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2년 10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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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228쪽 | 372g | 135*205*20mm |
ISBN13 | 9788937486081 |
ISBN10 | 8937486083 |
발행일 | 2012년 10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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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228쪽 | 372g | 135*205*20mm |
ISBN13 | 9788937486081 |
ISBN10 | 8937486083 |
1부 광자(狂者) 전초전(前哨戰) 라운드 1 라운드 2 라운드 3 라운드 4 라운드 5 라운드 6 2부 능력자(能力者) 라운드 7 라운드 8 라운드 9 라운드 10 라운드 11 라운드 12 재기전(再起戰) |
제 3자가 봤을 때, 저 사람 만큼은 성공했고, 자신만만한 삶을 살았구나 생각되는 사람이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부러워하고, 그런 사람을 존경하기도 한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삶과 실제 그 자신이 느끼는 삶은 다른 것 같다. 제 3자가 보기에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의 인생도 그 자신이 행복했고, 자랑스럽다 생각한다면 그 자체로 그 인생은 빛나는 것은 아닐까?
이름에서 느끼는 것처럼 나는 남루한 신인 작가 ‘남루한’이다. 권위있는 문예지로부터 신인상을 받았지만 계약 문제로 책은 2년 뒤에나 나올까 말까다. 그럼에도 좋은 글을 써보겠다고 직업도 없이 글만 쓴 나의 통장 잔액은 3320원이다. 이런 내가 지금 하는 일은 기쁠 ‘희’ 자에 클 ‘태’ 자를 쓰는 희태 형 밑에서 야설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순문학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속으로만 외치고 생활이 궁한 나는 야설을 쓰고 있다. 이런 나를 한심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으니 나의 연인 연지다. 그녀는 지금 회계사로 일하고 있고, 그녀의 아버지는 문학계 거목인 이건수 교수다. 자신의 딸과 혹 결혼할 생각이 있다면 결혼자금 2000만원을 마련해 오라고 말한다. 여기서 남루한의 아버지 남강호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남강호는 전국이 알아주는 주먹으로 아버지의 주변에는 온갖 시정잡배와 건달 그리고 운동선수들이 넘쳐 났으며, 공평수라는 삼촌도 그 중 한 명이다. 그는 매미로부터 초능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미치광이다. 하지만 그가 과거 WBA 복싱 전 세계 챔피언이자, 최단신 세계 챔피언으로 기네스북에도 오른 바 있는 인물이라는 거다. 그는 자신에게 자서전을 요구하고 그와 함께 한배를 타기로 결정하게 되는데...
어떻게 보면 이 책에서 루저 아닌 사람은 없다. 기껏해야 남루한의 여자 친구 연지와 그의 아버지 정도? 모두가 한심하기 그지없는 인생을 살고,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뿐이다. 저렇게도 먹고 사는 구나 싶을 정도로 혀를 끌끌 차야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 자신이 자신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인생의 철학이 있고 고민이 있다. 스무 살엔 챔피언만 되면 모든 것이 알아서 내 발 앞에 다가올 줄 알았어. 그런데 막상 챔피언이 되고 나니까 다가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가진 거라곤 사진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할 때나 쓸모 있는 챔피언 벨트가 고작이야 (187) 대학을 목표로 공부하던 아이들이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 허탈하거나 허무하다는 생각을 한다고 한다. 대학에 입학하고 딱 3일 행복하고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는 어떤 친구의 인터뷰가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났다. 꿈 그 너머의 꿈을 꾸라고 말한다. 인생이란 큰 테두리 안에서 챔피언이라는 것, 대학이라는 것, 직장이라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지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사회는 그 자리에 오르면 모든 게 이뤄지는 것처럼 이야기 한다. 그렇기에 챔피언이 되었을 때 더 허탈해지는 것 아닐까?
우리는 평가에 목을 매고 평가에 울고 웃는 이상, 줄기차게 평가만 쫓아가게 돼. 그건 너무나 아슬아슬한 인생이라고. 나를 봐. 챔피언이지만, 한 번 진 걸로 영원한 패배자야. (중략)사람들은 나를 실패자로 기억해 (188) 사람의 인생이란 언제나 최고의 곡선을 그리지 않는다. 하향곡선이 있으면 상향곡선이 있고 그러면서 평지곡선도 있다. 평지곡선을 갔다고 해서, 하향곡선으로 갔다고 해서 그 인생이 실패는 아님에도 우리는 스스로의 시선에, 그리고 타인의 시선으로 인해 스스로 실패자를 만든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 펀치를 날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미치광이 공평수는...
