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남아 있는 또 하나의 길이 있다. 그것은 환상의 길이다. 이 길을 전통적으로 우리는 종교, 예술 따위로 부른다. 종교와 예술은 첫 번째 길도 아니고 두 번째 길도 아니다. 첫 번째가 아닌 것은 종교나 예술은 자연이 아니기 때문이며 두 번째가 아닌 것은 그것은 인간 문제의 해결을 위한 현실적인 ‘해결을 위한 수단’이나 기술이 아니라 ‘해결’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해결’은 환상의 해결이다. 마음속의 길과 마음속의 지도를 현실의 길인 양 걸어가는 환상이다. 여기서는 마음=자연이라는, 관념의 실체화가 의도적으로 실천된다. …… 종교나 예술의 길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까닭은 자명한 것 같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우주의 움직임이다. 우주 쪽에서 보면 우주는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인간은 그 길 위에서 또 자기 길을 가고 있는 2차적인 존재이다. 그런데도 그가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를 1차적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다. 이 2차적 존재가 자기 자신을 1차적인 존재로 착각할 수밖에 없는 이 근원적인 모순의 길이 표현되는 방식이 예술이나 종교라는 환상이다._‘길에 관한 명상’에서---pp.37~38
한국의 개화가, 민족사가 안에서 곪아 터지는 방식이 아니고 수술당한 형식이었다는 것은 이 역사의식의 연속성을 끊긴 것이 된다. 수술의 고통에서 깨어나 보니 상처는 아물었는데, 자기 자신이 누구였던가를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어떤 사회적 변화가 그 사회의 오랜 역사의 여러 요소가 어울려서 이루어졌을 때는 그 사회는 스스로 운동하고 조종한다. 역사라는 것은 한 개인은 물론이요, 한 세대나 한 시대의 힘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모든 시간의 힘으로 밀려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과거의 시간 혹은 전체적 직관, 혹은 연속 감정과 단절되었을 때는 그 사회는 자기 행위를 유기적 연속의 형식으로 진행시키지 못하고, 기계적 가산, 미봉, 찰나적 반사, 모방의 연속으로써 하게 된다. _‘소설을 찾아서’에서---pp.129~130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말이 있다. 중요한 장기가 병들었든, 손끝에 가시가 하나 박히든 인간은 똑같이 사로잡힌다. 인간의 육체는 심장이 손가락을 소외시키는 일이 없다. 육체라는 것은 상당히 이상적으로 우정과 사랑, 나와 너가 하나인 대단한 사랑의 조직체이다. 그러나 어떤 국가ㆍ사회ㆍ제국도 그렇게 순수한 육체의 조화로운 통일과 같은 유기성은 없다는 데 문명의 모순이 있다. 가령 어떤 사회에도 ‘천국이 따로 없다’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기본적인 물질적ㆍ정신적 보장조차 못 받는 사람들이 공존한다. 그 사회에서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나머지 부분인데 그 부분을 어떻게, 어느 정도 아파하느냐 하는 것이 인류 역사 발전의 척도라고 할 수 있다. _‘완전한 개인이 되는 사회’에서---p.176
역사란 수학 문제가 아닙니다. 머리만 좋아서 풀리는 문제가 아니라, 풀리면 밑지는 사람들이 방해하기도 하는?그것이 보통인 그런 현상입니다. …… 형제끼리도 싸우고, 같은 신앙자끼리도 싸우고 동맹국끼리도 싸운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 데 우리는 해방 후 30년의 세월을 들였습니다. 이것은 그리 어려운 진리도 아니고, 이 지구 위에 지금 현재까지 살아남은 종족이면 다 알 법한 일이지만 인간 사회의 특수성은 이 진리의 터득을 가끔 어렵게 합니다. 특수성이란 다름이 아닙니다. 한 개인의 기억과 인류의 역사가 기록한 집단적 기억은 언제나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이 그 특수성입니다. ……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개화라는 시기를 시점으로 해서 그 전에 보지 못한 세계와 마주친 다음에, 모든 문명과 역사에 따르게 마련인 보편적인 현상과 그에 대처할 태도를 배워온 셈인데, 거기서 잠정적으로 요약할 수 있는 교훈은 조건이 붙지 않는 무조건의 진리를 사람이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아닐까 합니다. _‘상황의 원점’에서---p.334
짐승들 가운데 인간만이 의식의 힘을 써서 ‘먹는 것’과 ‘먹는 것을 얻는 방법’을 자꾸 바꿔왔다. 최인훈은 ‘바꿈’을 문명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문명은 “타고난 재주”인 생물적 DNA의 지시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다. 물론, 생물적 조건이라는 데서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차이는 없다. 인간의 몸놀림, 소리나 말과 같은 기호의 구성, 기계를 조작하는 행동 등도 물리적으로는 생물적 행동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을 변화시키는 의식적 행동이라는 점에서 확연히 구별된다. 그래서 최인훈은, 문명을 “인간의 개체들이 무리 지어 살면서 그들 사이에서 진화시킨” 일종의 “제2의 생체항상성”, 또는 “인간 존재의 제2의 발전 단계”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인간은 의식의 축적과 그것의 계승을 통해서 ‘동물적 삶’(최인훈의 다른 표현으로는 “인간의 생물적 자기 동일성”)이라는 원 밖에 ‘문명적 삶’(“인간의 문명적 자기동일성”)이라는 바깥의 원을 붙여왔다. 그리고 외원外圓의 두께가 자꾸 두꺼워지면서 부피를 지닌 원주圓周는 어떤 주기를 가지고 부득불 그 앞뒤의 원주하고는 서로 갈라져서 나뉘게 되었는데, 이런 문명적 삶의 진화가 바로 인간의 역사다. _해제 ‘최인훈 사유에서 역사의 길을 만나다’에서---p.549
그의 설명모형은, 인간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생물적 탄생 ?문명적 탄생」이라는 “이중발생”이 있어야만 자기 정체성을 쌓고 다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수사적 강조의 표현이 아닌 다음에야, 육신의 생물적 수명이 다한 뒤에도 살아서 움직이는 정신이란 존재할 수 없고, ‘당신만을 영원히 사랑하겠노라’는 철석같은 맹세도, 연심이 아니라 연인이 영원히 살 수 없기 때문에 지켜질 수 없다. 제아무리 빼어난 인간도 먹고 자고 배설해야 한다는 생물적 조건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다. 그래서 최인훈은 자연의 변화, 도태와 돌연변이와 유전 등의 “복합적인 자연의 선별 과정”을 통해서 생명이 발생, 변화, 개선, 완성되는 생물적 인간의 탄생을 “제1기의 진화”라고 부른다. 이것이 없다면 인간의 역사는 애당초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생물로서의 생명 정보인 생물적 DNA는 알지 못하고, 따라서 지시할 수도 없는 능력을 스스로 길러냈다. 그것은 “도구를 사용해서 환경을 극복하는 능력”이다.
_해제 ‘최인훈 사유에서 역사의 길을 만나다’에서---p.5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