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을 하는 친구들도 당연히 저마다의 고충이 있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원하는 일을 하며
예쁘게 꾸미고 다니는 미혼 친구들,
어쩐지 더 성공한 삶을 사는 것만 같은 그들의 모습을 볼 때면
육아만 하고 있는 내 모습에
멋진 의미를 부여하기가 좀 힘들었다.
그러다 문득 아기를 보물처럼 안고 삼삼오오 지나가는
젊디젊은 아기 엄마들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라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을 해내고 있는,
어쩌면 인생 최대의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있는 그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일상의 ‘위너(winner)’가 아닐까. ---「위너」중에서
우리 엄마는 날 가졌을 때 홍옥이 그리도 먹고 싶었단다.
새큼달큼하고 단단한, 별로 비싸지도 않는 그 사과를
돈이 없어서 못 먹었다는데, “지금이라도 사줄까?” 하니
“지금은 이가 안 좋아서 못 먹어” 하신다.
아, 딱 한 번이라도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나는 1984년 1월 22일로 가야지.
24시간이 넘는 진통을 견디고
혼자 짐 가방을 꾸려 분만대 위까지 도착한
만삭의 아가씨에게 가야지.
지금의 내 나이보다 훨씬 어린 스물아홉의 엄마에게
새빨간 홍옥 한 봉지를 들고서.
그러고는 말해야지. 힘내라고.
나중에 나중에 홍옥보다 더 멋진 걸 갖게 된다고.
배 속에 있는 아이가 크고 커서 또 딸내미 하나를 낳는데
붉을 ‘윤’에 구슬 ‘아’ 자를 쓴 윤아라는 이름을 가진
예쁜 녀석이라는 것도 함께 말해주어야지. ---「시간을 달리는 소녀」중에서
가끔 엄마의 입장에서 벗어나 ‘사람 대 사람’으로 욱할 때가 있다.
그리하여 결국엔 ‘사람 대 괴물’로 변해 있는 관계를 마주한다.
“어쩌라고!!!”
소리를 질러버린 날,
얼마 못 가, ‘아, 어쩌지?’ 하고 후회한다.
내 안에 오래도록 잠복되어 있던 독이 올라오는 느낌이다.
아이에겐 이런 내 모습이
초미세먼지보다 더 치명적일 텐데…. ---「초미세먼지」중에서
지난주까지 집에 와계시던 엄마가 쓰던 이불, 베개를
일주일이나 더 거실에 뒀다 집어넣었다.
요즘 들어 자꾸 누군가와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살면서 생기는 크고 작은 일,
좋고 나쁜 일, 그로 인해 생기는 마음의 소란도
나 혼자 껴안기엔 아직 부족한 어른인 것 같다.
문제가 생기면 무엇부터 손대야 할지 잘 모르겠고
그러다 결국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지기도 한다.
곁에 두고 시시콜콜 상의할 대상이 필요한 걸까,
에둘러 쿨한 척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실은 나는 아직도 어딘가에 치대길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다. ---「그때도, 지금도」중에서
어제 못 했던 말을 오늘 하고
오늘 못 하는 말을 내일이면 하겠지.
몸무게 늘어나는 속도는 이제 줄었는데
그 외의 것들이 서운하리만치 속도를 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부스스 눈 비비며 인사하는
아이 얼굴을 살펴보니
어제 모습이 영 보이질 않네.
괜히 맘이 토라진다.
자식이… 급하게도 가네. ---「매일 이별」중에서
혼자서도 척척 카시트에 잘 앉던 녀석이
며칠 전부터 “융나가 엄마 무릎에 앉아”라며 카시트를 거부한다.
“자동차가 달릴 땐 의자에 꼭 앉아 있는 거야”라고 했더니
결국, 폭발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울고불고….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적합한지 아닌지
아무런 생각도 판단도 할 수 없는 몇십 분이 흘렀다.
그렇게 반 포기 상태로 30분 정도를 묵묵히 참던 남편이
조용히 창문을 내린다.
갇혀 있던 아이 울음소리가 밖으로 나가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 사이로 습하고 더운 공기가 훅 들어온다.
달리는 차 소리와 울음소리가 섞인 혼돈의 질주.
그렇게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그저 달리고 또 달렸다.
육아가 힘든 건 참아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참아도 참아도 도망칠 곳이 없기 때문이다. ---「no exit」중에서
그 시절 엄마에겐 목욕탕 가서 본전을 빼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했을 테니, 이젠 이해한다.
그래도 매번 갈 때마다 사포로 민 것 같은
상처가 생기고 그 상처가 나을 때쯤이면
또 주말이 돌아와 목욕탕에 가는 게 어찌나 싫었던지.
상처 나는 게 싫다기보다는 아프다고 말하는데도
“이게 뭐가 아파?” 하며 마치 무통주사라도 맞은 사람처럼
공감해주지 못하는 엄마의 모습에 진짜 속상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윤아가 떼를 쓰면 내가 그렇다.
무통주사 한 박스 맞은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은 자식 혼낼 때 애처롭고 아프다는데 난 왜 이렇지.
상황은 다르지만 결국 내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던 엄마처럼
나도 똑같이 윤아를 대하고 있는 것 같아서 찜찜하다. ---「무통지옥」중에서
배변훈련에 잘 적응해나가던 어느 날.
윤아를 데리고 카페 화장실에 들어가려는데
살짝 컴컴한 분위기의 카페 화장실이 무서웠는지
”어어어, 아니에요. 싫어 싫어!!“ 하면서
완강히 거부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관광객들의 이목을 받으며 실랑이를 하던 사이
“쉬이이이이이”
어느 손님의 테이블 앞에서 그대로 소변을 해버리고 만 윤아.
뜨아아!!! 너무 당황해서 할 말을 잃은 나는
연신 탄식을 하며 사태를 수습한 후 겨우 카페를 빠져나왔다.
한 손엔 기저귀만 입은 윤아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엔 젖은 바지를 들고.
연꽃이 가득 피어 있는 ‘연화못’이라는 곳을 지나오는데
어쩐지, 부처의 가르침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할 것만 같았다. ---「부처의 마음」중에서
마음을, 시간을, 눈앞의 일들을
하고 싶은 대로 컨트롤하는 건 여전히 힘들지만
사랑이라는 게 남녀의 이야기이기만 했던 때에는 잘 하지 못했던
직진 사랑, 퍼붓는 사랑을 할 수 있으니
이건 정말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너라는 기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