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9년 01월 0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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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16쪽 | 499g | 148*215*30mm |
ISBN13 | 9788936022549 |
ISBN10 | 8936022547 |
발행일 | 2019년 01월 0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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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16쪽 | 499g | 148*215*30mm |
ISBN13 | 9788936022549 |
ISBN10 | 8936022547 |
머리말 / 5 1 천지 창조 / 11 2 아담과 하와 / 19 3 유혹과 타락 / 27 4 가인과 아벨 / 42 5 죽고 또 낳고?인류의 족보 / 54 6 노아의 방주 / 59 7 물의 심판 / 65 8 방주 밖으로 / 68 9 무지개 언약 / 73 10 노아의 후손 / 79 11 바벨 탑 이야기 / 82 12 복의 근원 아브람 / 89 13 아브람과 롯 / 100 14 살렘 왕 멜기세덱 / 105 15 뭇 별 같은 후손 / 110 16 하갈과 이스마엘 / 115 17 언약의 증표 / 121 18 의인 열 명만 있어도 / 127 19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 133 20 그랄에서 아브라함은 / 143 21 이삭의 출생 / 147 22 여호와이레 / 157 23 사라의 죽음과 장례 / 165 24 이삭과 리브가 / 170 25 야곱과 에서 / 180 26 우물 전쟁 / 189 27 축복의 향방 / 196 28 하늘까지 닿는 사닥다리 / 208 29 야곱의 혼인 / 216 30 야곱의 아내와 자식 / 229 31 미스바 협정 / 239 32 얍복 강가에서 / 252 33 눈물의 해후 / 264 34 디나에게 생긴 일 / 272 35 벧엘로 올라가라 / 282 36 에돔의 역사 / 289 37 꿈쟁이 요셉 / 293 38 유다와 다말 / 305 39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 / 313 40 요셉의 해몽 / 321 41 노예에서 총리로 / 327 42 막내를 데려와라 / 338 43 요셉과 베냐민 / 347 44 요셉의 은잔 / 356 45 나는 요셉이다 / 365 46 가자, 이집트 땅으로 / 376 47 고달픈 나그넷길 / 382 48 므낫세와 에브라임 / 389 49 야곱의 축복 / 394 50 내 유골을 가나안 땅에 / 406 - 감수자의 말 / 민영진 / 410 |
1.
성경을 읽다 보면 고민이 생긴다. 이 지루한 걸 언제 다 읽지! 물론, 그렇기에 성경을 일독하기 위해서는 매일 꾸준히 읽어야 한다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성경을 맨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필시 성경을 단 한 페이지 넘기지도 못하고 포기하기 쉬울 것이다. 성경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사실, 성경은 이야기라 쉽고 재미있다. 그러나 성경이 어렵게 느껴지는 건, 아주아주 고급진 말투 때문이다. ~리이다. ~지어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상기시켜주기도 하고, 또한 성경은 그냥 한번만 읽고 마는 유머스런 책이 아니란 증명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경은 처음 읽을 때는 어렵지만, 회독을 거듭할수록 재미가 더해진다. 성경의 말씀들이 내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올 때, 비로소 하나님이 내 곁에 가까이 계심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처음이다. 처음의 몇 번이다. 난 성경을 몇 번째 읽는다.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성경을 한번에 오랫동안 읽는 걸 못하겠다. 꾸준히 읽는 건 할 수 있어서, 어찌어찌 완독은 가능한데, 한번에 창세기 한편을 다 읽는다든지 하는 걸 못하겠다. 그래서, 스토리텔링 성경이란 건 어떤지 한번 들여다본다. 어라? 성경의 내용을 전혀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읽는 재미가 있다. 성경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 특히 권하고 싶으며, 성경을 몇 번 읽었더라도 스토리텔링 성경을 통해, 성경을 보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다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 스토리텔링 성경을 이야기한다. 어허! 성경을 보면서 재미를 찾다니! 라고 가끔, 교회 다니는 분 중에 극보수에 속하시는 분들이 외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하나님도 성경을 읽으면서 재미와 행복을 찾길 원하실 거라고. 그래서, 성경이란 걸 만드셨을 거라고.
