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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 운동'하는 목사 최성규의 고집

'효 운동'하는 목사 최성규의 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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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1년 03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280쪽 | 508g | 153*224*20mm
ISBN13 9788953115224
ISBN10 8953115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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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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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기도 하지만 우리가정의 비극이기도 했다. 전쟁으로 서른두 살의 아버지와 두 분의 작은아버지를 한꺼번에 잃었으니 말이다. 그 바람에 우리 집안에 졸지에 과부가 셋이나 나왔다.
아버지를 잃은 나는 어머니를 도와 생계를 꾸려야 했기에 뭐든 돈이 되는 일이라면 몸을 아끼지 않고 했다. 하지만 열 살 꼬마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그리 많진 않았다. 더구나 전쟁으로 유린된 국토에서, 그것도 시골의 어린아이가 돈벌이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리나라 경제를 두고 영국 타임스의 한 기자는 “한국에서 희망을 찾느니 쓰레기통에서 장미꽃 피는 것을 기대하라”고 말할 정도로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였다. 암울한 시대적 환경은 내 유년을 전쟁의 상흔으로 물들이며 삶의 무게를 더해 주었고, 그 무게가 어찌나 버거운지 아버지의 빈자리를 그리워할 겨를도 없었다.
한참 뛰어놀 나이에 일을 하고, 학교에서 공부할 시간에 밭을 갈고, 잠잘 시간에 가마니를 지고 장터로 향해야 했다. 아버지가 있는 가정도 먹고살기 어려운 판국에 아버지마저 안 계셨으니 다른 집보다 어려운 건 당연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나는 당시의 고생을 비관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원대한 희망을 품은 것도 아니다. 그저 숙명으로 알고 묵묵히 오늘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놀고 싶어도 참아야 하고, 학교에 다니고 싶어도 마음을 눌러야 하고, 잠자고 싶어도 몸을 일으켜야 했던 그때의 삶은 나에게 책임감과 절제를 가르친 선생이었다. --- pp.15-16

학교에 다시 가게 된 겨울, 나는 어머니와 겨우내 가마니를 짰다. 가마니를 짜려면 먼저 볏짚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곰배로 볏짚을 빻는다. 짚의 숨을 죽여 보들보들해져야 비로소 장에 내다 팔 수 있는 자격이 된다. 그런데 곰배로 볏짚을 빻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열한 살 소년이 하기에는 힘에 부치는 일이지만 대신 그 일을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곰배로 빻아 짚이 부드러워지면 새끼를 꼬기 시작한다. 몇 날 며칠을 새끼를 꼬다 보면 더 이상 새끼를 꼴 수 없을 정도로 손바닥이 아프다. 손바닥에 힘을 주어 새끼를 꼬기 때문에 며칠간 계속하면 몽둥이로 손바닥을 맞은 것 이상으로 통증이 심하다. 그렇다고 멈출 수 있는 형편도 아니어서 계속하면 나중엔 손바닥에서 피가 난다. 내가 그만두면 어머니 혼자서 그 일을 다 해야 하니 피나는 손으로 새끼를 꼬았다. 며칠은 새끼만 꼬고, 새끼가 다 꼬아지면 또 며칠은 가마니만 짠다.
그렇게 쌀가마니 10장이 완성되면 천안 장에 내다 팔았다. 학교에서 돌아와 저녁을 먹은 뒤 초저녁에 잠깐 눈을 붙였다가 다음 날 새벽 2, 3시경에 일어나 집을 나선다. 가까운 곳에 장이 있긴 하지만 가마니 값을 제대로 받으려면 30리 길을 걷더라도 천안 장에다 내다 팔아야 했다. 장에 갈 때는 보통 쌀가마니 10장을 지고 마을 어른들과 함께 출발하는데 언제고 어린아이는 나 혼자다. 어리다 보니 가마니를 지고 일어나지 못해서 고꾸라지거나 캄캄한 산길에서 발을 헛디뎌 구른 적도 있다. 가마니를 지고 5시간 동안 산길을 걸으면 한겨울에도 비 오듯 땀이 쏟아진다. 함께 떠나는 마을 어른들의 걸음을 놓칠 새라 코앞도 분간할 수 없이 어두운 산길을 잰걸음으로 걸어 장에 도착하면 훤하게 동이 터 오곤 했다. --- pp.24-25

