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궐 제국 멸망 후 스텝 지역에서 튀르크의 종족적, 문화적 전통을 계승한 국가는 위구르 제국이다. 위구르의 등장으로 돌궐 제국 체제에 느슨하게 결합됐던 튀르크족들은 다시 흩어졌고, 많은 튀르크 부족이 서아시아나 러시아의 스텝 지역으로 진출해 소국을 건설했다. 위구르는 과거 돌궐 제국의 중심지인 북아시아에 제국을 건설하고, 13세기 몽골족이 패자로 등장할 때까지 중원과 직접 대결한 마지막 튀르크 국가였다.
초기 위구르에 대해 알려진 것은 이들이 5세기 후반 북아시아 전역을 석권하고 있던 퇼레스鐵勒 부족 연맹의 일개 부족이었다는 정도다. 위구르는 돌궐 제국 시대에도 독립된 부족 집단 형태로 독자성을 유지하며 셀렝가강 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과 비교적 우호 관계에 있었으나 돌궐 제국과는 적대적이고 불편했다.
7세기 초, 퇼레스 부족 연맹이 와해되자 위구르족은 독자적인 위구르 왕국을 건설했다. 이후 보살 에르킨이 타르두스족의 추장 이난과 연대해 동돌궐군을 패퇴시킴으로써 일시적인 부흥기를 맞았다. 보살 에르킨은 어머니의 조언에 따라 철저한 법치로 사회를 안정시켰다. 또한 부족장을 에르킨 대신에 ‘일테베르’라 부르며 권위를 강화하고, 돌궐의 정치 제도를 받아들여 국가를 정비했다.
위구르 제국의 중심부를 톨라강 변에 둔 토미도 일테베르는 부고, 동라 등의 부족과 함께 타르두스족을 공격해 다미 카간을 죽이고, 타르두스 지역을 병합하여 소위 9성姓으로 알려진 도쿠즈 오우즈 연맹을 주도했다. 토미도 일테베르가 동부 스텝 지역의 패자로 급부상하며 황하 유역까지 남진하자 당은 646년 그에게 울루그 일테베르란 칭호와 함께 왕으로 공식 인정했다.
648년에 토미도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파윤이 일테베르가 되었다. 그는 656년까지 온오크족의 카간 호루를 제압하고, 타슈켄트 근교까지 진출했다. 또한 당 고종의 서돌궐 제국 하로 카간의 반란 평정과 고구려 정벌에도 군대를 지원했다.
그 뒤를 이어 일테베르가 된 여동생 때 다시 약화됐다가 세력을 차츰 회복해 당 현종 때 양주 도독 왕군부를 살해하고, 스텝에서 장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차단했다. 742년엔 바스밀, 카를룩과 연합해 동돌궐 제국을 공략했다. 이후 동부 스텝 지역에서 독자적인 국가를 수립하고, 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용해 동서 교역의 기득권을 계속 유지해 나갔다.
이러한 독자적 결집은 돌궐의 카간 카프간과 이넬 통치 시대 반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위구르 연합이 쉽게 재건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이로써 위구르는 일테베르를 중심으로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740년경에는 좀 더 발전된 야브구 통치의 국가를 이룩했다 - '21 위구르 등장 - 마지막 튀르크 국가'
술레이만 1세는 1494년 오스만 제국의 군주 셀림 1세의 아들로 태어나, 열다섯 살에 마니사 지방 총독직을 맡으며 국정 경험을 쌓았다. 원정을 떠난 술탄을 대신해 내치를 챙기면서 황제 수업을 받은 그는 1520년 3월에 셀림 1세가 죽자 26살의 젊은 나이에 제위에 올랐다. 이후 술레이만은 무려 46년간(1520~1566)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제10대 술탄이다. 예술적 재능과 뛰어난 군사 전략, 학문적 깊이를 두루 갖춘 성군으로, 평생을 정복 전쟁으로 보내면서 가장 강력하고 광대한 제국의 영토를 일구었다.
술레이만 1세는 선대 술탄들의 정책을 따라 동쪽의 오리엔트보다는 유럽 방향으로 정복을 계속해 나갔다. 헝가리 남부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새인 베오그라드를 10만 대군으로 장악하기도 했다. 곧이어 에게해의 요충지인 로도스섬도 공격했다. 성 요한 구호 기사단이 오랜 기간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막아내며 요새화시킨 곳으로, 1522년 이 난공불락의 섬을 정복하면서 아라비아 반도로 연결되는 교역로를 확보했다. 여세를 몰아 수차례 페르시아를 공격하고 이라크와 쿠르디스탄 대부분, 아르메니아 서부, 이슬람의 중심 도시 바그다드를 빼앗아 오스만 제국에 병합했다. 예멘의 아덴도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편입했다. 또한 1538년에는 프레베자 해전에서 로마 교황청과 베네치아, 스페인의 연합 함대를 격퇴함으로써 지중해를 오스만의 바다로 접수했다. 해전에서 거둔 승리로 그의 치세 동안 북아프리카 트리폴리, 튀니지, 알제리 진출이 이어졌다.
술레이만은 정복 전쟁 이후 내치에 주력해 입법 제도를 완비했다. 《군하총회》, 《이집트 법전》, 《술레이만 법전》 등이 모두 그의 손에서 정비됐다. 《군하총회》는 오스만 제국 중심 법전으로, 귀족 간 내분을 종식하고 안정적인 제국의 통치 제도를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술레이만 법전》은 토지, 전쟁, 군사 제도, 지방 치안과 형법 등 각 방면에 대한 시행 세칙으로, 안정적인 법치를 완성했다.
예술 후원자로도 잘 알려진 술레이만은 오스만 600년 전 시기를 통틀어 건축, 회화, 서예, 병기, 타일과 직물, 공예, 문학 등 거의 전 분야를 증진시켰다. 그의 일기인 《전쟁일록》은 당시 궁정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다.
유럽인에게는 ‘위대한Magnificent’ 술탄, 튀르크인에게는 ‘카누니Kanuni’, 즉 입법자로 불린 술레이만 시대에 오스만 제국은 최전성기를 누렸다. - '67 술탄 술레이만 1세 - 제국의 황금기를 이끈 성군'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