공평수가 그랬듯 승부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세상이 이겼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인정할 수 없는 승리는 진 시합이다. 세상이 패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목표한 수준에 도달한 경기는 이긴 경기고, 이긴 삶이다. (220) 우리나라의 종합 순위가 예전 같지 않을 전망이다. 하지만 그건 나라의 문제고 선수 스스로가 최선을 다했고, 자신의 목표에 도달했다면 그만인 것 아닐까? 우리는 지나치게 사람들을 압박하고, 심리적 부담을 준다. 최고만이 살아남는 것처럼 이야기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제3자가 봤을 때 공평수는 미치광이 같고, 하찮아 보였을 수도 있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에 최선을 다했고, 그게 패배로 끝났을지언정 스스로에게는 승리가 되었다.
새로운 작가의 글을 만났고, 그가 전해주는 메시지에 고개를 끄덕였다. 1등만이, 최고만이 기억되는 세상일 수 있지만 1등이 아니어도 그 자체를 즐기고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그 자체로 진정한 승리자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초능력자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가 없어!
결국, 능력의 세계는 끝이 없는 거야. 끝없는 자기 학대, 그래서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인지 노예인지 알 수조차 없는 상태, 그걸 노력이라 포장하고, 극기라 부르지. 교묘한 말 바꾸기야. 그건 자신을 이기는 게 아니라, 자기 탐욕의 노예가 되는 거라고. 물론, 나도 그랬어. 하지만, 그래서 얻은 건 세월의 바람에 다 흩날리고 말았어. 이젠 안 그럴 거야. 할 수 있는 만큼만 할 거라고.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할 거야. 하지만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건 초능력이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초능력이란 말이야. 초능력! (p.189)
이것은 이제는 한물 간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문학과 권투. 둘 다 이젠 낡디낡은 옛 것이 되어 버렸다.
한때는 올림픽의 효자 종목이기도 했고, 온 국민을 텔레비전 앞으로 모으기도 했던 인기 종목이었던 권투는 이젠 사양 스포츠가 되어버렸다. ‘헝그리 정신’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더 이상 두 사람이 살을 부딪히며 몸과 몸이 맞붙어 치고받는 권투 같은 건 하지 않는다.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하는 여자들의 전유물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학은 어떤가. 문학의 미래를 심심찮게 논의하고 있는 현실이다. ‘스토리’는 살아남을지언정 문학의 미래는 어둡다. 요즘 세상에 누가 소설이나 시를 읽는단 말인가
둘 다 한때는 화려하고 영화로운 시절이 있었으나, 이젠 공룡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사라지고 있는) 존재일 따름이다.
그런데 우직하게 이것을 붙잡은 두 남자가 있다.
전직 챔피언이었으나 은퇴 후 시도한 모든 걸 ‘말아 먹은’ 몸도 마음도, 자타의 평가 모두 왜소한 한 남자와 2000만원이 없어 결혼도 못 하는, ‘못나가는’ 현직 소설가.
『능력자』는 이 두 남자의 ‘남루하디 남루한’ 이야기이다.
그의 훈련이 단지 복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삶은 무의식적으로 이산화탄소만 내뱉으면 살아지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 주는 하나의 주장처럼 인식되었다. 그가 뻗는 것은 주먹이지만, 그가 하는 것은 복싱이지만, 그의 행위에는 그 어떤 주장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p.169)
따라서 이것은 인간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수컷내 짙은 남자들의 이야기.
영화로 치자면『친구』나『라디오스타』를 닮은 소설이다. 『친구』와 닮은 건 그 기저에 옛것에 대한 향수와 ‘마초적’ 정서가 있기 때문이고(이때 옛것에 대한 향수와 ‘마초적’이라는 것은 동어 반복이다.), 『라디오스타』를 닮았다는 건 일종의 버디무비의 형식을 띠고 있고 ‘화려한 왕년’을 가진 한 남자를 비롯한 두 명의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악평은 개인 블로그에 비공개에 올리라는 작가의 부탁을 존중하여 길게는 쓰지 않겠지만, 자자하던 입소문에 비하면 그저 그런 평작이었다. (심지어 그 짧은 시간에 열혈팬까지 양산한 것을 보고 기대 수준이 높았던 건 인정한다.)
이런 저런 코드와 유머를 ‘며느리도 모르는’ 양념의 비율처럼 잘 배합한 솜씨는 높게 산다. 그러나 이야기의 얼개나 주된 스토리 라인 등은 기시감을 들게 했다. 스포츠에 인생을 빗댄 소설이나 영화들도 이미 많이 보아왔고,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마초적이거나 버디무비 스타일의 작품들도 그동안 꽤 많이 양산되었다.
