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부모가 될지,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할지 별다른 고민을 하지 못한 채 아이가 생겼고, 어느덧 세 아이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이와 함께 살게 되면서, 또 아이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줄 아는 나이가 되면서 미처 몰랐던 제 안의 모순을 보게 됩니다.
아이가 제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단호하게 “안 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제 아이가 자기 의사에 따라 스스로의 행동을 결정짓는, 자유롭고도 독립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자유를 ‘교육과 보육’이란 이름으로 억압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유와 독립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아이가 커 갈수록 아빠라는 존재가 자식을 억압하는 ‘권력자’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곤 합니다. 아이를 독립적인 인격체가 아닌 부모에게 종속된 존재로 인식하다 보니, 저와 아이는 명령과 복종으로 이뤄진 권력관계로 지내 왔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아이가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성찰하며 사회에서 올곧은 목소리를 내는 시민이 되기를 바랍니다. 경쟁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와 인권의 개념을 온몸으로 깨달으며, 사회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민주 공화국의 시민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제가 아이에게 하는 말과 행동은 아이를 시민에게서 더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문제의식에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
--- 「프롤로그」중에서
"얼른 좀 일어나!"
… 물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건 학교에 가야 하는 입장에서는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효율’과 함께 ‘성실’이 불가침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아이들을 옥죄는 구속으로 작용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성실하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왔습니다. 개근상 말고 정근상을 받으면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정근상을 받았다고 칭찬하는 어른들이 없었습니다. 아파서 죽을 것 같다고 했을 때 죽더라도 학교에 가서 죽으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별로 성실하지 못한 저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성실을 강조합니다. 학교를 빠지는 것도, 등교 시간에 늦는 것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그치게 되는 거죠. 그런데 다그치는 것이 과연 효과적인 방법일까요? 민주적인 방법일까요?
아니라는 걸 압니다. 왜냐하면 아이들도 학교 갈 시간을 알고 있거든요. 그 시간에 맞춰 학교에 갈 수 있습니다. 가끔 제가 늦잠을 자서 아이들을 늦게 깨우면, 아이들도 시간을 보고 학교에 늦지 않게 서두릅니다. 그런데도 저는 아이들을 다그치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쉽고 편한 방법입니다. 제 입장에서는요. 아이들과 이 주제로 대화하고 타협하는 것보다 아이들에게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이 편합니다. 말하는 입이야 아프지만, 아이들은 다그치면 듣거든요. …
--- p.21-22
"이게 다 널 위해서야"
아이들을 설득하기 어려울 때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게 다 널 위해서야.”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그렇지 않다는 것, 아이도 알고 저도 압니다. 아이한테 하는 잔소리는 아이를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포장은 그럴싸하죠. 올바른 길을 제시한다는 명목하에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발 꺾어 신지 말라고 아빠가 얘기했지. 신발 꺾어 신으면 걸음걸이가 안 좋아진단 말이야.”, “손톱 좀 그만 물어뜯으면 안 돼? 병균 옮는단 말이야.”, “그렇게 자주 울면 아빠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니? 울지 말고 자기 말을 분명히 해야지.”
말만 봐서는 아이를 위한다는 게 빈말은 아닌 것처럼 여겨지죠. 하지만 그 근저에는 제 취향이 듬뿍 담겨 있습니다. 신발을 꺾어 신으면 불량하게 보여서 싫어합니다. 손톱 물어뜯는 건 보기에 안 좋고, 아이가 말을 하지 못하고 울음부터 터뜨리면 짜증이 납니다. 그러니 모두 아이를 위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절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속이 터질 것 같아 아이에게 말로 된 비수를 꽂으며 그 스트레스를 푸는 것밖에 안 됩니다. ‘널 위해서’라는 그럴싸하면서도 속이 다 보이는 말과 함께 말이죠.
