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 있는 삶, 110세 보험
어제의 일들 지옥의 형태 그 밑, 바로 옆 엔터 샌드맨 꾸꾸루 삼촌 해설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
저정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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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과거의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미래에 대해 무슨 약속을 했건 그건 잘 모르고 한 개소리야. 내가 살아보지도 않은 시간을 어떻게 알고 그랬겠어. 모르니까 무서웠던 거지. 그 알지도 못하는 것 때문에 도대체 난 인생을 얼마나 허비한 거냐. (「품위 있는 삶, 110세 보험」 45-46면) 그리고 이해할 수 없이 복잡했던 날들을 생각했다. 차마 다 기억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그것들은 명백히 지나가버렸고, 기세등등한 위력을 잃은 지 오래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다행이라 말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어제의 일들」 93면) 비참함은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내게 남겨준 유품 같은 것이었다. (…) 사는 동안 나를 휩쓸고 간 수많은 감정 중 가장 강렬한 것이 비참함이었고, 빈방은 그 상징처럼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그 빈방을 채우기 위해 늘 다른 사랑을 찾아 헤맸으나 그것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지옥의 형태」 102면) 지수는 자신의 뺨에 와 닿던 지훈의 솜털과 한참 만에 돌아온 지훈의 땀 냄새, 둘이 함께 나누던 사소한 농담, 둘이 먹던 형편없는 식사, 둘이 앉아서 졸곤 했던 낡은 가죽소파, 그가 좋아했던 부드러운 무릎 담요를 떠올렸다. 그것은 그녀가 유일하게 속해 있던 아주 사소하고 구체적인 세계였다. 지수는 그 세계가 정말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동시에 영원히 잃어버렸다. (「엔터 샌드맨」 191면) 젠장, 왜 이렇게 안 풀리는 거야. 정말 열심히 했는데, 큰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저 내 이름값을 하고 싶은 건데, 왜 이렇게 운이 없는 거냐고. 사는 게 너무 무서워. 여기서 나가면 죽을 것 같아. 사실은 여기도 무서워. (「꾸꾸루 삼촌」 221면) 추천사 이것은 부재하는 것들에 대한 책이다. 부재하는 것들은, 언젠가 있다가 사라진 것이기도 하고, 애초에 없었던 것이기도 하다. 책을 펼치자마자 그처럼 결이 다른 공동(空洞)들을 어떻게 감각하고 있는지 묻는 기묘한 질문이 이어진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망설이며 읽다보면 부재하는 것들이 사실 비어 있는 방식으로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걸,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침범해오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편편이 아름다운 그림자극에 가깝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소현은 소설과 현실, 삶과 죽음 사이에 드리워진 반투명한 장막에 어른거리는 존재들을 놀라운 솜씨로 다룬다. 한껏 현혹되어도 좋다. 그렇지만 위로 같은 것은 끝내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작가는 어정쩡한 위로나 되다 만 공감 같은 것은 일절 할 생각이 없다. 다 읽고 나면 남는 것은 예민하게 깨어난 감각수용체 아닐까. 주변을 둘러싼 세계를 한 부분도 얼버무리거나 뭉개지 못하고, 괴로울 정도로 정확하게 느끼게 될 것을 각오하고 읽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늘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하는 작가가, 어쩌면 그렇게 매끄러운 문장으로 까끌까끌한 것들에 대해서만 쓰는지 알 수가 없다. 정세랑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