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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도 당신처럼 외로움을 느낄 때

신들도 당신처럼 외로움을 느낄 때

파란시선-0048이동
최승철 | 파란 | 2020년 01월 1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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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1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132쪽 | 202g | 128*208*10mm
ISBN13 9791187756583
ISBN10 118775658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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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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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만의 원인은 신석기 유목민의 DNA가 체내에 탄수화물을 저장하기 때문이다. 꽃을 전자레인지에 3분 동안 가열하면 반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있다. 양귀비꽃은 옮겨 심으면 죽는다. 예술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오래 생각했다, 가, 비누 거품을 칫솔에 묻혀 이빨을 닦았다. 그냥, 산다, 는 말 이면에 거울처럼 수은이 덧칠되어 있다.

이미 가 버린 것에는 가는 것이 없다

한시(漢詩)를 읽는 겨울밤은 따뜻했다. 새우의 등에서 내장을 빼내 그가 평생 바다에서만 앓았을 바람의 냄새를 맡아 보았다. 비릿한 바다의 숨결 한 마디를 흐르는 물에 띄워 보낸다. 근원적인 외로움은 당신을 사랑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인류 역사가 수천 년인데도 인간이 왜 사는지 그 답변 하나를 찾지 못했다.

손에 스킨을 묻혀 얼굴에 바르다 알았다
안경을 벗지 않았다는 것을

임신한 여성의 태반에서 레트로 바이러스는 태아의 배아 발육을 촉진한다. 허공을 뚫고 올라간, 오늘의 꽃이 허문, 어제의 저 경계가 짙푸르다. 더 이상 도(道)를 아느냐고 묻지 않는 시대, 질량이 큰 별일수록 중심 온도가 높아지지만 슬픔은 무게가 아니라 범위의 문제다. 외로움은 질기고 눈물은 뜨거워 비 오는 날에도 물고기들의 심장이 강 속을 뚫고 간다.

물푸레나무가 잔물결을 향해 흔들리며
강의 조용한 울음을 듣는 시간
내 어깨가 자꾸 풍미(風味)에 젖어 드는 것이다 ***
--- 「열매를 맺는 방법」 중에서

애인이 없다. 쇠고기 장조림을 달이던 간장 냄새 가득한데 없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온도계와 거울 속의 수은은 형태가 깨진 후에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데, 없다. 없는 아이가 악이라도 질렀으면 하는 고요인데, 없다. 뭉크의 절규는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심(心)의 향찰식 표기는 심음(心音)이다

그리움이란 두 손으로 없는 당신의 얼굴을 붙잡아 콧등이라도 맞대고 싶어지는 것. 가슴에 손을 얹어 함께 호흡해 보는 것. 당신의 혀는 토마토 속살 같아, 먼 곳에서 당신이 내쉬는 숨결을 상상하며 붉어지는, 장마철 습한 바람에서 가쁜 숨 몰아쉬던 당신의 땀 냄새가 묻어 나올 것 같다.

독수리는 평생 하늘을 날아다니지만
죽어서 자신의 죽음을 허공에 묻지 않는다

나는 여러 개의 영혼과 부딪치며 살았다. 끝없는 대양을 떠돌다가 어느 늦은 바닷가에 가닿는 물결로 그리움은 저물어 갔다.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를 허공에 띄워 두고 온종일, 그 보고 싶다는 말 안을 뒹굴었다. 그 안의 골목은 어둡고 질기다. 없는 애인 옆에 앉아 공기놀이도 하고 싶은데, 이제는 없는 개나리꽃이 피었다 졌다.

