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지금이 낮 시간이라 한가한 어르신들이 많이 오시죠. 아침저녁으로는 직장인들이나 개인사업자들도 많이 옵니다. 하지만 평균 연령이 65세 이상이긴 해요. 이 동네 자체가 그렇다더라고. 서울에서 갑으로 살아온 노인들이 말년에 공기 좋은 신도시의 고급 아파트를 분양받아 내려온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리고 여기 오는 중장년층도 대부분 전문직이나 사업가죠. 다들 이 사회의 갑이죠. 그것도 어디 보통인가. 한국 사회 1퍼센트에 속하는 남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 1퍼센트를 위한 멤버십 피트니스가 바로 헬라홀이죠. 그러니 당연히 여기서 일할 때 중요한 건 회원님에 대한 친절입니다.” --- p.28~29
사실 내 예상이 빗나간 게 하나 있었다. 겉보기와 달리 헬라홀 안은 자본주의의 꽃동산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1퍼센트의 남자들이 자연재해 피해자인 양 허겁지겁 운동복과 양말을 집어 드는 광경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일 따름이었다. 그마저도 셔츠는 목이 늘어난 것이고, 반바지는 허리 밴드가 헐렁했으며, 양말 바닥에는 매직으로 커다랗게 대여품이라 쓰여 있었다. 그런 걸 입고 신은 차림새면 삼성 이재용도 거지처럼 보이기 알맞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나마 덜 낡은 걸 찾아 헤매느라 눈에 불을 켜고 로커룸을 뒤지는 것이고, 그러니 아무리 수납공간을 잘 정리해도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 엉망이 되었다. --- p.47
이곳에서 1퍼센트 남자들은 아무리 유세를 떨어도 폼은 안 났다. 명품 셔츠에 명품 등산복을 입고 들어와도 다들 후줄근한 운동복으로 갈아입어야만 했다. 사우나 곳곳에서 마주치는 그들의 알몸 또한 그다지 명품은 아니었다. 갑의 사내들은 희한하리만큼 이곳에선 힘을 주지 않았다. 비록 권력의 꼭짓점에 있는 이들은 아니었으나 헬라홀 사우나의 대표적 갑들의 직업은 화려한 편이었다. 회원 명단에 적힌 이름으로 인터넷 인물 검색을 하면 사진까지 뜨는 사람이 꽤 되었다. (중략) 다만 그들 모두 여기 이곳에서는 도드라지려 애쓰지 않았다. 그들 모두 사우나의 규칙에 순응했다. 남자 사우나란 원래 땀을 빼고, 발기하지 않은 채 벌거벗고서 아무 생각 없이 축 늘어져 있을 수 있는 남자들의 유일한 공간이니까. --- p.84~85
언젠가 그는 아로마 오일로 번들거리는 똥배를 드러내고 휴게실 소파에 앉아 종편 채널 TV조선을 보다가 혀를 끌끌 찼다. “저런 꼴통 우파 새끼들. 나 같은 중도가 보기에 쟤네들 좆나 시끄러워.” 그 옆에서 알짱거리던 나는 놀라서 두 눈을 깜빡였다. “잠깐, 회원님께서 그러니까 중도시라고요” “당연하지, 소설가. TV조선은 우파, MBN은 좌파, 나는 중도. 그럼 된 거 아냐” JTBC는 물론 헬라홀 휴게실 텔레비전에서는 거의 삭제된 채널이나 마찬가지였다. 기껏해야 JTBC3으로 스포츠 중계를 보는 회원님들이 있을 따름이었다. --- p.151~152
실은 힐튼 호텔이나 하얏트 호텔의 멤버십 피트니스를 악착같이 흉내 낸 자그마한 코스프레 멤버십 헬라홀이야말로 이신도시의 우아한 코털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우아한 공간에서 느릿느릿 걸어 다니는 헬라홀의 남자들도 그들이 꿈꾸는 1퍼센트의 찬란한 삶을 현실에서 코스프레하기 위해 이곳에 오는지도 몰랐다. 이곳에서 코스프레가 아닌 현실을 오가는 사람들은 나나 팀장 같은 사우나 매니저들이었다. 우리는 이곳의 초라한 뒷모습을 아는 사람들이자, 그 초라한 뒷모습을 어떻게든 감추려고 버둥거리는 일꾼들이었다. --- p.186
