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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빛이 여전합니까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창비시선-440이동
손택수 | 창비 | 2020년 02월 2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7 리뷰 11건 | 판매지수 210
베스트
시/희곡 top100 8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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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회 조태일문학상 수상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2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132쪽 | 182g | 128*188*9mm
ISBN13 9788936424404
ISBN10 8936424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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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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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은 먼 곳이 있는 사람
잃어버린 먼 곳을 다시 찾아낸 사람
걷는 것도 끊는 거니까
차를 끊고 돈을 끊고
이런저런 습관을 끊어보는 거니까
(…)
나는 가야겠네 걷는 사람으로
먼 곳을 먼 곳으로 있게 하는 사람에게로
먼 곳이 있어 아득해진 사람에게로
--- 「먼 곳이 있는 사람」 중에서

부산진 시장에서 화물전표 글씨는 아버지 전담이었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아버지가 시장에서 대접을 받은 건
순전히 필체 하나 때문이었다
전국 시장에 너거 아부지 글씨 안 간 데가 없을끼다 아마
지게 쥐던 손으로 우찌 그리 비단 같은 글씨가 나왔겠노
왕희지 저리 가라, 궁체도 민체도 아이고 그기
진시장 지게체 아이가
(…)
일당벌이 지게를 지시던 당신처럼 나도
펜을 쥐고 일용할 양식을 찾는다
모이를 쪼는 비둘기 부리처럼 펜 끝을 콕콕거린다
비록 물려받지는 못했으나 획을 함께 긋던 숨결이 들릴
것도 같다
이제는 지상에 없는 지게체
--- 「지게體」 중에서

벗의 집에 갔더니 기우뚱한 식탁 다리 밑에 책을 받쳐놓았다
주인 내외는 시집의 임자가 나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차린 게 변변찮아 어떡하느냐며
불편한 내 표정에 엉뚱한 눈치를 보느라 애면글면
차마 말은 못하고 건성으로 수저질을 하다가
(책을 발로 밀어 슬쩍 빼면
지진이라도 난 듯 덜컥 식탁이 내려앉겠지
국그릇이 철렁 엎질러져서 행주를 들고 수선을 피우겠지)
고소한 복수 생각에 젖어 있는 동안
이사를 다니느라 다치고 긁히고 깨진 식탁
각을 잃고 둥그스름해진 모가 보인다
시집이 이토록 쓸모도 있구나
책꽂이에 얌전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기보단
한쪽 다리가 성치 않은 식탁 아래로 내려가서
국그릇 넘치지 않게 평형을 잡아주는,
오래전에 잊힌 시집
이제는 표지색도 다 닳아 지워져가는 그것이
안주인 된장국마냥 뜨끈하게 상한 속을 달래주는 것이었다
--- 「시집의 쓸모」 중에서

뼈 빠지게 사노라 살지 못했는가
죽는 것은 습관이 아닌데 사는 것은 습관이 되어서
행복이여, 어쩌다 나는 행복에 대한 저항시를 쓴다
행복을 위해서도 저항시를 위해서도 이건 참 서글픈 일
이다
--- 「행복에 대한 저항시」 중에서

나는 나의 시에 성대가 있었으면 한다
목을 파이프처럼 통과하면서 혀를 만난 말이
이와 입술 너머의 공기를 진동시켰으면 한다
공기를 만난 말은 공기 중으로 녹아 사라지고
사라지면서 새의 속깃털을 후 불어주고
어느 귀퉁이 흔들리는 꽃잎사귀를 만나 한눈도 좀 팔고
책상에 앉아 이맛살 찡그리며 궁상을 떠는
시 같은 것은 이제 까맣게 잊고, 그예 시인도 잊고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데 그 말씀이나 찾아서
여행을 떠날 수 있었으면 한다
--- 「수백 페이지의 혀를 가진 바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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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적힌 그대로, 그 있는 그대로에 힘입어 시 읽다 말고 나가 걸었지 뭐야. 걷는 사람은 먼 곳이 있는 사람이라 했지. 그리하여 길을 묻던 기억을 회복하는 사람이라 그랬지. 회복이라는 단어, 보자마자 나 왜 설레었을까 하니 꽃니 자국 같은 말인 거라. 곰취나물 그렇게 잡아당기다 간 거 대체 누구라는 이라니. 덕분에 취해서는, 엉겁결에 착해져서는 내가 내 걸음에 낯설어도 하게 되는 거지. 가만히 앉은 채로 넘어가는 저를 볼 줄 아는 산의 눈빛, 나는 그 산색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진 거라니. 풀리는 다리, 주저앉는 꼬리뼈…… 허나 시인의 종이가 나를 품고 시인의 바위가 나를 업지 뭐야. 냉큼 그만큼의 가벼운 실림이 싫지 않은 데는 그 덕분에 하늘을 빤히 올려다보게도 되어서지. 가을 하늘이 얼마나 푸르냐고 물어오니 나는 이미 말한 가을 하늘을 다시 보게도 되는 거지. 명품을 간파하는 눈이 생겼는데 사람은 알아보지 못하고 정작 네 살갗에는 무덤덤…… 먼 데를 잃고 더 쓸쓸해져버린 사람에게 이 구절을 편지로 옮겨주는데 쓰라려, 쓰라립지 뭐야. 존재하지 않아도 좋은 무엇이 된 것만 같은 이 느낌, 붉은빛이라고 서둘러 써둘 참이지.
-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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