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복잡하고 말 많고 탈 많은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을 살아가면서 일일이 사량 분별로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하고 사신다면 어느 천 년에 나를 밝히고 불법의 맛을 알게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사성제를 말씀하신 것은 고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죽고 또 죽는 한마음의 인생살이에는 고(苦)가 없습니다.
고는 사라집니다. 결과에 무심한 것을 놓는 것이라고들 하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놓는다는 것은 죽든지 살든지 그야말로 생사까지도 다 놓으라는 것입니다.
잘되는 것, 못되는 것 가리지 않고 맡기라는 것입니다.
살아있으니 숨 쉴 것이고 먹을 것이고 움직일 것 아닙니까?
우리가 걸어가는데 한발자국 떼었으니 또 한발자국 떼어 놓아야지 하면서 걷는 것은 아니지요?
그냥 자동 아닙니까?
놓고 가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 사량으로 이럴까 저럴까 따지지 말고 잘났든 못났든 나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을 믿고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살면서 마음법으로써 나도 건지고 일체도 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 분은 내게 ‘스님 다 놓아버린다면 어떻게 삽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반문합니다.
‘왜 놓는다면서 그 놓는다는 생각을 붙들고 계십니까?’
‘그 놓는다는 생각까지도 놓을 수 없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한은 놓는 게 아니지요.
실은 들고 있다, 놓고 간다도 없습니다.
그냥 한 생각 일어났다가 사라지면 그뿐인데 그걸 기억하고, 그 생각에 걸려서 옴짝달싹을 못하니까 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그냥 놓고 가면서도 얽매여 있으니 한 생각 툴툴 털고 돌리라는 뜻입니다.
예전에 어떤 선사께서 부처님 나오심이 평지에 풍파를 일으킴이라고 하셨고, 또 어떤 분은 그냥 죽여서 개에게나 던져 주리라 하셨다는데, 찰나찰나 돌아가고 있는 이 생활이 그냥 놓고 감인데, 거기에 이렇다 저렇다 이리 걸리고 저리 불편해지고 하는 것을 말함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찰나찰나의 생활이 실은 그대로 놓고가는 삶입니다.
그런데 그걸 붙잡으려 하니까, 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놓으라는 것도 이름입니다.
붙든다는 것도 없고 놓는다는 것도 없습니다.
그냥 발걸음 그대로이면 굳이 놓는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를 못하니까 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여여하면 됩니다.
지난 것은 다 털어버리고 새로움을 맞는 동짓날입니다.
좋든 싫든 모든 것들을 다 놓고 가는 날입니다.
---〈놓으라는 것도 이름입니다〉
마음은 무엇일까요.
우리들에게 고통을 알게도 하고 행복을 느끼게도 하는 이 마음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마음은 실체가 없습니다.
마음은 본래 공한 것입니다.
마음은 본래 희비애락이나 애착 따위에 물들지 않아서 청정하고 청정합니다.
마음에는 생멸이 없고, 마음에는 생각과 관념도 붙지 않습니다.
마음은 본래 해탈되어 있으며, 마음은 영원하다느니 무한하다는 말조차도 넘어서 있습니다.
마음의 그러한 본래 모습을 우리는 한마음이라고 부릅니다.
주관적으로 말할 때는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법우님들은 마음이 본래 걸림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체의 관념을 그 자리에 놓아서 지워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곧 우리들의 수행이며 하루하루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니 극락과 지옥도 지금 이 순간의 내 마음 안에서 결정지어진다는 것을 아시고, 일체를 이끌어 가는 근본도 분명히 내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일체가 마음에서 벌어지는 것이지 마음 이외에 다른 곳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꿈이다, 현실이다, 싸이버 가상공간 온라인이다 라는 말이 붙을 사이가 없이 공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것이 주어지든 내 마음대로 넘어설 수가 있는 겁니다.
‘無無亦無’(무무역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없고 없고 또 없다고 하는 뜻은, 뒷 발자국도 없고 앞 발자국도 없고, 현재 떼어놓는 발자국조차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거 할 때 나라고 할 수 없고 저거 할 때 나라고 할 수 없으니, 어느 것이나 무엇을 할 때 내가 한다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찰나찰나 바뀌어가는 것인데 지나간 발자국이 좋고, 감사한 것이라고 해서 그것을 붙잡고 있으려고 해서는 안 되지요.
마찬가지로, 앞으로 올 것을 미리 걱정하고 있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무무역무(無無亦無)〉
주어진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더 갖겠다는 욕심은 빚을 더 지겠다는 것이니 어찌 일생을 통해 빚잔치나 하고 살아가려 하느냐는 물음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분수와 만족을 넘어 은혜에 감사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성의를 다 기울여서 회향해야만 합니다.
먼저 감사한 줄 알아야 갚을 마음도 생깁니다.
감사한 줄 모르는데 베풀고 나눌 마음인들 생기겠습니까.
실은 베푸는 것도 나누는 것도 없습니다.
오직 되갚음이 있을 뿐입니다.
감사하게 느끼니까 의당 갚아야 하겠노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절로 무주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일상 속에서 감사할 줄 모릅니다.
특별하게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면 으레 그러려니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종대은(五種大恩)만이라도 명심하여 잊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얼마나 은혜를 모르고 살면 아침마다 이를 외우라고 했겠습니까.
하물며 땅의 은혜, 물 불 바람의 은혜이겠습니까.
쓰레기를 마구 버리고 공기를 더럽히고 물을 오염시키는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지금의 나 자신에게 감사해 보세요.
내 정신이 바르고 사지가 멀쩡하다는 사실에 감사해 보세요.
팔이 하나 없는 사람, 다리에 장애가 있는 사람, 몸에 병이 들어 고통받는 사람이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은 온전한 사지육신, 건강을 되찾는 일일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나 자신에게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다음에 감사의 대상을 주변으로 확대시켜 보세요.
내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감사한 존재로 마음에 떠오를 것입 니다.
내 이웃, 내 직장의 동료 중에도 감사하게 느껴지는 얼굴이 생각보다는 많을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저 푸른 하늘도 감사하고 바람, 물, 불에도 감사할 일이 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