2.
천지 창조의 셋째 날, 하나님의 장엄한 말씀이 또 울려퍼졌다.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 곳으로 모여라.”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으로 충만하다. 장엄한 기운과 권세가 넘쳐났다. 흩어져 있던 하늘 아래의 물들이 한데 모여 바다를 이루었다. 물이 없어진 자리에는 땅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과 땅이 적절한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됨으로써 지구는 각종 생물이 살아갈 환경이 되었다.
- 1. 천지창조 (천지 창조의 셋째날 : 하나님이 바다,땅, 식물을 지으시다) 중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외적인 모양과 형상이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기로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거룩한 내적 품성을 사람에게 반영시키겠다는 뜻이다.
“사람아, 우리를 닮도록 너를 영적 존재로 창조하노라. 만물이 선한 관리자가 되려면, 너도 우리 같은 지혜를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인간에게는 다른 피조물에게는 없는 고유한 특성이 생겼다. 그것은영혼이다. 인간은 육신의 존재만이 아닌 영혼의 존재로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결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인격적인 소통과 교제가 가능하게 되었다. 다른 동물이나 피조물은 자연 본성에 따라 살아갈 뿐이지만, 만물의 영장 된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영예로운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 그런 뒤 사람에게 복을 베푸셨다.
“자녀를 많이 낳아 크게 번성하여라. 자연 만물을 잘 관리하고 모든 생물을 성심껏 다스리도록 하여라. 온갖 곡물과 과일을 너희 양식으로 삼도록 하여라.”
- 1 .천지창조 (천지 창조의 여섯째 날 : 하나님이 동물과 사람을 지으시다) 중에서
→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과정이 창세기의 첫 부분에 나온다. 여섯째 날에 사람과 동물을 지으시고, 비로소 일곱째 날 거룩하게 하시고 복을 주시는데....
3.
아담 혼자 외로운 것 같으니 / 함께 살 사람을 만들어야겠다 / 잠든 아담의 갈비뼈 하나 취해 / 하와 만드시자 동산은 웃음꽃 만발.
- 2. 아담과 하와 중에서
그건 금단의 열매였다. 선악과. 먹으면 죽는다는 치명적으로 위험한 과일이다. 하나님은 이런 과일을 왜 주신 것일까? 처음부터 선악과를 주시지 않았더라면 따먹는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러면 사람에게 죽음이라는 불행도 뒤따르지 않았을 텐데…….
사람은 잘 몰랐지만, 에덴 동산 가운데에 있는 생명의 열매와 선악의 열매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본디 사람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영원히 산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열매를 주셨다. 생명 열매를 계속 따먹다 보면 사람의 수명은 길어져 가고, 그래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 얼마나 좋은 생명 열매인가.
그렇다면 선악의 열매 곧 선악과는 따먹지도 못하 과일인데 왜 두셨을까. 사람은 로봇으로 지음을 받은 기계가 아니다. 스스로 무엇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지닌 인격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신의 자유의지로 따먹지 않을 때, 그는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 수 있게 된다.
- 2 .아담과 하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사람을 살게 하시다) 중에서
“네 후손과 여자의 후손도 원수가 될 것인즉, 너는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겠지만,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에 치명상을 입히리라“
뱀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런데 여기에 이상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자의 후손… . 느닷없이 하나님의 입에서 웬 여자의 후손이 등장할까.여자의 후손이라고 해서 하와의 아들이나 손자를 가리키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뱀과 사탄을 향한 하나님이 심판 속에는 인류를 향한 구원의 선포가 깃들어 있다. ‘여자의 후손’은 먼 훗날 오실 ‘메시아 그리스도’를 뜻한다. 장차 동정녀인 여자의 몸에서 태어날 메시아가 뱀으로부터 발꿈치를 상하는 십자가 고난을 겪게 될 것이지만, 결국에는 사탄의 머리를 쳐서 최후 승리할 것이라는 복된 메시지다. 인간에게 맨 처음 계시해 주신 구원의 복음이다. 그래서 이것을가장 원시적 형태의 복음, 원시복음이라 한다.
