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단국대 국문과 및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박사)한 후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와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로 재직했고, 도쿄외국어대학 및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에서 외국인 연구자로서 방일 연구를 수행했다. 박사논문에서 일제말기 반근대적 언설의 다양한 양상들을 검토한 이래 꾸준히 식민지/제국 체제의 구조 변동이 초래한 문학 장과 언설 장의 효과들을 연구해 왔다. 현재는 식민지/제국의 언어-법-미디어의 표상 체제를 재생산하는 식민주의적 본원적 축적의 장소들을 탐구하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반근대적 상상력의 임계들』, 『근대를 다시 읽는다』(공저), 『문학과 과학』(공저), 『백 년 동안의 진보』(공저) 등이 있으며, 번역한 책으로는 『세계사의 해체』(공역), 『바흐친의 산문학』(공역) 등이 있다.
프롤레타리아가 발화했다는 사실, 피지배 민족이 주권적 태도를 취했다는 사실, 소수자가 대표 없이 자기를 제시하려 했다는 사실 등이 식민주의를 넘어선 세계로의 출구를 자동적으로 열어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로 그 사실들은 지배적인 언술의 질서를 확장하고 완성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저 잠재성들의 발견은 다른 문법의 발견과 병행되어야 한다. 식민지/제국 체제의 언어-법-미디어의 문법에 대한 탐구는 그 문법이 차단하거나 포획하면서 분할해 놓은 세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잠재성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다른 문법을 모색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 p.12
중일전쟁 발발 후 조선은 일본의 대륙 정책과 관련된 지정학적 배치에 의해 ‘병참 기지’로서 성격 지어졌고, 전시 동원 체제가 강화되어 갔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이러한 식민지/제국 관계의 변화와 식민지 내부에서의 변화는 중일전쟁기에 생성된 새로운 언설 공간에 참여하고 있던 전향 지식인들에게 또 다른 전망을 품게 했다. --- p.49
복수의 지성과 사실이 있다. 그리고 그 지성들과 사실들은 서로 다른 시간성을 보유한 채 ‘역사적 현재’에서 충돌하고 있다. 특히 날카롭게 충돌하는 것은 19세기적 지성과 20세기적 ‘사실’이다. 19세기적 지성이 개인주의, 자유주의 등으로 대표되는 부르주아 계급의 이념에 응축되어 있다고 할 때, 20세기적 ‘사실’은 그 이념들이 근본에 있어 허구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드러내면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들이다. --- p.92
전선/총후라는 정치적-의미론적 장치에 의해 ‘총후’로서 재구성되는 삶, 그리고 생사여탈권을 쥔 제국적 주권 권력의 결정에 운명이 내맡겨진 삶이란 살아 있는 개인들이 물질적·정신적으로 동원되며 강제되는 상황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사’(私)를 ‘공’(公)의 영역으로 남김없이 소환시켜(‘멸사봉공’) 하나의 시야에 두려고 하는 식민지/제국의 주권 권력이 법 아닌 법의 폭력을 행사하며 개인의 삶에 언제든 개입해 운명을 뒤바꾸는 주인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 p.132
이렇듯 이광수에게 몸가짐과 예절은 ‘내선’의 마음이 만나는 핵심적인 통로가 되는데, 미완의 장편인 『그들의 사랑』에서도 몸가짐과 예절은 ‘내선’의 오해와 편견을 허무는 결정적인 순간과 결합되어 있다. --- p.234
비록 염상섭 자신이 해방을 향한 물음을 끝까지 견지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세계 전쟁’의 ‘경험’과 부재 의식 속에서 기존 질서에 대한 근본적 회의와 전면적 해방의 ‘현재’를 모색하고자 했던 계기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새삼스러운 물음을 던져 주는 듯하다. 거대한 여객선이 수백 명을 가둔 채 가라앉는 모습을 생방송으로 목격한 우리 모두에게, 그리하여 이례적인 무력감과 부끄러움, 그리고 기존의 가치와 관습과 규칙들에 깊은 회의를 품게 한 사태 앞에, 과연 지금의 회의가 반복되는 ‘비세계적인 개조’로 귀결되지 않게 할 만큼 근본적인지를 묻는 듯하다. ‘이것이 진정으로 삶에 합당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