나는 떠나지 않았다. 대신 헬라홀 남자 사우나에서 일하면서 어금니처럼 당분간의 생계를 책임졌다. 우리의 앞날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물론 특별한 계획도 세우기 힘들었다. 나나 그녀나 모두 뼈대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의 앞날은 탄탄대로가 아니라 꿀렁거렸다. 게임 속 캐릭터처럼 쉽게 게임 오버되기 쉬운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싶었다. 우리는 그냥 살아간다. 그건 용기나 낙천, 열정 같은 단어로 포장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보험 없는 삶이지만 내가 사는 삶이니 타인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었다. 희한하게도 헬라홀 남자 사우나는 그거 하나는 내게 가르쳐주었다. --- p.213
의정부에서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이곳의 이야기를 쓴다면 무덕하고 초라한 상류층 남자들의 사우나를 헬라홀이라 부를 거라고. 1퍼센트의 사람들만, 혹은 자신을 1퍼센트라고 믿는 사람들만 빠져드는 그곳은 분명 어마어마한 구멍이었다. 위험한 맨홀 같기도 하고 시공간이 일그러진 웜홀 같기도 한 헬라홀이었다. 한번 빠진 귀한 사람들은 쉴 새 없이 달리고 땀을 빼며 영원을 꿈꾸지만 훅 꺼져 사라질 때까지 빠져나가지 못하는 구멍, 헬라헬라 헬라홀.
『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는 현재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뛰어난 블랙유머로 패러디하고 있는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선민의식을 가진 대한민국 1퍼센트 부자 노인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여주는 피트니스 사우나에서 작가는 우리 사회의 소우주를 본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그것을 비난하는 사람들 역시 경직된 이념적 독선과 도덕적 우월감이 만들어낸 선민의식에 취해 있다고 비판한다. 그 둘 사이에서 작가는 사우나의 이름인 ‘헬라홀’처럼, 경직된 세계에 생기는 구멍 즉 유연한 사고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깨우쳐준다. JTBC를 안 보는 사람들과, 그러한 그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을 통해 작가는 이 시대의 병폐인 양극화를 알레고리 기법으로 비판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_김성곤(서울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좋은 소설은 문체와 화법, 서사의 리듬을 통해 본류와는 다른 이야기의 층과 결을 만들어낸다. ‘헬라홀 남자 사우나’를 무대로 상류층 세계의 ‘구멍’을 관찰하고 보고하는 『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는 그 관찰자-화자의 자리에 대한 충실한 자기 검토를 통해 쉬운 풍자를 넘어 우리 시대의 속 깊은 풍속도로 진화한다. 신뢰감을 주는 이야기의 세목들도 풍성하다. _정홍수(문학평론가)
『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는 1퍼센트의 최상위층이 이용한다는 신도시의 피트니스 센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대한민국 사회 현실의 축도인 이 공간이 이 작품의 주제이자 메시지라 할 수 있는데, 사우나 매니저로 일하는 주인공이 을도 아닌 병의 신분으로 갑들의 사회를 향해 던지는 펀치는 경쾌하지만 자못 신랄하고 맵다. 『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는 단순히 이 1퍼센트에 대한 풍자와 해학에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는 고령화 사회, 부의 편중과 지역 격차, 청년 실업 등과 같은 당대의 중요한 아젠다에 대한 풍부한 관찰과 실감, 그리고 강력한 문제제기가 담겨 있는 것이다. _정은경(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