- 3. 유혹과 타락. (하나님이 뱀과 여자와 남자에게 형벌을 내리시다) 중에서
→ 구약성경은 예언으로 이루어져 있다. 메시아 예수님이 오신다는 예언이다. 그래서 성경전체는 예수님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약에서는 우리에게 오실 예수님, 신약에서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그리고 그 예언은 이미 창세기편부터 예표되어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과 죽음을 당한 후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얘기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런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런 예수님을 믿기에, 그리고 그런 예수님이 계시기에 기독교는 존재하고 번성할 것이다.
4.
하나님은 염려하셨다. 인간들이 타락한 죄의 몸으로 영원히 사는 것은 또 다른 저주요 영원한 형벌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기로 하셨다.
-3. 유혹과 타락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다)ㅡ중에서
→ 우리가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쩌면 불행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 것도 같다. 이를 아셨기에 하나님께서는 “죽음”이라는 축복이면서 형벌을 동시에 주셨다. 언젠가 죽어서 갈 천국이 있기에 나는 지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 또한 저주가 아닐까.
5.
바라만 보아도 가슴 설레는 / 일곱 빛깔 무지개 하늘에 걸고 / 다시는 큰물로 땅을 심판 않으리 / 하나님은 노아와 새 무지개 언약 세우시네
- 9. 무지개 언약 중
→ 성경만 읽어서는 잘 이해되지 않던 이야기들이 <스토리텔링 성경>을 통해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헀다. ,
하나님께 온전히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가인과 질투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아벨의 이야기, 가인을 용서한 이유가 더 큰 피해를 피하기 위하여 표시를 해 놓은 것이라는 말, 물의 심판을 대비하여 방주를 짓는 노아의 이야기, 바벨탑 이야기와 그리고 아브람의 등장과 그의 후손. 창세기에서는 거대한 민족의 시작점에 있고, 중요한 건 이 모두가 메시아 예수님이 오시기 위한 대장정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로부터 2019여년 전에 오셨고, 구원사역을 이미 완성하셨다. 이제 남은 건, 남아있는 사람들이 그 예수님을 얼마나 믿고 따르냐다.
→ <스토리텔링 성경>을 보면, 재미도 있지만, 구약이 왜 쓰여졌고, 성경의 모든 장들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엔 예수님의 사역을 예비해 놓으셨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을 도용하는 이단이 많아질 것까지도 예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메시아 예수님을 예비해 놓으셨고, 신약에서는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오늘날의 현실을 예비해 놓으셨다. 그리고 안타까운 사실은 성경을 왜곡하여 해석하는 이단들이 예수님의 예언대로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많은 분들이 이 책을 봤으면 좋겠다. <스토리텔링 성경>을 보면, 이단의 해석이 왜 잘못된 것인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진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단에 빠지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성경해석 방식이 재밌어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잠시잠깐의 재미는 느낄지언정, 진정한 안식은 얻지 못하기에 이단의 성경해석은 경계해야 한다.
→ <스토리텔링 성경>은 성경의 진정한 재미와 동시에 영혼까지도 편안해짐을 느껴 진짜 성경이란 이런 것이구나, 라는 느낌을 들게 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 글을 보시는 모든 분께 권한다. 단 한번, 한번이라도 성경의 재미를 느껴보시고, 진짜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보시라. 그리고 진짜 예수님은 누구인지 알아보시라. 그분을 알게 되는 순간, 지금까지의 내 삶은 거짓이었음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여러분께, 예수님의 축복이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아브람아,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부르지 말고 ‘아브라함’이라 하여라.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삼을 것이기 때문이니라.
하나님이 직접 아브람의 이름을 바꿔 주신 것이다. ‘아브람’은 ‘고귀한 아버지’란 뜻으로 개인적인 성격의 이름이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은 아직껏 후사가 없는 아브람에게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을 지닌 ‘아브라함’이란 공적인 성격의이름을 부여해 주심으로써 자긴의 언약을 확증하신 것이다.
- 17, 언약의 증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래가 사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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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느낌으로 쓰여진 스토리텔링 성경,
오늘은 무엇인지 알 것만 같은 편안함이 나를 쉽게 잠들게 할 것만 같다.