--- p.36-37
"제대로 썼는지 한번 보자"
… 일기는 인간의 가장 내밀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그 일기를 부모와 교사가 검사하면 그곳에 과연 진심을 담을 수 있을까요? 부모에게 생긴 불만, 짜증, 분노를 담아낼 수 있을까요? 학교에서 벌어진 친구와의 다툼, 교사에 대한 불만을 담아낼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의 일기 내용은 천편일률적입니다. 오늘 친구랑 축구하고 놀았는데 재미있었다, 즐거웠다, 신기했다 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 내용뿐이죠.
그러면 부모는 좋았다, 재미있었다는 단어로밖에 감정을 표현할 수 없냐며 아이의 표현력을 나무랍니다. 어쩌란 말인가요? 아이는 벌써 거짓말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른 앞에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더 나아가 ‘누가 내 생각을 들여다보고 뭐라고 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심어 주게 될 수 있습니다.
--- p.67
"학생이 인권은 무슨 인권이야"
… 등굣길 학교 앞 풍경은 사뭇 살벌했습니다. 몇몇은 ‘엎드려뻗쳐’를 하고 있었고, 지휘봉을 가장한 매를 들고 있던 교사는 아이들을 매의 눈으로 살폈습니다. 선도부 완장을 찬 선배들 역시 매의 눈으로 살폈습니다. 선도부 완장을 찬 선배들 역시 매의 눈을 하고 있었죠. 등교 시간에 임박해 교문 안에 들어서는 날이면 제 뒤에 오는 아이들은 지각이라는 이유로 오리걸음 같은 얼차려를 받았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는 6년 동안 반복된 일상이었습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머리 기르면, 지각 하면, 수업 시간에 떠들거나 졸면, 숙제를 안 해 오면, 문제를 풀지 못하면 벌을 받고 매를 맞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벌어지던 일이라서 무감각했습니다. 차이점이라면 학년이 높아질수록 교사들의 때리는 강도가 더 세졌다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어떤 규정에 의해 저렇게 복장과 머리 길이를 단속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관한 교칙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떤 내용인지 전혀 모른 채 학교를 다녔습니다. 너무나 일상적이었기에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이런 단속이 부당하다는 것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10여 년의 세월이 지나고서야 알았습니다. 문제는 여전히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
--- p.89-90
"아직 어린 애들이 뭘 안다고"
… 3·1 운동의 주역 중 한 명인 유관순은 당시 이화 여자 고등 보통학교에 다니던 열일곱 살의 청소년이었습니다. 또 서울 전동 보통학교에 다니던 10대 초반의 학생 네 명은 보통학교는 아이들을 모아 노예로 삼으려는 장소라고 외치며 교실 유리창을 깨뜨리는 시위를 했습니다. 4·19 혁명 이후에 시민 대표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을 때 대표들 중에는 설송웅이란 고등학생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청소년들이 미성숙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드는 근거가 얼마나 미약한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도 부모와 교사 등 어린 시민과 가장 가까운 어른 시민은 아이들이 학교 밖의 부조리함을 외면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고, 온전한 성인으로서의 생활을 꾸려 갈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사회 문제에 관심을 끄고, 공부만 하고 제 앞길만 생각하라는 것이겠지요. …
--- p.161-162
"교육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지"
… 흔히 교육은 정치색을 띠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편협한 정치 인식을 심어 주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교사는 수업 시간에 어떠한 정치적 발언이라도 하면 안 되고, 정치적으로 중립에 서서 아이들에게 지식만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역사나 사회 등 정치를 다룰 수밖에 없는 수업 시간에도 정치적인 발언은 허용되지 않고, 그에 관한 토론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런 발언을 하면, 아이들이 교사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것처럼 말이죠.
교사는 정치의 영역에서만큼은 무색무취여야 하고, 학교라는 교육 현장 역시 마찬가지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야만 할 것 같고, 또 그래 왔던 것 같습니다. 허나 이는 허구에 불과합니다. 정치를 금하고 정치에서의 중립을 지키라고 강조하는 것으로 오히려 학교는 그 정치색을 강렬하게 내비칩니다.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정권의 구미에 맞는 ‘정치 교육’을 펼치게 되는 것입니다. …
--- p.186-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