대학을 졸업할 무렵, 전에 일하던 화장품 공장 사장님으로부터 다시 와달라는 권유를 받고 죽도록 일만 하고 빈손으로 나온 그곳으로 다시 갔다. 젊은 날의 열정을 고스란히 바치고도 빈털터리로 나온 게 억울하기도 했지만, 회사 설립 초기부터 나의 손때와 흔적을 구석구석 남기며 구슬땀을 흘린 곳이라 외면할 수 없었다. 다시 돌아간 회사에서 지난날처럼 일에 파묻혀 몇 년을 보내자 사장님은 회사 운영을 내게 맡기고 자신은 다른 사업에 손을 댔다. 하지만 무리하게 투자해서 시작한 나염공장으로 인해 잘나가던 화장품 공장마저 자금 압박에 시달리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부도가 나고 말았다.
사장님이 회사를 떠나실 때 내심 그동안 받지 못한 급여를 정산해 주거나 집을 사주겠거니 기대했다. 당시에 100만 원이면 집을 한 채 살 수 있었는데 그분은 집은커녕 밀린 급여도 정산해 주지 않고 회사를 떠났다. 열여덟 살부터 서른한 살까지 용돈 정도만 받으며 그분에게 충성한 셈이다. 그분은 집 사준다는 약속도, 공부시켜 준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13년 동안 그분을 위해 봉사했지만 고등학교를 다니던 1년 반 동안 학비를 대준 게 전부였다. 결국 13년 동안 죽어라 일하고 받은 것은 실망과 아픔뿐이었다. 하지만 이 일을 통해 나는 중요한 인생의 교훈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분에게서 받은 배신의 상처를 조용기 목사님을 통? 보상해 주셨다.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정성껏 키운 나무에서 아무런 열매를 얻지 못했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내가 준물과 거름과 정성이 그 옆에 있는 나무로 흘러 들어가도록 물줄기를 바꾸어 주셨고, 결국 옆에 있는 나무에서 열매를 거두도록 하셨다. 나무는 달라도 나무가 심긴 땅의 주인은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언젠가는 흘린 땀의 보상을 주인으로부터 받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고를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수고의 열매를 거두지 못했다고 낙심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 pp.55-56

1973년 1월 15일 주일 새벽, 다른 날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밤새 종교를 놓고 고민하느라 잠을 설쳤는데도 새벽에 깬 것이다. 무슨 종교를 선택해야 할지 결정을 못하고 있는데 불현듯 한 장소가 떠올랐다. 언젠가 영업부장과 함께 서대문 사거리의 어느 교회 앞을 지나다 많은 무리의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사람이 워낙 많아서 잠깐 차에서 내려 구경이나 하려 했더니 영업부장이 그런 데 가면 큰일 난다며 부득불 말렸다. 그런 데 빠지면 회사 일에 소홀해져서 안 된다는 거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영업부장이 불교신자여서 의도적으로 막은 거였다. 그날 새벽,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교회 앞에 있었는지 궁금해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전신인 순복음중앙교회로 향했다.
그날도 교회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가 보는 예배당이었다. 난생처음 드리는 예배에서 심한 경상도 사투리로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에 빨려들었다. 마치 내 사정과 심정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한 말씀 한 말씀이 나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놀라움과 경이로움, 벅차오르는 감동으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정말이지 낯선 경험이었다. 그리고 정체 모를 뜨거운 감정은 그 자리에서 다음 예배를 또 드리게 했다. 두 번째 예배에선 성령의 강한 역사가 일어나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눈물, 콧물 다 흘리며 불신앙을 회개했다. 온몸이 붕붕 뜨는 기분으로 두 번째 예배를 마치고 다음 예배도 또 드리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밀려들어 그만 일어섰다.
하나님 아버지가 생긴 벅차오르는 감격은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그치지 않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계속 흐르는데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볍고 상쾌했다. 그리고 가슴이 벅찼다. 아버지 없는 내게 아버지가 생긴 것이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은 가슴 벅찬 감동이었다. 내게도 이제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가 생겼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있는 친구들이 제일 부러웠다. 지게를 짊어진 아버지든 가난한 아버지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분이 있다는 그 자체가 부러웠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나자 전지전능하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신 것이다. 그동안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서러움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토해내기라도 하듯 아버지를 연신 불렀다. 내가 지금도 하나님을 부를 때 단순히 “하나님”이라 부르지 않고 꼭 “하나님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 pp.60-62