이스라엘 역사의 근원을 다루고 있는 성경, 창세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고는 읽기가 쉽지 않다. 읽어서 내용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진정한 의미와 느낌을 이해하는 데는 용이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것을 이 책은 사실적으로 구체화시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일련의 일들, 야곱이 아내를 위해 삼촌 라반의 집에서 14년의 세월을 일을 해주는 일들,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에 팔려가면서도 형들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일이라고 수용하는 일들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영적인 선민의 의식으로 보는 것 같으면 또한 이해할 수는 있을 듯하다.
천지 창조의 얘기와 세상의 근본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밝혀주는 부분이 창세기에 있다. 창조론적인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이 부분을 근거로 한 일이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우연의 산물인 진화의 개념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누군가의 설계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 누군가는 참사랑을 나누기 위해 세상과 인간을 만들었다는 관점이다. 그리고 내세가 있고, 영적인 세계가 있으며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면서 육체가 사멸하면 다른 세상으로 이동한다는 내용도 함께 한다. 종교적인 의미로도 수용되어 지는 문제다.
이 성경을 “역사서로 보는가? 지적설계서와 그 진행과정으로 보는가?” 는 관점의 차이에 따라 달리 이루어질 것이다. 물론 이 책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삼았으며 그들의 민족이 이루어지게 되는 경위, 그들에 대한 사랑 등을 세밀하게 담은 책이 성경이란 관점이다. 하나님이 인간들을 사랑으로 지켜보면서 그들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참 자녀가 되어갈 것을 구한 책이란 뜻이다.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은 아름다운 자녀와 사랑을 나누길 원했고 그래서 인간경작을 꿈꾸었으며 아담을 창조하여 그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의 뜻에 의해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을 했고,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에 의해 하나님과 인간과의 애증의 관계가 형성되어 갔다.
하지만 그 후 인간들의 삶 속에서 악이 만연하여 보기에 좋지 않았다. 하여 인간들을 물로 심판하면서 의인 노아를 세워 뒤를 잇게 하는 일도 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하나님은 믿음이 견고한 한 인물을 우상의 도시인 갈대아 우르에서 선택하여 거처를 떠나게 만들었고 그에게 많은 약속을 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과 많은 자손들을 줄 것과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 때 늘 지켜주겠다는 약속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에 온전히 순종한다. 하여 믿음의 조상, 의인, 복의 근원으로 불리는 인물이 탄생한다. 사실 중동은 이 인물에 의해 모든 후손들이 형성된다.
그 후 이삭과 야곱, 요셉을 거쳐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어 간다. 야곱의 다른 이름이 이스라엘이다. 즉 야곱의 열두 아들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된다는 말이다.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에서 레아와 라헬 두 부인을 얻고 그녀들의 종까지 부인들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첩으로 거느려 자식 열두 명을 낳는다. 이들이 이스라엘 12 지파의 조상들이다. 그런 과정 속에 형 에서와의 갈등, 삼촌 라반과의 갈등이 그려지고 그들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 간절하게 매달려 극복해 나간다. 즉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면서 자신을 내려놓는 계기를 만들고 가장 겸허해 지는 자신을 만나게 되면서 형 에서와의 관계도 해결된다. 그런 시간이 지난 후, 가나안의 한 모서리에서 살면서 야곱은 어린 요셉을 특별하게 사랑하게 되고 그것은 형들의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그 일이 형들이 요셉을 애굽에 파는 결과를 가져왔고, 요셉은 어린 나이에 애굽으로 팔려가게 된다.
요셉은 신실한 사람이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강한 사람이다. 자신이 비록 종으로 팔렸지만 그는 어디에서든 신실한 행동으로 인정을 받는다. 보디발의 집에서 인정받아 가정총무가 되는 것도 그의 이런 품성 때문이다. 그 후 더 큰 시련이 왔을 때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 인식하고 묵묵히 자신의 할 일만 해나간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준 지혜, 해몽의 능력을 사용한다. 결국 요셉은 왕이 궁금해 하는 꿈을 풀이해 주고 일약 대제국인 애굽의 총리가 된다. 그는 총리가 되어서도 타인과 척이 지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모두에게 인정받는 겸손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형들이 먹을 것이 없어 애굽에 식량을 구하러 왔을 때도 형들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그가 종이 되고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고 깨닫는다. 그리고 형들을 잘 보살펴서 애굽의 한 지역인 라일강의 한 모서리인 고센 땅에서 목축을 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는 토대가 된다.