진지하지만 유머러스한, 가볍지만 묵직한 작가의 사유가 묻어나는 건 인정하지만, 그 역시 6-70년대생 남자 작가들의 작품에서 종종 보아오던 것이라 눈에 확 띌 정도로 참신하지는 않다.
영화적 문법을 그대로 차용한 듯한 스타일도 그런 점에서 큰 특징이 되지 못한다. 임성순이나 천명관 등 이미 문학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 활동을 하다가 문단에 들어온 작가들이 그 경력을 기반으로 비슷한 문법과 소재를 가지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과 어떻게 차별성을 가지고 자기만의 입지를 확보할 수 있느냐가 앞으로 최민석 작가가 풀어야 할 숙제가 될 듯하다.
결국『능력자』는 이야기의 한 축을 담당했던 공평수가 뇌사로 죽는 것으로 끝난다. 희망 없는 현실을 직시한 셈이다.
구조는 매우 견고하고 단단해서 개인의 노력은 대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로 끝난다. 설령 얻는 것이 있다면 개인적 만족 정도다. 그래서 대부분은 그 자체도 시도하지 않고 무기력하고 순응적으로 수동적으로 살게 된다. 자기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한 채. 자기 삶에서 철저히 소외된 채.
그러나 열패감에 시달리던 무능력자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그 무모함을 통해 능력자로 거듭난다. 그것이 순전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경험이라 할지라도. 단 한 번의 그 경험이, 누구의 것도 아닌 자기만의 생을 만든다.
작가가 포착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 부분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그려냈느냐, 그리하여 독자들의 감동을 얼마나 자아낼 수 있느냐가 작품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이 될 듯하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사진처럼, 그 순간의 진실을 잘 담아냈다면 긴 여운과 함께 진한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한 인간이 타인에게 끼칠 수 있는 그만큼의 영향력으로 말이다.
그는 자신의 삶으로 자신의 자서전을 썼다. 이미 그는 아름다운 인생을 완성했으므로. 그의 삶은 이미 하나의 완벽한 경기가 되었으므로. (p.219)
결과가 뻔한 영화를 보는 것은 고역이다. 중간도 읽지 않았는데 범인이 예상되는 추리소설을 읽는 것도 고역이다. 고속도로 정체로 평소의 2∼3배 이상 시간이 지체될 것을 알고도 IC를 들어가는 것도 고역이다.
어린 시절 어른이 빨리 되고 싶었다. 어른의 기준이 내게는 21살 이었다.(왜 그런 기준을 갖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방법이 없다) 그래서 계단을 오르거나 걸을 때 꼭 21걸음을 세고 다시 1을 세면서 언젠가 21살의 멋진 어른이 되어 있을 나에게 최면을 걸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운전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내 꿈은 트럭 운전기사였다. 하얀 장갑을 끼고 집채만 한 자동차를 제 맘대로 움직이고 운전하는 트럭 운전기사 아저씨가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꿈을 바뀌었지만 여전히 21살에 대한 동경은 있었다. 부모님이 내가 21살이 되면 특별히 뭘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 짠~! 하고 나타나 내 소원을 들어주겠다 약속을 한 것도 당연히 아니었다. 그냥 멋진 어른의 모습을 혼자 상상하고 동경하면서 자기만족을 했던 것 같다.
나의 삶에 대한 가치는 모호함에 있다. 앞날이 정확하게 예측이 되고 결말이 뻔히 보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내게는 무의미하다. 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미래를 살아가는 것이 내게는 유의미한 일이다.
만약 내게 어느 날 신이 나타나 “너의 미래를 보여주겠다. 너는 이렇게 살 것이고 이런 일을 겪을 것이고 저렇게 살면서 생을 마감할 것이다.” 라고 한다면 나는 신이 사라지자마자 그 신을 저주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타나 모두 뻥이라고 말해달라고 있는 대로 생떼를 부릴 것이다.
내게 있어 삶은 모호하고 불분명하기 때문에 살아나갈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평수는 어쩌면 자신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오로지 부끄럽지 않게 지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p.210)
공평수는 자신이 당연히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알고도 링에 올랐다. 링에 오르기 전 그가 부린 허영과 위세와 허풍은 그의 머리를 파먹어가는 두 개의 커다란 종양을 잠시라도 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나의 삶이 언제쯤 끝나갈 것이라는 시한부를 선고받은 인생을 사는 사람의 마음이 모두 다 공평수의 그것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있는 대로 욕을 퍼붓고 마지막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다. 너무나도 평안하고 평온하게 삶의 마지막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마지막 순간까지 악을 쓰며 죽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나의 삶의 끝을 알고 있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공평수는 그가 행해 온 젊은 날의 허망함과 후회스러움을 그의 마지막 링 위에서 온전히 쏟아내고자 했다. 그래서 마지막 눈을 감는 그 순간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고 죄스럽지 않으며 후회스럽지 않기를 소원했다.
