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자각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감사와 예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알아도 영광을 돌리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다(21절).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지식은 경배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 대상을 속히 우상으로 바꾼다. 우리는 경배하는 대상의 형상을 반영하며 그 대상을 닮아간다. 우상이 가득하면 생각이 허망해진다. 마음도 어두워진다. 어둠 가운데 하나님을 대신할 거짓 유사 대용품으로 대체하고는 헛된 자부심과 자랑으로 가득하다. 기억하라!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로 채워야 할 공간이다. 이를 직시하지 못한 채 저마다 가장 빠른 방법, 가장 멋져 보이는 성공과 즐거움을 찾아가면,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리석은 일로 드러난다(22절).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만을 초래하게 된다.”
56쪽 하나님을 떠날 때 찾아오는 것들 중에서
“자신을 어떻게든 정당화하려는 유대인들의 궤변은 다음과 같다. 이들이 말하는 대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빛을 전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고 해서 진노를 내리신다면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자신들의 불성실이 오히려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불성실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상을 받을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궤변에 불과하다.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기 위해 더 불성실하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이것은 도리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할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결코 그렇지 아니하노라’고 단호하게 거부한다(6절). 이 표현은 헬라어의 화법 중 희구법으로 단호한 반박뿐 아니라 동시에 간절한 바람까지 표현한다. 즉 ‘결코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뜻인 것이다.”
83쪽 특권과 사명은 함께 간다 중에서
“이 도식에 따르면 성도는 이미(already) 의롭다 칭함을 받았지만, 아직(but not yet) 그 구원을 온전히 이룬 것이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이 땅을 온전히 새롭게 하고, 우리를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시킬 때 완성된다(고전 15장 참조). 이 온전한 구원을 받을 때까지 우리는 이 세상 풍조에서 기다리며 견뎌나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성도의 고난과 환난이다. 여기에 성도의 종말론적 긴장이 있다. 현 시대에는 옛 시대의 가치관과 새 시대의 가치관이 충돌하고, 옛 시대의 삶의 방식과 새 시대의 삶의 방식이 불꽃을 튀기며 충돌한다. 이 가운데 고난이 일어난다. 고난은 힘들다. 하지만 동시에 은혜임을 기억해야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 들어왔기에 겪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이 현세의 환난 속에서도 장차 완성될 구원과 영광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세 가지 시제를 이해할 수 있다. 첫째, 과거시제의 구원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1절). 둘째, 미래적인 구원이다. 우리가 장차 더욱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다(9-10절). 셋째,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어 있는 현 세대의 종말적인 긴장 가운데 화평, 고난, 소망, 사랑, 화목, 즐거워함을 특징으로 하는 현재적인 구원이다(2-5,11절).”
133쪽 환난 중에도 기뻐해야 할 이유 중에서
“왠지 로마서 본문과 비슷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사실 본문 18~19절에는 창세기 4장 7절이 메아리치고 있다. 선을 행하길 원하나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여기 ‘엎드려 있다’(히. 라바츠)는 단어는 짐승이 건드리면 곧바로 달려들 태세로 웅크려 상대를 노려보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죄는 기회만 주어지면 가인에게 덤벼들어 가인을 제압하고 지배하려 하는 강력한 의지와 힘을 가진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결국 가인은 하나님의 금지명령을 듣고도 결국 죄를 다스리지 못해 동생을 살인하고 말았다. 마음은 원했지만 자신을 향하여 웅크리고 있는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죄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죄의 내주’라는 개념을 보게 된다. 죄가 내주하기에 죄를 따라 행하게 된 것이다. 8장에서는 이와 대비되는 성령의 내주하심을 소개한다. 즉 육적인 이스라엘은 죄의 내주 가운데 살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의 율법에서 해방된 성도는 성령의 내주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거룩하신 뜻을 행하게 된다(롬 8:4-17, 12:1-2). 이는 율법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행하는 놀라운 경험이다.”
186쪽 진짜 문제는 죄다 중에서
“이러한 유대인의 자부심 앞에 바울은 탄식하며 절망했다. 왜? 이들의 교만함이 눈을 가려 그들을 위해 죽으신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은 이미 구약시대부터 선택받았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그들은 로마서 9장 1~2절에서 탄식하는 유대인 바울의 아픔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 바울에게는 아무리 선택받은 하나님의 선민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다면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확신이 있었다. 이것이 바울이 그토록 탄식하며 차라리 자신이 저주받는 편이 낫다고 말한 이유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거부한 이스라엘은 구원에서 영영 끊어진 것인가? 이번 장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다’(6절)고 조심스럽게 선언하며 희망을 붙잡는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 즉 언약을 의미한다. 언약은 한쪽이 연약하여 성실하게 준수하지 못하더라도, 나머지 한쪽이 끝까지 그 약속을 붙들고 지켜내는 신실함이 전제된다.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이들을 구원하리라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무효가 된다면 이스라엘을 부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 또한 무효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실패한 것은 이스라엘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258쪽 부르심이 중요하다 중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