달콤한 열매들을 기대하지 마라! 자급자족할 수 있는 환경을 삶의 토대로 삼으라(시골로 가라!)! 더 작게 살고(작은 것이 곧 큰 것이다!), 더 많이 느림의 요구에 부응하라! --- p.307
대개의 삶이란 결핍이고 누추함 그 자체인데, 그 결핍을 채우고 누추함을 벗으려는 욕망 때문에 책을 읽는다. 이때 욕망은 나로서 동일성을 유지하고 존속하려는 본성과 더 나은 ‘나’로 충만해지려는 열망의 합이다. 앎, 지적인 발견, 창조적 생각들의 발현을 위해 책을 읽을 때, 책은 숨은 욕망들을 비춰주고 성찰적 사유로 이끈다. 어떤 책들은 살아 있는 기쁨과 행복을 고스란히 되돌려준다. 책을 읽는 일은 지복이다. --- p.451
사람들은 하루 종일 참을 수 없는 디지털의 분주함에 빠져 외부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관심을 쏟는다. 개인의 삶에서 충분히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사라지고, 그 시간과 함께 삶의 깊이를 만들 수 있는 기회도 잃는다. 뇌, 두 눈,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이 창조하는 사이버 세계에서 사는 디지털 군중의 삶 속에는 깊이가 없다. (……) 삶에서 깊이를 앗아간 속도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물론 속도는 권태의 지루함을 면제해주고, ‘기다림의 수고가 필요 없음’이라는 선물을 준다. 그러나 속도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수단에 불과한 그것이 내 정체성과 지위, 그리고 삶의 외피에 덧씌워지면서 목적으로 뒤바뀐다. 그것은 더 빠른 속도에 대한 갈망과 마음이 그르렁거리는 상태, 즉 ‘형이상학적 조급증’에 빠뜨린다. 디지털 맥시멀리스트로 진화한 세상이 준 것은 편리함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를 더 창의적이고 똑똑한 방식으로 진화시키지는 않는다. 반면에 느림의 숭고함, 고요한 시간의 평화, 충만한 삶, 활력이 넘치는 건강, 세계와 나의 조화 속에서 느끼는 행복을 앗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