‘성경적 효’를 발견한 기쁨과 감격 때문에 “효가 살아야 모두가 산다! 효를 행하면 모두가 행복하다!”를 외치며 한 길을 달려온 지도 어느덧 16년이 되었다. 지난 16년 동안 전 세계에 유일한 성산효대학원대학교를 설립하고, ‘효행장려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며 숨 가쁘게 달려왔다. 16년을 집중하니까 효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교회와 학교와 사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구도 우리가 이처럼 놀라운 일을 해내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해냈다.
16년 전에 성경적 효를 외칠 때 사람들은 구경만 했다. 듣기만 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홀로 걷자니 외로웠고 힘들었다. 그때마다 힘을 실어 준 이는 나의 든든한 동역자인 교역자들과 성도들이었다. 그들의 간증은 내 심장을 뛰게 만들었고 이 길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그중 하 집사님의 이야기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하 집사님은 시도 때도 없이 속에서 불덩어리가 올라오는 병으로 인해 오랫동안 약을 복용했다. 속에서 불덩어리 같은 게 올라오면 한겨울에도 옷을 다 벗어야 했고 심한 날에는 냉수로 샤워해도 가라앉지 않았다. 하 집사님의 병명은 화병이다.
울화병이 생긴 건 결혼 이듬해라고 한다. 성실한 남편에게 끌려 결혼해 시어머니를 모시고 신혼의 단꿈에 젖었다. 그러나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날부터 신혼의 단꿈은 산산조각 났다. 시어머니는 어설픈 솜씨로 차린 새댁의 밥상을 먹을 게 없다고 발로 걷어차고, 세탁기로 돌린 빨래는 마음에 안 든다며 옷장에 걸린 옷까지 꺼내서 손빨래를 강요했다. 셋이서 함께 밥을 먹은 뒤에는 밥상머리에서 틀니를 빼내 이쑤시개로 청소를 하고 심지어 교회에 가는 것도 눈치를 주었다. 도저히 마음을 열 수 없는 분이었다. 지옥 같은 날들이었으나 아기를 낳으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 희망을 품고 모진 시집살이를 견뎠다.
결혼 3년차에 바라던 아기를 낳았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가느다란 희망의 끈마저 끊어지자 그동안 억눌렀던 원망이 폐부를 뚫고 나왔다.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세상을 향한 원망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하나님마저 자신을 외면한 것 같아 원망하며 교회도 가지 않았다. 구역장도 찾아오고 교구 전도사님도 찾아왔으나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그들도 다 한통속처럼 보여 만나는 것조차 싫었다. 그들의 권면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신들이 내 비참한 삶을 알기나 해?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냐고!’
구역장이 아무리 찾아와 문을 두드려도 만나 주지 않으니까 나중에는 「순복음뉴스」만 현관에 꽂아 놓고 돌아섰다. 하 집사님은 구역장의 발소리가 사라지면 얼른 나가 교회 신문을 들고 와 쓰레기통에 구겨 넣었다. 그렇게 1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장을 보고 오다가 현관문 틈에 끼어 있는「순복음뉴스」를 빼들고 들어왔다. 장을 본 물건을 정리하고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았다가 식탁에 놓인 교회 신문에 눈길이 갔다. 대충 훑고 버리려던 마음과 달리 한 면 한 면 읽어 내려가다 고난주간 설교를 읽게 되었다.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진 고난과 수모, 조롱과 멸시를 받으시고 믿었던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한 내용을 읽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당신을 못 박은 자들을 용서하고 그 고통 속에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가슴에 파고들어 목 놓아 울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못함이니이다”(눅 23:34).
이 말씀이 명치끝에 걸려 하 집사님을 불편하게 했다. 결국 부활주일 아침 교회에 나갔다. 예수님의 고난이 죽음으로 끝났더라면 2000년 전 한 유대인 청년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 이상의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하 집사님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자신의 삶에 연결해 해석했다. 자신의 고난에 숨겨진 뜻이 있을 것이고, 고난 끝에 가정이 변화되는 부활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여러 달이 흘렀지만 상황은 여전했다. 아니, 매일 효에 대해 이야기하는 교회가 전보다 더 싫었다. 다시 교회를 찾은 게 후회되었지만 구역장한테 미안해서 또다시 등질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며 효 실천을 강조하는 설교가 귀 언저리에 맴돌았다. 부담되었고 죄스러웠다.
가정의 부활을 경험하려면 자신이 먼저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눈도 마주치기 싫은 시어머니에게 먼저 다가가기로 용기를 냈다. 수없이 번복하고 갈등하며 내린 용단이었다. 교회에서 오는 길이면 시어머니가 좋아하는 반찬과 과일 위주로 장을 봤다. 간식도 꼬박꼬박 챙겼다. 남편의 협조도 구했다. 퇴근 후 1시간 이상 어머니 방에서 나오지 말고 말벗을 해드리라고 일렀다. 두 사람이 같이 있을 때 하 집사님은 꽃다운 나이에 혼자되어 아들 하나만 바라보고 평생을 사신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면 서도 가끔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 때문에 괴로웠다.
8개월간 기도해도 꿈쩍도 안 하셨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구나’ 하며 지쳐 갈 무렵 어머니가 하 집사님을 불러 같이 목욕을 가자고 하셨다. 거절할까 하다 등이나 밀어드릴 생각으로 따라갔더니 목욕탕에서 어머니는 “어미야, 그동안 네 속 긁은 것 오늘 내가 다 씻어 주마” 하시며 등을 밀어 주셨다. 등을 맡긴 하 집사님은 고개를 숙이고 소리 없이 울었다. 당신의 등을 맡기면서는 “내 못된 심술 하나도 남기지 말고 박박 밀어라” 하셨다. 하 집사님은 그날 결혼 6년여 만에 처음으로 어머니가 사주신 점심을 먹었다. 그 어떤 점심보다 맛있었다. 싸늘하던 집안 공기가 훈훈해졌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효를 통해 변화되는 가정을 목도하며 인천순복음교회에 준 사명을 거듭 확인하곤 한다. 그들의 살아 있는 간증은 효 실천 운동에 더욱 매진하는 이유가 된다. 나는 확신한다. 효를 통해 화목한 가정이 세워지고, 화목한 가정이 모여 건강한 사회를 이루며, 건강한 사회는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는 사실을. 효는 이 시대에 무너진 가정과 병든 사회를 건강하게 일으킬 정신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길을 계속 갈 것이다. 효 운동을 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에 대한 갈등은 전에도 없었고 후로도 없을 것이다. 효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꿈이요, 사명이요, 복이기 때문이다. --- pp.181-185

