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쪽!” 한 손으로 뺨에 박힌 화살을 뽑은 김거리차리가 외쳤다. 조유경을 비롯한 일행 모두 그쪽으로 뛰었다. 화살이 계속 날아들었지만 달리는 그들을 맞히지는 못했다. 내리막이 점점 급해지면서 다들 구르다시피 하면서 내려갔다. 정신없이 달리던 조유경은 힐끔 뒤를 돌아 쫓아오는 여진족을 봤다. 손에 무기를든 수십 명의 여진족이 괴성을 지르며 따라오고 있었다. 길게 땋은 머리가 마치 깃발처럼 바람결에 흩날렸다. “형님, 앞쪽에도 있어요!” 제일 앞에서 달려가던 가질동이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맞은편 산자락에도 사람들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뺨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손으로 막은 채 달리던 김거리차리가 내리막이 끝나는 곳에 있는 협곡을 가리켰다. “저기로 가자.” 산과 산이 만나면서 생긴 좁은 협곡은 낙엽이 수북이 쌓여있어서 마치 개울물을 헤쳐 나가는 것처럼 힘이 들었다. 하지만 그곳으로 간 덕분에 양쪽에서 몰려온 여진족들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구불구불한 협곡을 따라 달리는 일행의 뒤로 여진족들이 따라붙었다. 이제는 화살을 쏘거나 괴성을 지르지 않고 차분하게 쫓아왔다. 얼마쯤 달렸을까. 갑자기 협곡이 끝나고 절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본 방장생이 우는소리를 했다. “아이고, 우린 다 죽었네.” 그러자 김거리차리가 버럭 호통을 쳤다. “입 닥치고 얼른 올라가기나 해.” “어딜 말입니까, 형님?” “칡넝쿨 안 보여? 저걸 잡고 올라가라고.” “그러다가 놈들이 화살을 쏘면 어쩌려고요.” 방장생의 다그침에도 김거리차리는 대꾸도 하지 않고 절벽에 드리워진 칡넝쿨을 움켜잡았다. 그러자 부하들이 하나둘씩 매달렸고, 조유경도 칡넝쿨을 움켜잡았다. 끊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절반쯤 올라갔을 무렵, 여진족들이 절벽 아래에 도착했다. 몇 명은 칡넝쿨을 흔들면서 떨어뜨리려고 했고, 활을 쏘기도 했다.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가는 화살 소리에 움찔한 조유경에게 김거리차리가 소리쳤다. “멈추지 말고 계속 올라와!”
병조판서의 아들 조유경은 한양의 이름난 한량이다. 친구들과 모여 《삼국지연의》나 읽으며 심심파적으로 지내던 평화로운 나날은 속에서 곪는 중이었다. 조유경이 친구라 믿었던 사람들은 작당을 해서 조유경이 무심히 던지 세자에 대한 이야기를 역모로 고변하였다. 친구들과 하인까지 입을 맞춘 상황에서 조유경은 속수무책으로 멸문지화를 당하고 만다. 그나마 아버지가 조선 개국 과정에서 세운 공으로 사형만은 면했으나, 적진을 염탐하는 체탐인의 신분으로 굴러떨어지고 만다.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백면서생에서 난데없이 야생의 현장에 떨어진 조유경.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자신의 모든 것과 사랑하는 약혼녀까지 앗아가버린 원수들에게 복수를 해야만 한다. 조유경은 악착같이 살아남고자 노력하고 실낱같은 기회를 잡아채는데 성공한다. 이제 그의 복수극이 펼쳐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