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딱! 딱!
아직은 해가 뜨지 않은 새벽 세 시. 적막한 대방 안에 울려 퍼지는 죽비 소리. 죽비 삼타에 맞춰 삼배하고, 가사를 벗고, 좌복 위에 앉는다.
스무살, 친구가 죽었고 나는 죽음을 두려워했다. 나의 젊은 날은 죽음에 대한 몸부림으로 점철되었고, 그것이 결국 머리를 밀게 만들었다. 나는 언제나 죽음을 몽상했다. 사는 것이 허무했고, 죽는 것이 두려웠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아는 유일한 피조물이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사유한다. 태어남이 알 수 없는 곳에서 모든 것을 쓸어왔다면, 죽음은 알 수 없는 곳으로 모든 것을 쓸어간다. 죽음과 삶은 양면을 공유한다. 그래서 죽음을 사유하는 인간은 곧 삶을 묻게 된다. 죽어야 한다면 어째서 태어났는가? 왜 모든 것이 존재하는가? 삶의 의미는? 이런저런 공허한 질문들이 탄생하기 시작한다. 그러한 질문들이 이윽고 삶을 부조리의 사막으로 끌고간다. 삶의 고통, 죽음의 두려움, 행복의 과잉, 권태, 허무…. 결국 그런 것들이 중을 만든다.
머리를 밀고 먹물옷을 입은 뒤에는 곧장 선원에 갔다. 선원에 가서 좌복 위에 앉았고, 사람들이 참선이라 부르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이제는 좌복 위에 앉는 것도 익숙해졌고, 좌선을 하는 것도 그럴듯 해졌다. 사람들에게 참선이 무엇인지도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물었다.
“그렇게 참선을 해서 무엇을 얻었나요?”
지난날 언제쯤, 깨달음으로는 라면 하나도 끓이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깨달음도, 참선도, 한편으론 그렇게나 무력한 것일지 모른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참선은 그렇게 라면 하나도 끓이지 못하는 ‘무력한’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참선을 한 지 몇 년이 지났건만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과 후가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다만, 그 모든 것으로부터 물러선 바탕이, 그 바탕이 여기에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음을 발견했을 뿐이다.
사람들은 너무나 오랜 세월 생각에 물들어버린 나머지 자기 자신을 잊어버렸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 너무나 익숙해서 귀기울이지 않았기에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이다. 너무나 익숙해서 너무나 낯선 것들에 대한 기억들을 되살려야 한다.
--- p.29
참선을 하는 것은 삶의 지복감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 지복감이라던지, 행복이라던지, 불행이라던지, 괴로움, 환희, 선과 악, 미와 추, 그 모든 것들이 결국 하나의 이야기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임을 알게 되는 것’은 우리를 이야기와 직면하게 해줄 뿐 이야기로부터 떠나게 해주지는 않는다. 참선은 모든 것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의 날 것, 삶의 날 것, 죽음의 날 것, 행복의 날 것과 불행의 날 것, 괴로움의 날 것과 즐거움의 날 것 그 양쪽을 모두 마주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낭만적인 영성이나 달콤한 힐링 같은 것이 없다. 여기에는 그저 그러함이 있을 뿐이다. ‘그저 그러함’. 그것이 이것의 전부다.
--- p.88
몸이 있고 삶이 있다면 때론 웃고 울고 또 때론 기뻐하고 슬퍼할 수 있는 것이다. 인연이 그러하면 또 때로는 치졸할 수도 있는 것이고 변명할 수도 있는 것이고 비겁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수행을 이야기하며 희노애락을 두려워하고 삶을 두려워한다.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삶에 폭력을 가한다. 삶이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허파는 스스로 호흡하고 위장도 스스로 운동하며 뇌 또한 스스로 생각을 만든다. 모든 것들이 스스로가 알아서 흘러가고 있는데 정작 스스로가 그것을 붙잡은 채 놓지 않을 뿐이다.
--- p.91
불교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많은 선사들이 선을 이야기하고 깨달음을 이야기하며, 이 선의 정신으로 세계의 전쟁과 가난과 범죄를 불식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상에 만연한 갈등이 선으로 융해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선사들은 정신을 개벽하자고도 이야기했고, 깨달아서 이 세계를 극락정토로 만들어야 한다고도 이야기했다. 글쎄, 나는 이런 이야기들에 조금 회의적이다. 일본의 깨달음을 얻은 선사이자 스즈키 다이세츠의 스승이었던 소엔은 톨스토이의 러일전쟁 반전운동 제의를 거절했다. “양립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 조화를 일으키는 수단으로 살생과 전쟁은 필요한 것이오.” 소엔은 그렇게 살인과 전쟁을 정당화했다. 실제 태평양전쟁 당시 꽤나 많은 ‘깨달은’ 선승들이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전쟁을 선전했다. 삼보교단의 창시자였던 야스타니 하쿤 선사 또한 대표적인 군국주의자였고, 별로 보지도 못했을 지구 반대편의 유대인들을 극렬히 증오하기도 했다.
--- p.118
“고기가 용이 됨에 비늘을 바꾸지 않고, 범부가 성인이 됨에 얼굴을 고치지 않는다.” 깨달음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깨달음을 통해 자신을 바꾸려 한다. 자신의 심리상태라던가, 현실적인 문제들, 인격적인 부분, 도덕성, 생리학적 습관들마저도 바꾸려 한다.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깨달음 뒤에도 긴긴 수련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번뇌를 끊는 일도 아니고 욕망을 절멸하는 일도 아니다. 깨달음은 번뇌의 바탕, 욕망의 바탕, 모든 것들이 발 딛고선 그 바탕을 눈치채는 것이다.
--- p.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