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아는 한, 인간의 기억은 보통 다섯 살이나 여섯 살이 돼서야 시작된다. 언젠가 그는 출판사에서 인간의 기억을 다룬 책을 편집한 적이 있다. 거기엔 어릴 적 기억이 사실은 사진이나 남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생성되는 경우가 많다고 적혀 있었다. 심지어 성인에게 조작된 과거 사진을 보여주면 기억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 p.14
“그것도 한때야.” 테레자가 가장 좋아하는 말 중 하나다. 헤닝은 이렇게 되받는다. “그것도 뻔한 말이야.” 둘 다 맞는 말이라는 게 슬프다.
p. 26 오늘은 페메스에 오르기 좋은 날이다. 간밤이 엉망진창으로 지나갔어도 푹 쉰 기분이다. 1월 1일. 도전하기에 안성맞춤인 날. 헤닝은 곧 새해에 대고 마음속 말을 다 풀어낼 것이다. 작년 한 해는 그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 물론 만사가 꽤 순조롭기는 했다. 누가 중병에 걸리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하지만 헤닝은 늘 파국이 임박했다는 느낌 속에서 살았다. ‘그것’은 어느새 밤은 물론이고 환한 대낮에도 엄습한다. 공격을 받는 중간에도 그는 다음 공격에 대한 두려움과 씨름한다. 그것 말고도 일과 아이들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의 삶은 도피와 같다. 아무것도 끝까지 완성할 수 없고, 그 무엇도 제대로 할 시간이 없다.
--- p.17
‘한다’라는 단어는 테레자에게 중요한 말이다. ‘뭔가를 한다’는 건 그녀가 생각하기에 성공한 인생에 속한다. “우리도 뭔가를 좀 해야지.” 이 말은 뭐든지 다 의미할 수 있다. 봄맞이 대청소, 휴가 계획 짜기, 친구들을 저녁에 초대하기, 식구끼리 어디를 방문하기, 재정 계획 세우기처럼 함께 뭔가를 도모하는 일이다. 그러나 ‘한다’라는 단어는 헤닝의 귀엔 대부분 위협으로 들린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굴러간다’라는 단어다. 결국 인생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뭔가가 잘 굴러가는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모든 게 잘 굴러간다면 굳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 pp.28-29
1월 1일, 1월 1일.
‘그것’이 나타날 때 생각을 통제하려는 건 거의 최악의 방법이다. 마음 훈련이 뭔가 쓸모가 있는지조차도 헤닝은 잘 모른다. 엉뚱한 생각을 피해보려 할 때마다 그는 늘 쫓기는 노루처럼 자신의 머릿속을 질주한다. 근본적으로는 모든 게 ‘그것’을 소환할 수 있다. 어머니 욕실도 그중 하나다. 욕실은 헤닝과 루나 때문에 어머니가 느끼는 절망적인 무력감을 상징하는 곳이다. 그들은 그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어머니의 고통에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헤닝과 루나가 그 누구보다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눈을 뜬다.
--- pp.38-39
p.43-44 그날 이후 ‘그것’은 아무 때나 제멋대로 찾아왔다. 고통은 횡격막이 화끈거리는 증상과 함께 시작된다. 무대 공포증과 비행공포증이 뒤섞인 느낌이다. 심장이 사정없이 날뛰다가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한다. 몸과 마음이 통제 불능에 빠진다. 가끔 ‘그것’이 한밤중에 그를 깨울 때가 있다. 헤닝은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숨이 쉬어지질 않아 당장 화장실로 달려가 소리를 지르든가 머리를 벽에 대고 찧고 싶지만, 식구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이내 그만둔다. 그 대신 현관과 거실과 부엌을 돌아다닌다. 심장이 진정될 때까지. ‘그것’이 움켜쥔 손을 풀고 반 시간가량 마음의 안정을 선물할 때까지. 그러면 또다시 살아남았다는 비루한 행복감이 몰려온다.
--- pp.43-44
자식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어머니는 혼자 분노를 터뜨렸다. 음식을 식탁에 올려놓고 부엌에서 이걸 만드느라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를 이야기했다. 빨래를 하면서는 저녁 시간을 세탁과 다림질로 보내야 한다고 푸념했다. 헤닝과 루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살았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엉망으로 어질러놓은 집을 청소하고, 학교에서 일으킨 문제를 해결하고, 아이들이 아프면 병원에 데리고 갔다. 자식들을 돌보느라 친구도 만나지 못했고, 남자도, 파티도, 여행도, 문화생활도, 독서와 영화관과 극장도, 흥미진진한 대화도, 더 나은 직장도 포기했다. 어머니는 자식들 때문에 자신과 어울리지도 않고 마음에도 들지 않는 인생을 강제로 살고 있다고 날마다 불평했다. 그러니 너희는 최소한 더 일을 만들어 나를 힘들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했다. 헤닝은 맏이로서 집안일을 도와 어머니의 짐을 덜어주고, 루나는 말 잘 듣고 얌전하게 지내라고 했다. 이제 자신은 힘에 부쳐서 모든 걸 혼자 할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은 사람이지 기계가 아니라고 했다. 그렇게 신세타령을 한 뒤 마지막에는 헤닝과 루나를 품에 안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너희는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야. 그거 알지? 너희는 대박이야!”
--- pp.65-66
헤닝은 집에서 나와 마흔두 개의 계단을 걸어 홈 오피스로 올라간다. 이제 그는 안다. 자신은 트라우마에 시달린 거다. 혹독하게 시달린 거다. 정신과 의사라면 누구나 확인해줄 거다. 그는30년간 지하 물탱크 위에서 살았다. 동굴 위에서 살았다. 사람이 빠질 수 있는 그 구멍을 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첫 번째 층계참에서 그는 생각한다. 이젠 모든 게 달라질 거라고. 매듭이 확 풀렸다. 어둠 속으로 빛이 들어왔다. 괴물이 짐을 싸서 나갔다. ‘그것’은 헤닝에게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거다. 헤닝은 더할 수 없이 행복하다. 이젠 자유로워질 거다. 아이들을 사랑할 거고 자신의 일을 할 거다. 좋은 날도 있고 궂은 날도 있을 거다. 이젠 감기와 돈 걱정과 아내와의 다툼 같은 아주 평범한 일로만 괴로워할 거다. 때론 하룻밤 잠 못 이룰 때도 있겠지만, 큰 문제는 아닐 거다. ‘그것’은 곧 추억이 될 거다
--- p.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