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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모자를 쓴 남자

빨간 모자를 쓴 남자

알마 인코그니타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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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06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180쪽 | 284g | 130*213*20mm
ISBN13 9791159921544
ISBN10 115992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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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나에게 엄청난 힘을 주었다, 이 고통은 나를 거물로, 거인으로 만들어주었다, 고통을 참아내는 나의 참을성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고통은 나의 생각 하나하나에서 나를 성장시키는, 나 자신을 알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 --- p.42

레나가 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세상이 이 노트, 이 길, 이 사무실 같이, 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에요, 그렇다면 지겨워 죽을 지경일 거예요, 분명히 다른 것이 있어요, 감춰진 규칙과 법들이, 지하의 시스템이나 천상의 시스템이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이 삶은 전혀 흥미롭지 않을 거예요.” --- p.68

나는 여행으로 몹시 지쳐 있었다, 그러나 야니가 파리에서 슬라이드로 보여준 새로운 시리즈의 그림들을 당장 보고 싶었던 나는 곧장 그곳으로 갔다. 비 때문에 자물쇠가 잘 열리지 않았다. 나는 이 세상에서 문을 여는 일에 가장 재주가 없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아틀리에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몹시 안달이 났기 때문에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물쇠를 여는 데 성공했다. 나는 새로운 그림들이 흉측하다고 생각했다, 야니가 나를 저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인가, 그래서 내가 그를 원망했기 때문인가? 나는 아틀리에 안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나는 야니를 사랑했다, 그것은 에로틱한 끌림이 아니었다, 나는 나의 작업 능력보다 훨씬 더 뛰어나 보이는 그의 작업 능력과도 연결된, 자신에 대한 그의 집착에 매료되었다. 그것은 극단적인 사례였다, 자기의 일을 해치우는 사람, 자기에게 미친 사람, 자기의 작업을 위해 자신을 괴롭히는 이 천재 같은 호인을 통해서, 나는 나 자신을 관찰했다. --- p.75

야니는 인기 있는 ‘신진 화가’였다, - 이런 종류의 표현에는 많은 따옴표가 필요하다 - 내가 병들고 십중팔구는 불치 선고를 받은 것이라 해도 나 역시 유행하는 ‘신진 작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야니만큼 부자는 아니었다, 나는 센트럴파크에 아파트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마레 지역에 800제곱미터 크기의 아틀리에와 사냥 쉼터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나에게는 비서 역할을 겸해주는 부인도 없었고, 내 사업을 담당하는 형도 없었으며, 나에게 속한 농노들도 없었고, 나를 도와 작품 구상이나 초안을 준비하고 나는 거기에 서술적인 몇몇 세부사항을 덧붙이기만 하면 되는, 그런 역할을 해줄 수 있는 보조 작가도 없었으며, 관광으로 훼손된 이 섬에 다시 번식시키려고 애쓰는 희귀 동물들, 즉 야생 당나귀, 공작새, 흑돼지도 없었다. 몇 개의 가짜 그림들을 제외하면, 실제로, 나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다. --- p.75~76

나는 네그라가 가장 좋아하는 동반자였다, 가족 중에서 가장 일찍 일어나 밤의 고독으로부터 네그라를 해방시켜주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네그라는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그 암캐는 빵 굽는 화덕에서 잠을 잤고 개집을 무시했다. 나는 네그라처럼 영지 안에서 나의 자리를 차지했고 나만의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아침에는 집을 따라 길게 이어진 갈색의 젖은 돌난간 위에서, 폭풍우의 잿빛 구름과 바다를 바라보며 있었다. 햇빛이 빛나기 시작할 때면, 네그라는 나의 발치에 길게 누웠고 등을 땅에 대고 몸을 돌려 젖꼭지를 문지르게 했다. 오후의 끝자락이면 나는 주인이 없는 아틀리에 앞에 앉아 있었다, 침묵하는 높은 산들과 빛의 부재로 아무런 표시도 보이지 않는 해시계탑과 당나귀들이 꽃을 뜯어먹는 캐롭나무 숲 사이로 나는 이리저리 시선이 닿는 대로 몽상에 잠겼다. 나는 거기서, 무엇이든 불시에 나타나기를, 일어나지 않는 무엇인가를 몇 시간이고 기다렸다. 그것은 지루함이 아니었다. 마치 산의 정기를 지닌 무엇인가를 받아내듯이 나는 산들을 향해 심호흡을 했다. 나는 행복했다. --- p.83~84

글쓰기를 통해 여러 일들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때로 저항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나는 야니 앞에서 포즈를 취했던 시간들에 대해 세 번이나 쓰려고 시도했고, 그 여러 달 동안에 세 번 다 종이를 즉시 찢어버리고 싶었다. 나의 시도는 그 순간의 성대함을 배반하고, 보편화했다. 나는 진정한 불가사의, 그러니까 파악할 수 없는 어떤 것, 즉 회화 속으로 도주하는 육신, 화폭 위로 점차 드러나는 영혼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있었다. --- p.118

