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 주제 사마라구
이런 경우를 ‘참 시의적절하다’고 해야할까. COVID-19로 온 세상이 시끄러운 이 때에 이 책을 읽게 된 것이 말이다. 눈을 멀게 되는 전염병이 한 도시의 모든 사람,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쓸고 지나가면서, 그리고 그 이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어떠할 것이며, 죽어가는 모습은 또 어떠할 것인가. 사람들은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고, 변해갈 것인가.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은 병에 걸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특히나 그 병이 다른 병이 아닌 눈이 멀게 되는 것일 때, 그것은 다른 전염병과는 또 어떻게 다르게 전개될 것인가.
이렇게 전염병을 주제로 삼는 책들은 필연적으로 극한 상황을 맞닥뜨린 인간의 본성, 극히 이기적일 수 밖에 없는 본 모습, 바닥을 다 드러내는 듯한 행동들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특히나 이 책은 설정이 눈이 머는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절도, 폭력, 살인, 강간, 음모 등 인간성의 민낯을 바닥까지 다 드러낸다.
이전에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이제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전염병이라는 것이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를 바꿔놓는다는 점이다. 거리에서 마주치게 되는 사람들, 대중교통에서 옆에 서게 되는 사람들, 음식점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그냥 사람이 아니라 내게 전염병을 옮길 수 있는, 결과적으로 내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예민하거나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이 책은 이러한 측면을 크게 부각시키지는 않는다. 눈을 멀어서 격리된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중심으로 전개가 되기 때문에 감염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의 갈등, 반목, 대립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이 점이 내가 이책을 시작하며 예상했던 점과 달랐고 사실 조금은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깨닫는다. 저자의 의도는 내가 가진 선입견과 달랐구나.
극한 상황에서도 삶은 이어진다. 보이지 않아도 사람들은 조직을 만들고, 리더를 만들고,사람에 대한 시각(?) 혹은 관점을 형성하고, 우정과 인정을 나누고, 사랑을 하고.. 그렇게 삶은 이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이 연약한 삶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기적은 계속 살아가는 거예요, 여자가 말을 이었다, 매일매일 연약한 삶을 보존해 가는 거예요, 삶은 눈이 멀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존재처럼 연약하니까, 어쩌면 진짜 그런 건지도 몰라요, 어쩌면 삶은 진짜 어디로 갈지 모르는 건지도 몰라요, 삶은 우리에게 지능을 준 뒤에 자신을 우리 손에 맡겨버렸어요, 그런데 지금 이것이 우리가 그 삶으로 이루어놓은 것이에요.”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역병을 소재로 하지만,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가 바라 봄으로써 인지하는 것들과 실제로 본다는 것이 과연 같은 것일까. 아래에 주인공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하는 말처럼, 우리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여운을 남긴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이 책은 처음 읽을 때 문장부호가 마침표와 쉼표 밖에 없는 점이 특이하다. 물음표, 따옴표 따위는 다 무시하고 말이다.
“순식간에 눈이 머는 사람은 없어요. 그럴지도 모르지. 어떻게 된 일인지 이야기해 봐요, 어떤 느낌이었어요, 언제, 어디서, 아니, 아직 아니야, 기다려요, 무엇보다 먼저 안과 전문의와 이야기를 해봐야 돼, 누구 생각나는 사람 없어요. 없는데, 우리 둘 다 안경을 안 쓰잖아. 무조건 병원으로 가볼까요. 눈이 먼 걸 가지고 응급실로 들어갈 수는 없잖아. 당신 말이 맞아요, 바로 안과 의사한테 가보는 게 좋겠어, 전화번호부에서 이 근처의 안과를 찾아볼게요.”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이게 누가 하는 말인지 헷갈리기 일쑤다. 마침표가 나와야 비로서 화자가 바뀐다.
[책속으로]
그러나 사려 깊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배반하고, 또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거부해 온 도덕적 양심은 지금도 존재하고 또 전에도 늘 존재해 왔다.
그 특수한 상황이란, 단순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어떤 악한 행동을 저질렀을 때 생기는 가책이라는 것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온갖 종류의 공포와 뒤섞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의 잘못을 얼버무리려 하는 사람은 결국, 가혹하게도, 자신이 받아 마땅한 벌의 두 배를 받게 된다. 이 경우, 차의 시동을 걸고 떠나는 순간 그 도둑을 괴롭혔던 것 가운데 몇 퍼센트가 공포이고 또 몇 퍼센트가 양심의 가책인지 해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선을 행하다 보면 언제나 함정에 빠지기 마련이고 죄와 악을 행하는 자는 대체로 억세게 운이 좋다.