“대리운전 하는 챔피언도 있어.” (p.92)
“링 아래서 주먹을 휘두르면 선수 생명 끝장이야.”
“무슨 소리예요. 매미 타령이나 하는 주정뱅이 주제에!” (p.119)
예측이 불가능한 삶을 사는 것이 힘들 때도 있다. 왜 나만 힘들고 고통 받는지 원망스러울 때도 있다. 누구나 찬란했던 과거를 쏟아낸다.(그러고 보면 초등학교 때 반장을 안 해본 사람이 없다. 다들 반장을 해봤다고 하니)
아직 인생의 절반도 달려가지 못한 나와 동년배들에게도 과거 이야기는 대화의 단골 주제다.
자신의 말마따나 험악한 세월을 온몸으로 부딪쳐 온 공평수의 찬란했던 과거를 듣기 위해서는 삼일 밤낮이 필요했을 것이다. 시원한 맥주 수십 캔과 함께. 매미와 교감하는 초능력을 가졌다고 떠들고 다니는 왕년의 챔피언은 대리운전을 하는 왕년의 다른 챔피언을 보고 참혹했을 것이다. 링 아래서는 절대로 주먹만을 휘두르지 않는다는 철칙을 유지하면서 그의 유일한 자존심인 챔피언 자리를 지켜왔다. 언젠가 왕년의 돌주먹 박종팔씨가 나오는 교양 프로그램을 본 기억이 났다. 동양챔피언까지 지낸 박종팔 씨가 한때는 ‘돈팔이’라고 불릴 만큼 잘 나갔던 시절이 있었는데 여차여차해서 가진 돈 모두 잃고 권투계에서도 알력다툼으로 밀려나 완전한 야인생활을 했었다고 했다. 죽으려고도 하고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엉망으로 살기도 했다며 챔피언의 삶을 돌아보며 회한 짓는 그 장면이 떠올랐다. 저 하늘 꼭대기에서 저 땅 속 깊은 끝까지 추락하는 것과 같으리라 짐작해 본다.
공평수 또한 그 고통을 자기 혼자만의 힘과 의지만으로는 버틸 수 없어 매미와 교감하는 초능력이라는 정체불명의 능력을 만들어 내 고통에서 눈을 돌려 버렸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으니까.
이제까지 살면서 ‘이게 정말 위기다.’라고 생각했던 적이 두 번 있었다. 앞으로의 인생 속에서 두 번이 더 있을지 여러 번 더 있을지 알 수 없다. 모르겠다. 공평수처럼 고통과 위기에 직면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다른 곳에서 잊을 수 있는 능력을 찾아야 하는지 지난 두 번의 위기를 넘겼을 때처럼 시간의 흐름에 맡겨 둘지 그것도 알 수 없다. 최소한 링 아래에서는 절대로 주먹을 휘두르지 않는다는 원칙·철칙 하나는 가져야 한다. 그리고 비록 그가 당장의 위기와 고통에는 고개를 돌렸지만 무시로 커 가는 머릿속 종양 덩어리를 안고도 죽을힘을 다해 마지막 방어전을 치룬 것처럼 내게도 준비될 인생의 방어전을 준비해야 한다.
아직은 뭘 준비해야 할지, 공평수처럼 외딴 섬에 들어가 특별 훈련을 해야 할지 어떨지 모르겠다.