이스라엘 족장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창세기다. 모세오경 중 가장 앞서는 부분으로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고 인간은 무엇을 목적으로 형성되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약속,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하나님이 만들어 나가는 세계 등을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 부분이 정작 구약 성경의 본체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나머지는 신약을 기다리는 부분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즉 하나님이 인간들과 약속을 만들고, 계명을 주며, 삶을 보장해 주는 부분이 창세기인 셈이다. 저자의 이 책은 말씀을 근거로 하여 구체적으로, 개연성을 무기로 삼아 표현해 내고 있다. 마음에 많이 와 닿는다.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이기에 현장감이 가득 묻어난다. 그것은 우리가 성경의 구절들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한다. 난해한 구절도 있는데, 그것들을 독자 개인적으로 마음에 그려볼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성경을 흥미롭게 풀어낸 책이다.
성경 이해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말 그대로 스토리텔링이다. 이야기로 보여주는 글이란 뜻이다. 물론 성경을 모델로 하여 그려나가지만 이야기이기에 조금의 상상력이 가미되어 있다. 이런 부분들이 독자에 따라 마음에 합당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이 그 누구에게도 성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바캉스는 고사하고 변변한 여행조차 다녀온 적 없었던 나로서는 교회에서 가는 여름 수련회에 함께 가자는 친구들의 제안은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엄청난 유혹이었다. 게다가 개인에게 부과되는 소정의 여행 경비까지 자신들이 대신 내주겠다고 하니 가고는 싶었지만 은근히 돈 걱정을 아니할 수 없었던 내 처지를 생각할 때 '불감청이언정 고소원(不敢請固所願)'일 따름이었다. 나는 친구들의 청에 못 이겨 겨우 따라나섰을 뿐 진정으로 원해서 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한껏 드러낸 표정으로 수련회 버스에 올라탔던 것이다.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면서...
중학교 2학년이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나는 멋쩍은 웃음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수련회를 빙자한 여행이 주목적이었던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가 푹푹 찌는 더위를 뚫고 목적지인 삼척의 어느 교회에 닿았던 건 이제 막 저녁 어스름이 질 무렵이었다. 근처 개울에서 손발을 씻고 저녁을 먹기 위해 몰려갔을 때 우리는 3박 4일의 수련회 기간 동안 모두가 지켜야 할 생활 규칙을 전해들었다. 목사님의 낮고 또렷한 목소리가 운동장에 울려 퍼지는 순간 우리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전해졌고, 아이들 얼굴도 짙어지는 어둠과 함께 몹시 어두워졌다. 매 끼니 식사 배식을 받을 때마다 성경 구절을 외워야 한다는 것과 사용한 식판은 각자가 씻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내일 일정은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 알려주겠다는 것. 가져온 성경책도 없으려니와 성경이라곤 읽어본 적 없었던 나로서는 암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암담했던 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성경책을 챙겨 온 다른 아이들이 목사님 앞에서 외운 성경 구절을 자신있게 암송하고 무사히 밥을 배식 받아 맛있게 먹는 동안 우리는 생경한 성경 구절을 외우느라 늦은 저녁을 먹었다. 비좁은 방에서 어깨를 맞대고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매 끼니마다 성경 구절을 외우는 것도, 꽉 짜여진 일정을 소화하는 것도 왠지 자신이 없었다. 우리는 결국 다음날 아침 동이 트자 마자 도망을 치기로 모의를 한 후 억지로 잠을 청했다.