원인이 밝혀질 때까지는, 또는 적절한 용어를 사용하자면, 백색의 악의 병인(病因)이 확인될 때까지는 눈이 먼 모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신체적 접촉을 했거나 어떤 식으로든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을 찾아내 격리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그 결과를 생각해 본다면, 곧 즉각적인 결과, 확률이 높은 결과, 가능한 결과, 상상할 수 있는 결과를 차례대로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면, 우리 머리에 처음 떠오른 생각에 가로막혀 절대 어떤 한계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리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예를 들어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와 그의 아내는 처음 만났을 때의 감격이 사라진 후, 거의 이야기를 나누는 법이 없다. 아마 현재의 불행이 과거의 사랑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야 말지. 그것은 모순을 내포한 결론이다. 결국 이보다 더 나쁜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거나, 아니면, 비록 모든 증거는 반대를 가리키고 있지만, 이제부터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인간의 이성과 비이성은 어디에서나 똑같은 것 아닌가.
사실 우리가 이기주의라고 부르는 그 제 이의 살갗 없이 태어난 인간은 없으며, 제 이의 살갗은 너무 쉽게 피를 흘리는 원래의 살갗보다도 훨씬 오래 지속되기 마련이다.
언제 살인이 필요할까, 그녀는 생각하면서 현관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직 살아 있는 것이 이미 죽은 것이 될 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그게 무슨 뜻일까, 말이야, 그저 말일 뿐이야.
이런 상황에서는 보통 눈에 그런 표정이 드러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상례인데, 사실 이런 표현은 근거가 없다. 눈에는, 엄격히 말해서 눈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눈알을 뽑아냈을 때도, 그것은 그저 아무런 활력이 없는 두 개의 둥그런 물체에 불과하다. 여러 가지 시각적 웅변과 수사를 전달하는 것은 눈꺼풀, 속눈썹, 눈썹이다. 사람들은 보통 눈이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지만.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계속 살고 싶은 이유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답이란 필요하다고 해서 꼭 나타나는 것은 아니니까. 유일한 답은 답을 기다려보는 것일 경우가 많다.
우리 내부에는 이름이 없는 뭔가가 있어요, 그 뭔가가 바로 우리예요.
불안한 밤이었다. 처음에는 모호했고, 또 부정확했지만, 꿈들은 분명히 잠자는 사람들 사이를 옮겨다녔다. 여기에 머물렀다가 다시 저기에 머물렀다. 꿈들은 그들에게 새로운 기억, 새로운 비밀, 새로운 욕망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잠자는 사람들은 한숨을 쉬며 투덜거렸다, 이 꿈은 내 것이 아니야. 그러나 꿈은 대답했다, 너는 네 꿈이 뭔지 아직 몰라.
말이란 것이 그렇다. 말이란 속이는 것이니까, 과장하는 것이니까. 사실 말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우리는 갑자기 튀어나온 두 마디나 세 마디나 네 마디 말, 그 자체로는 단순한 말, 인칭대명사 하나, 부사 하나, 동사 하나, 형용사 하나 때문에 흥분한다. 그 말이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살갗을 뚫고, 눈을 뚫고 겉으로 튀어나와 우리 감정의 평정을 흩트려놓는 것을 보며 흥분한다. 때로는 신경마저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돌파당하고 만다. 사실 신경은 많은 것을 견딘다. 모든 것을 견딘다. 갑옷을 입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의사의 아내의 신경은 강철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인칭대명사 하나, 부사 하나, 동사 하나, 형용사 하나 때문에, 이런 단순한 문법적 범주들 때문에, 단순한 부호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만다.
우리는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두려워서, 늘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용서해 줄 구실을 찾으려고 하죠, 우리 차례가 될 때를 대비해 미리 우리 자신에 대한 용서를 구해놓듯이 말이에요.
이윽고 작가가 말했다, 자기 자신을 잃지 마시오, 자기 자신이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마시오. 이것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상황에 어울리는 것 같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기적은 계속 살아가는 거예요, 여자가 말을 이었다, 매일매일 연약한 삶을 보존해 가는 거예요, 삶은 눈이 멀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존재처럼 연약하니까, 어쩌면 진짜 그런 건지도 몰라요, 어쩌면 삶은 진짜 어디로 갈지 모르는 건지도 몰라요, 삶은 우리에게 지능을 준 뒤에 자신을 우리 손에 맡겨버렸어요, 그런데 지금 이것이 우리가 그 삶으로 이루어놓은 것이에요.
다른 사람들과 사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거지.
당신은 자신을 속이고 싶어할 뿐이에요. 기억이 우리를 속이는 걸 보면 참 이상도 하지. 이 경우에는 그 이유를 아는 게 어렵지 않죠, 우리에게 제공된 것은 우리가 정복해야 하는 것보다 더 우리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 법이니까요.
사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미리 알 수 없는 거예요, 기다려봐야 해요, 시간을 줘봐야 해요,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시간이에요, 시간은 도박판에서 우리 맞은편에 앉아 있는 상대예요, 그런데 혼자 손에 모든 카드를 쥐고 있어요, 우리는 삶에서 이길 수 있는 카드들이 어떤 것인지 추측할 수밖에 없죠, 그게 우리 인생이에요.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