성경적인 효란 무엇인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되었다. 성경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다. 성경적 효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믿고, 듣고, 깨달아 말씀대로 사는 게 성경적인 효다. --- p.191

나는 이상하리만치 나라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 나라가 조금만 어려우면 자동으로 금식기도에 들어간다. 나라에 관한 한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한다. 그래서 목회하면서 개인적인 일이나 교회일로 금식을 한 날보다 나라 일로 금식한 날이 훨씬 더 많다. 개인적인 문제로 흘린 눈물의 양보다 나라 때문에 흘린 눈물이 더 많다. 담임목사를 닮아 우리 성도들도 나라를 위해 금식하는 일이 잦다.
1987년 총동원 전도주일을 앞두고 100일 작정기도를 할 때 우리는 전도만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라를 위해서 더 많이 기도했다. 하나님은 다른 기도할 시간을 내게 허락지 않으시고 나라를 위한 기도만 시키셨다. 온 나라가 민주화 투쟁으로 어지러울 때, 우리 교회 천여 명의 성도들은 송도 뒷산에 올라 눈물로써 부르짖었다. 인근 주민의 신고를 받고 경찰관이 산에 올라온 적도 있다.
경찰은 나라를 위해 울면서 기도하는 성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없이 내려가곤 했다. 총동원주일 바로 다음날인 6월 29일, 하나님은 당시 노태우 총재로 하여금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게 하셨다. 다른 사람들은 민주화 선언을 오랜 민주 투쟁의 결과로 보겠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확신한다. 그렇게 자신할 만큼 죽을힘을 다해 구국기도를 했다.
이제는 성도들도 내가 말하기 전에 나라를 위해 우는 구국기도의 용사들이 다 되었다. 나에게 나라는 내 자신보다 우선하고, 교회보다 우선한다. 나라 없이 내가 존재할 수 없고, 나라 없이 교회가 존재하지 못하는 건 자명한 일이다. 내가 이렇게 나라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데는 해방과 전쟁을 경험한 나의 성장사와 관련이 깊다. 더구나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사명을 주셨다.
--- pp.24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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