세상에는 공평수와 같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취재에는 취재비용이 들어가고, 그러기 위해서는 배우자의 안정적인 내조와 이해, 그리고 지원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연지와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공평수의 자서전부터 써야 한다.” (p.105)
공평수의 조카로 추정되는 소설 속 ‘나’는 신인 작가다. 언제나 ‘을’의 스탠스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가난하고 힘없고 어딘가 반드시 빌어 붙어살아야 할 존재다. 고작 10여일의 찬란함을 위해 7년에서 10년을 유충으로 생활하는 매미와 다를 바 없다. 언젠가 한번만 제대로 뜨면, 대박 터지면 지금의 추레함은 한방에 날려 버릴 수 있다. 그것을 꿈꾼다. 생각해 보면 다른 길도 없다. 한 해에 문학상을 통해 등단하는 작가의 수에 다가 몇 년 전부터 등단했지만 데뷔작을 발표하지 못한 채 어제나 저제나 출판사의 연락만을 기다리는 누적된 작가의 수를 더하면 기실 로또 당첨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요즘은 작가가 쓴 책이 아니라 스님이나 연예인, 유명인이 쓴 책이 불티나게 팔리는 현실이니 몇몇 이름만으로 책이 팔리는 대형작가가 아닌 다음에야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유충 생활을 벗어날 수 없다. 찬란한 10일을 말 그대로 꿈만 꾸는 것이다. 꿈만 꾸다가 지난한 삶을 마무리 하는 것. 꼴까닥.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와 있는가? 그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나는 연지와 결혼을 하기 위해 장인이 될 뻔 한 이건수 교수의 말대로 결혼 자금 2000만 원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2000만 원을 위해 말도 안 되는 인간 망종 공평수의 자서전을 쓰기로 했고, 그 인간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복귀를 한다고 해서 전지훈련을 하는 섬까지 따라왔다.” (p.155)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자기방어를 한다. ‘나는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연지와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매미 초능력에 빠져 있는 생 양아치 같은 삼촌이라는 작자의 자서전을 써준다. 쓰는 것이 아니라 써 주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이름 모를 섬까지 따라왔다.’
‘나’는 등단했지만 등단하지 않았다. 인정받았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신세가 처량하다. 아버지는 퇴물깡패고 되지도 않는 말을 지껄이는 삼촌이라는 작자는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자서전을 써달라고 한다. 비록 데뷔작을 내보이지 못했지만 작가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누구나 알 만한 유명인사의 부탁도 아니고 자신이 보기에도 한심스럽고 어이없는 삼촌이란 작자의 자서전을 써야 한다.
코너에 몰린 복서는 쏟아지는 상대의 주먹을 다 피하지 못하고 클린치한다. 할 수 있을 때까지 클린치 한다. 상대복서는 어떻게든 클린치를 풀어 버리고 결정적 카운터펀치를 날리려 한다. 10년이 지나도 유충 신세를 벗어날 수 없는 매미유충이라면 차라리 그 나무에게 뛰어 내리는 편이 낫다. 가만히 앉아서 문단 탓, 출판사 탓, 저 놈 탓, 이 놈 탓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 보다야 매미 초능력에 빠져 있는 생 양아치 같은 삼촌이지만 그치의 자서전을 써 주고 그 돈으로 연지와의 해피엔딩을 꿈꿀 수 있다면 ‘나’는 죽을힘을 다해 클린치를 해야 한다.
“어차피 언젠가는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야. 어떻게 지느냐? 그래, 중요해. 사람들은 어쩌면 그걸 내 마지막 모습으로 기억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모습이 근사하지 않더라도, 초라하더라도, 보잘것없더라도, 상관없어. 헐렁한 트렁크스, 조명, 땀 냄새, 훈련, 실패로 터득한 내 스텝, 그걸 기다리는 링, 그것만으로 충분해. 이 위에 있을 때, 나는 필요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지거든.” (p.217)
책 제목인 「능력자」는 거짓말이다. 이 책 「능력자」에서는 능력자가 단 한 사람도 나오지 않는다. 공평수는 결국 졌다. ‘나’는 연지와 해피엔딩을 만들지 못했다. 공평수의 자서전은 나왔을 리 만무하다. 그렇게 그냥 방어전을 끝이 난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 방어전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그저 과거의 찬란함에 취해 ‘내가 옛날에~!, 내가 왕년에~!.’만 주절대던 공평수가 자신의 존재를 명확히 인식했다. 내게 최적화된 트렁크와 훈련, 스텝, 그리고 그것을 받아 줄 자신만의 링만 있으면 그의 삶 전체를 통틀어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의 머릿속에서 자라나는 종양 덩어리가 갑자기 생긴 공평수의 자신감처럼 갑자기 공평수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갈지도 모르는 시한부 인생이지만 그래도 얼마만인지도 모를 정도로 너무나 오랜만에 자신이 비로소 필요한 사람인 것을 깨달은 그의 방어전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그만의 방어전을 치러낸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하다.
“어느 누구도 다운되지 않았고, 경기장 안의 모든 불빛과 눈빛이 이 둘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였다.” (p.208)
어쩌면 능력자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인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능력자가 되고 싶어 하지만 매미가 7년에서 10년 동안 유충 생활을 견뎌내는 힘은, 죽을 만큼 운동하고 훈련해 살과 살이 맞닿는 치열한 링위에서의 혈투를 견뎌내는 힘은 대단한 것이 아닐 것이다. 내가 여전히 이 세상에서, 내 삶에서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모진 풍파를 헤쳐 나갈 힘이다. 능력이다.
그래서 당신도 나도 능력자다.
우리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일지도 모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