나를 포함한 친구들 서너 명이 가기로 했었지만 아침 식사 배식의 어수선한 틈을 타 몰래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 사람은 결국 나와 친구 두 명이 다였다. 아침도 먹지 못한 채 서둘러 나온 탓에 배에서는 벌써부터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내가 용돈이라곤 전혀 없이 빈 몸으로 갔었던 걸 뻔히 알고 있는 다른 두 친구는 얼마 안 되는 돈을 꺼내놓고 궁리를 했다. 결국 우리는 돈을 아끼기 위해 삼척에서 황지까지는 걸어서 가고 황지에서 고한까지 기차를 타기로 했다. 마지막 열차 시각을 알지 못했던 우리는 해 지기 전에 도착하면 열차가 있겠거니 하는 막연한 기대를 안고 삼척의 시골길을 뛰다 걷다 하면서 무거워져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름 햇살이 쏟아지는 길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하루 종일 걸어서 황지역에 도착했지만 고한으로 가는 열차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고한에 있는 집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걸어서 만항재를 넘는 게 유일했다. 캄캄한 어둠이 내린 산길을 지치고 낙담한 몸으로, 게다가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허기가 진 몸으로 무작정 걷는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때는 잘 몰랐다. 더구나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그 길을...
쓰러지기 일보직전에 탄광임을 알리는 희미한 불빛을 보게 되었던 건 그나마 천운이 아닐 수 없었다. 시각이 대충 을반과 병반이 교대하는 자정쯤이었는지 허기진 배를 채우고 퇴근을 하려던 을반 교대자들이 우리를 맞았다. 캄캄한 산 중턱에서 게다가 자정이 넘은 시각에 지쳐서 쓰러질 듯한 아이들 셋을 보게 되자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어디서 왔느냐는 아저씨들의 질문에 우리가 다짜고짜 꺼냈던 말은 밥 좀 달라는 거였다. 너무나 배가 고팠다. 아침 7시가 되기 전에 수련회장을 벗어났으니 적어도 우리는 스무 시간 남짓을 걸어온 셈이었다. 한 끼도 먹지 못한 채. 우리 모습이 안돼 보였던지 아저씨들은 하느님이 밥도 안 주더냐며 타박 아닌 타박을 하면서도 감춰두었던 라면을 푸짐히 끓여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몇 숟갈 뜨지도 못한 채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탈진하여 소화도 시킬 수 없는 빈 속에 맵고 기름기 있는 음식이 들어가자 곧바로 구토가 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아저씨들의 트럭을 얻어 타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그때부터 종교를 믿기 시작했던 건 아니지만 본격적으로 성경을 읽게 되었던 건 그것이 계기였다. 내게 있어 성경은 종교적 차원의 경전이 아니라 그저 베스트셀러를 읽는 차원이었지만 나는 지금도 얇은 종이에 세로 쓰기의 낡은 성경책을 볼 때마다 하루 몇 페이지씩 꾸준히 읽었던 그때 생각이 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로 시작되는 성경 창세기 편을 읽으면서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던, 그럼에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던 그 시절의 성경 읽기. 나는 그렇게 뜻도 잘 모르는 성경을 두 번 완독 했고, 영어로 쓴 신약성경을 대학 시절에 읽었었다.
"까마득한 옛적, 하늘도 땅도 세상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조차 흐르지 않던 태초 이전, 그 영원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적막하고 혼돈한 상태…, 깊은 흑암만이 칙칙하고 짙은 어둠을 뿜어내고 있다." (p.11)
<스토리텔링 성경: 창세기>를 읽으면서 나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꼈다. 글씨가 세로 쓰기에서 가로 쓰기로 바뀐 건 오래전 일이지만 종교인이 아닌 일반 독자가 해설서가 없이는 한 페이지도 읽기 힘들었던 국한문혼용체가 읽기 쉬운 우리말로 바뀌었다. 게다가 책에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지도가 중간중간에 게재됨으로써 성경을 읽고 이해하기가 한결 편해졌다. 마치 한 권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단지 학문적인 차원에서, 또는 누구나 읽는 대중적인 책이라는 생각에서 읽어볼 요량이라면 굳이 어려운 성경을 붙잡고 씨름하느니 차라리 쉽게 풀어쓴 <스토리텔링 성경>이 좋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