그는 말한다, “나는 네 영혼을 가졌어.” 이 순간은 두 시선 사이에서, 즉 그림을 그리면서 응시한 시선과 그려지면서 응시한 시선 사이에 일어난 경이로운 집중력에서 비롯된 사랑이었다. 그것은 에로틱한 활동을 가소롭게 만들 수 있는 육체적 활동이었으며, 말할 필요도 없이, 에로틱한 활동을 표현하지 않고도 에로틱한 것을 포함하는 육체적 활동이었다. 그렇지만 그 모든 일들이 완전히 다르게 이야기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야기는 열 페이지에 달할 수도, 또한 이제껏 내가 해내지 못한 것이지만, 명석한 몇 줄에 그 모든 이야기를 다 담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일화를 이처럼 고착시키는 것이 바로 글쓰기의 우연이고 절망이다, 내가 그것을 찢어버리고 다시 시작할 때까지, 언제까지나, 항상 똑같이, 미칠 지경까지, 침묵까지. --- p.119~120

나는 그 청년을 아주 좋아했어, 하지만 사랑에 빠졌던 건 아니야. 나는 한 달 넘게, 매일 오후에 그의 집에 갔었어, 그를 만나는 건 매번 아주 큰 기쁨이었어, 그는 차를 내오고, 우리는 콕토 트윈스를 들었지, 그를 따라 관리실로 내려가 그에게 온 우편물 꾸러미를, 오려낸 그림들로 봉투를 꾸민 그의 누이의 편지들을, 그의 부모님이나 회화 수업 친구들이 보낸 편지들을 찾는 것을 볼 때 나는 무척 행복했어, 그의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생마르탱 운하의 다리를 건너갈 때면 그의 집 창문에 불이 켜져 있는지 살펴보았어, 다락방 가운데 창문에 불이 꺼져 있으면 나는 때로 지독하게 슬퍼졌지, 편지를 보내는 일이 드문 시절이었지만, 그는 나에게 편지를 썼고 나는 그에게 답장을 했어, 그래서 나는 그 청년과의 우정이 우리 생애 동안 내내 지속되리라 생각했어, 그가 나와 함께 살 거라고, 그가 나의 집에서 그림을 그릴 거라고, 그가 그림을 그리면서 편안하게 있을 수 있도록 나는 내 아파트 전체를 뒤죽박죽으로 만들 거라고 생각했지. --- p.120~121

- 나에게도 정확하게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일이 진행될 거야”, 야니가 말했다, “지금은 네가 나를 좋아하지만, 언젠가는 내가 너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거야, 너는 더 이상 나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을 거고, 내가 너를 그린 초상화들도, 내가 너에게 가지고 있는 우정도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 거야.” --- p.122

그가 십 대였을 때, 바다로 들어가 죽어가는 문어들로 수영복을 가득 채우면서 고기잡이를 다니던 그때, 수영복 고무줄을 배 위로 당기면 보이던, 허벅지에 붙어 수영복에서 삐죽 삐져나와 수치심을 느끼게 했던 단단하고 작은 성기를 문어들 속에 묻어버리던 시절이었다. 그가 도라와 함께 수영을 할 때는, 해변에서 도라의 부모님이 그를 볼까 두려웠기 때문에, 그의 성기가 수축될 때까지 그는 물 밖으로 감히 나오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가 발기를 풀려고 집중하면 할수록 그의 성기는 더욱 단단해졌었다. 그는 호흡을 멈추고 도라의 가랑이 사이로 잠수했으며, 그녀의 엉덩이에 매달렸고, 잊지 못할 조가비의 장밋빛 외음부를 보기 위해 물속에서 그녀의 수영복을 벗겼었다. --- p.127

분명한 일은, 아무도 우리를, 레나도, 나도 미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도 우리를 감시하지 않는다, 아무도 우리를 보호하지 않는다,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그것이 진실이다. --- p.145

우아가두구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게르투르드는 이른 아침에 내가 코르푸에 도착했을 때 몹시 놀랐었다고 털어놓았다, 내가 그녀의 첫사랑과 꼭 닮았다는 것이었다, 나의 손은 그의 손과 같았고, 나의 입은 그의 입이었고, 귀도 완전히 똑같다고 했다, 그 말을 하면서 그녀가 내 귀를 뚫어지게 보았을 때, 나는 그녀가 내 귀를 콱 깨무는 것 같았다.--- p.167

분실된 그 50페이지들, 지금은 어디인지 모르는 곳에 있는 그 페이지들을 내가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 해도 이제는 소용없는 일이다, 나는 그 페이지들을 다시 쓸 수 없다, 일단 이야기들이 쓰이고 나면, 그것들은 나에게서 사라져버린 것과 같다. 내가 이다음에, 다른 방식으로, 다른 책에서, 어마어마했던 아프리카에서의 그 여행 이야기를 다시 쓰게 될까? 모르겠다. 나는 다시 이 책을, 내가 이전에 쓴 다른 모든 책들처럼, ‘미완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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