비에 젖은 길을 잉태한 여자
고구마밭에 바람 불고
붉은 황토 가득 심장이 두근거렸다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면서 한국의 가계 부채는 증가했다. 전기밥솥에 넣어 놓은 플라스틱 주걱처럼 (너무 강압적이면 죄책감이 생겨, 자신의 성기를 만지작거리게 돼요) 휴일에는 차라리 눈뜨지 말 걸, 방전된 개 인형 하나 침대 옆에 놓여 있다. ***
--- 「지각하거나 지각되거나 1」 중에서

고요한 수면을 울렁이게 하는 바람의 손길, 물결무늬 위로 비치는 별빛들, 모든 매스미디어에는 배후가 있다. 되도록 흐린 날을 간택할 것. 믿음은 경제상 거래이자 근간이다. 툰드라 기후 같은 어둠 속의 고속도로. 가로등이 켜진다. 자본주의는 서로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

겨울 하늘의 차고 어두운 내부를
단단히 뭉치고 있는
빈 들녘 속에 놓인 잉크병

죽음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나뭇가지 위의 새들은 밤새, 아침에 날아가 낚아챌 먹이를 가슴속에 품고 잔다. 한국은행 총재는 금리를 동결했다. 고개를 문 안쪽으로 밀어 넣는 게 이 바닥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 니트는 옷을 뒤집어 세탁해야 잔털이 일어나는 현상을 막을 수 있다.

대지의 한가운데
검은 점으로 박혀 있던 꽃씨들

희미하게 꼬리를 내리거나 올리는 발음이 있다면, 마음이 예쁘니 더 아름답다라는 식의 주문(呪文)처럼 심리적 압박을 많이 받을수록 당신은 죽음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증거. 월스트리트는 금요일 중국 정부의 채권 상향을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맹아의 숨결이 적설(積雪)을 뚫는다
백지 위로 점점이 문자들이 피어오른다

사각의 링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동서남북 사계절을 지닌 한반도의 계절, 통증은 짧고 가볍게 이야기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주먹보다 팔꿈치가 유용한 이유다.

꽃은 피어날 곳의 허공을
미리 더듬어 보고 피어오르지 않는다 ***
--- 「링에서 살아남는 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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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히, 가난은 세상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히히, 4』) 진언(眞言)이다. 쓸쓸해진다. 통증과 진동이 몰려온다. 최승철의 시를 읽은 후 동사 ‘견디다’가 쓸모없는 단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처참해진다. 우리가 알지 못했거나 무시했던 가난의 현재와 과거, 가난의 고통과 슬픔. 가난의 모멸과 형극이 그려 내는 이미지를 끌어안은 채 희생양이 되려고 하는 자를 목격한다. 고통이여, 만개하라. ‘나’는 당신들의 모든 아픔이 되리라. ‘나’는 처형되리라. 짊어지리라. 혼돈의 절망향에서 절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대신해서 피 흘리는 자, 최승철이다. 절망보다 빠르게 피, 쏟아진다, 피, 번진다. 피 냄새, 피어난다. 공포가 배회한다. 사랑은 병들었다. 최승철은 패배했지만, 사랑을 잃었지만, 지지 않았고, 상실하지 않았다. 그는 달궈진 강철이다. 시는 해머이고, 세상은 모루이다. 살아 있는 한, 시는 최승철의 애인이고 무기이고 어머니이고 또한 슬픔, 절망, 행복, 사랑이다. 절망 접종. 전염. 죽음의 창궐. 염장된 시. 독자를 담금질하는 빈곤의, 이 국가의, 이 시대의, 이 시집의 단어-문장-통사-시스템-의미-가치. 뜨겁고 들끓어 아프고 아프다. 고독인데 고독이라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인데 고통이라고 응답할 수 없는 시들. 우리는 시들고 말겠지만, 시의 잎들은 지느러미 달고 세상으로, 우리 몸 안으로, 밀고 간다, 밀려온다. 최승철의 시집은 “죽음의 진화된 형식”(?키위 혹은 냉장고?)이다. 시집을 덮을 때, 우리의 모든 발화는 부정어 ‘않다’로 종결될 것이다. 이 시집은 강건한, 부정의 부정의 부정이다. 그것이 희망의 맨 얼굴이다.
- 장석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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