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또한 이런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장소 가운데 왜 하필 예루살렘인가? 그곳은 지중해 해변의 무역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물도 부족하고 여름에는 태양이 작열하며 겨울에는 바람이 살을 에고, 돌산들은 험해 생활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성전의 도시로 선택한 이유는 어느 정도 결정적이자 사사로운 면도 있고 생태적이자 진화적인 면도 있다. 즉 그 도시가 그만큼 오랫동안 성스러웠기 때문에 신성이 점점 더 강화된 것이다. 성스러움에는 영성과 신앙뿐 아니라 합법성과 전통도 요구된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급진적인 예언자는 이전 수 세기에 대해 설명해야 하고 용인된 거룩함의 언어(앞서 계시를 내렸던 예언자들이 사용한 언어)를 사용해 이미 오랫동안 신성시되어온 장소에서 자신의 계시를 정당화할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p.12, 들어가는 글
3세기 동안 지속된 새로운 ‘암흑기’에 히브리인들은 유일신을 숭배하며 좁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이스라엘 왕국을 세운, 기이하고 작은 민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은 세계의 창조, 자신들의 기원 그리고 그들과 신과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들에 나타나 있다. 그들은 그 구전 기록들을 대물림했으며, 이후 신성한 히브리 문자로 기록했다. 그것이 훗날 펜타튜크Pentateuch, 즉 모세5경(구약 성서 맨 앞의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말함)으로 종합되었으며, 유대인의 경전 《타나크Tanakh》의 첫 번째 부분이 되었다. 성서는 이 세상 최고의 책이 되었지만 하나의 문서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시대에 알려지지 않은 필자들이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지고 기록하고 편집한, 뒤얽힌 텍스트들의 신비로운 도서관이다. ---pp.57~58, 제1부 유대교
당시에는 그가 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건지 아무도 이유를 몰랐다. 그는 끔찍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는 많은 남자들이 그렇듯 어머니 헬레나를 숭배했는데, 헬레나는 초기 그리스도교 개종자였다. 그의 개인적 개종이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바울의 개종만큼이나 극적이었다면 그의 정치적인 그리스도교 수용은 점진적이었다. … 그러나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은 필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순전히 콘스탄티누스의 개인적 변덕에 따른 것이었다. 312년 당시에는 마니교Manichaenism와 미트라교Mithraism가 그리스도교보다 더 인기가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중에 한 가지를 쉽게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유럽은 오늘날 마니교나 미트라교 국가가 돼 있을지도 모른다. ---p.258, 제3부 그리스도교
무함마드는 영감이 뛰어난 몽상가였다. 그는 쉽게 습득 가능한 의식들과 삶과 죽음에 관한 규정들을 통해서 보편적 계시와 평등과 정의의 가치만이 아니라 순수한 삶의 미덕을 대가로 한 유일신에 대한 복종(이슬람)을 설교했다. 그는 개종자들을 환영했다. 성서를 존중했으며 다윗과 솔로몬, 모세와 예수를 예언자들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의 계시는 앞선 계시들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의 운명에 대한 계시도 중요한데 무함마드는 그가 심판, 마지막 날 또는 그 시간이라 부른 계시를 강조했고, 그 계시가 곧 실현될 것이라는 긴박감으로 초기 이슬람에 역동성을 불어넣었다. 《쿠란》은 “오로지 신만이 아시는 심판이 가까웠음을 무엇이 그대로 하여금 알게 하리오?”라고 이야기한다. 모든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문헌은 그것이 오직 예루살렘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p.297, 제4부 이슬람
십자군은 한 사람에게서 나온 생각이었다. 1095년 11월 27일,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에서 유력자들과 일반 백성들을 모아놓고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성묘교회를 해방시키자는 연설을 했다. 우르바누스는 가톨릭교회의 권력과 명성의 회복을 자기 일생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스도교와 교황청을 부활시키기 위한 성전의 새로운 논리를 개발했고 죄의 구속을 대가로 이교도 청산을 합리화시켰다. 이는 무슬림 지하드를 그리스도교식으로 변형한 미증유의 방종이었지만 예루살렘에 대한 대중적 숭배와 잘 들어맞았다. 종교적 광기의 시대, 기적의 증표의 시대에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도시였으며 최고의 성지인 동시에 천상의 왕국으로 여겨졌다. 그러면서도 설교, 순례자들의 이야기, 예수 수난극, 그림, 유물 등을 통해 환기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친숙한 곳이었다. 그러나 우르바누스는 또한 순례자들의 학살과 투르크멘의 악행을 상기시키며 성묘교회의 안전에 대한 염려에 불을 지폈다. ---p.355, 제5부 십자군
11월 9일, 밸푸어는 선언문을 발표했고 로스차일드 경의 이름을 기입했다. 선언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여왕 폐하의 정부는 유대인 자치지역을 팔레스타인에 건설하는 것을 환영한다. 기존의 비유대인 사회들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어떤 것도 행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한다.” 영국은 나중에 아랍인들에게서 냉소적인 배신이라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영국은 샤리프, 시온주의자들, 프랑스에게 동시에 팔레스타인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그것은 ‘위대한 아랍의 반란Great Arab Revolt'이라는 신화의 일부가 되었다. 그것은 분명 냉소적이었으나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에게 한 약속은 모두 짧은 기간에 얻어낸 결과였고 신중치 못한 것이었으며 전시의 긴급한 정치적 편의였다. ---p.686~687, 제9부 시온주의
1993년 이후 협상의 역사, 그리고 점잖은 말과 불신과 폭력의 행동 사이의 정신적 차이는 양쪽 모두 예루살렘을 영구히 공유하기 위해 필요한 타협을 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가장 좋은 시절이라도 예루살렘에서 천상, 민족, 감정의 화합은 미로와 같은 퍼즐이다. 20세기에 예루살렘에 대한 40여 개가 넘는 계획들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고 현재 성전산의 공유에 관련해서만 최소 13개의 서로 다른 모델들이 있다. 2010년, 오바마 대통령은 바라크와 손을 잡고 배후에서 실력을 행사하는 네타냐후를 압박해 예루살렘 정착촌 건설을 일시적으로 중단시켰다. 미국과 이스라엘 관계에서 가장 쓰라린 순간을 대가로 치르고 오바마는 결국 양측을 대화에 나서게 만들었으나 회담의 진행은 얼음처럼 냉랭했고 또한 잠깐에 그쳤다.
---pp.843~844,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