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친 윤씨는 남편을 잃었기 때문에 강화도에서 나왔으나 오갈 데가 없어 형 만기萬基와 동생 만중 두 형제를 친정으로 데리고 갔다. 그렇지만 친정 역시 형편이 어려워 베틀을 돌리고, 수놓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혹시나 자식들의 공부에 방해가 될까 두려워 두 아들에게는 곤궁한 내색을 전혀 내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아들들에게 지식과 학문을 가르치기 어려운 형편을 감안하여 『소학小學』, 사략史略, 당시唐詩 등은 윤씨 자신이 직접 가르쳤고, 병자호란 이후로는 서적을 구하기가 어려워 『맹자孟子』, 『중용中庸』 등은 주식인 곡식을 많이 주고 사서 읽혔다. --- 「학자이자 대문호의 스승이었던 어머니-김만중의 어머니 해평 윤씨」 중에서
예를 숭상하는 부인으로서 남편의 부적절한 일련의 행동을 감내하기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일들이 자식들의 양육에 크나큰 영향을 미칠 것을 가장 염려하였을 것이다. 자신의 남편이자 세 아들의 아버지인 성염조의 행동을 보면서 순흥 안씨는 자식들 교육에 있어 더욱 엄격하게 대하였다. 그리하여 성임, 성간, 성현 삼형제는 모두가 글공부에 매진하며 곧게 성장해 주었다고 한다. --- 「자식들의 교육이 인생의 전부였다-성간의 어머니 순흥 안씨」 중에서
자신의 두 아들이 적자가 되려면 그들을 낳은 어머니 또한 정실부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 아닌가. 바꿔 이야기하면 그녀는 이 집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아니, 세상에서 영원히 지워져야 할 존재였다. 짧지만 영겁처럼 긴 시간이 지났다. 그녀는 문중 어른들의 시선을 외면한 채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결론은 한 가지뿐이었다. --- 「어머니의 죽음과 맞바꾼 빛나는 인생-양사언의 어머니 문화 유씨」 중에서
이씨가 교동 마을에 도착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군사들을 내려 보내는 대신 경상 감사에게 어명을 내려 이씨를 감시하게 하였다. 아들을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노비로 삼으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이씨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세상 어느 어머니가 자신이 낳은 갓난아기가 죽거나 노비가 되어야 한다는데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이씨는 차라리 뱃속의 아기와 함께 깊은 물에 풍덩 빠져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씨의 이러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날이면 날마다 경상 감사가 보낸 사람이 찾아와 아기를 낳지 않았나 감시하였고, 이씨는 하루하루를 두려움에 떨며 지내고 있었다. --- 「운명을 뒤바꾼 헌신-박일산의 어머니 성주 이씨」 중에서
신씨는 교육을 하며 자식들에게 항상 말하기를 “과부의 자식은 남이 더불어 사귀지 않는다는 옛글이 있으니, 너희는 반드시 학문에 열 갑절을 더 부지런히 하여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아야 하느니라.” 라고 당부하였다.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듯이 항상 준엄한 훈계로 자식들을 담금질하였고, 어려운 형편임에도 교육의 시기를 놓치지 않고 가르쳤기 때문에 윤경과 준경은 후일 김굉필, 조광조, 이연경과 같은 세 석학의 문하에 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