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레인을 따라 한 바퀴 쭉 걸어갔다 오시구요. 그다음에는 그냥 다 같이 물에 둥둥 떠 볼 거예요.”
선생님의 말에 수강생들 모두 앞 사람의 등을 보며 느릿느릿 수영장을 한 바퀴 돌았다. 다리에 기분 좋게 감기는 물을 느끼며 레인을 걷는 할머니들처럼. 그다음엔 물을 이불 삼아 물 위에 엎드렸다. 아, 물 위에 떠 있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정말 죽을 것처럼 힘들고, 숨 막히는 것만은 아니구나. 버둥대지 않아도 되는구나.
--- p.26-27
나는 이제 겨우 수술을 막 마친 암 센터 신입생인데다, 소위 ‘착한암’이라고 하는 갑상선암에 걸렸으니 감히 ‘지나고 나니 별일 아니에요’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비슷한 흉터로 무언가를 주저하고, 위축돼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은 해 줄 수 있다. 어느 수영장에서는 70대 할머니도, 60대 아주머니도, 그리고 30대 아기 엄마도 결국에는 암 센터를 나와 매일 신나게 물속에서 자유를 느낀다고. 그리고 물속에서 그 지옥 같은 감정들이 마법처럼 녹아내린다고. 마치 그게 아주 오래전 꿈인 양, 어딘가로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암 환자 네 명이 서로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흉터에 대해 말하는 날이 오더라고 말이다.
--- p.53
그 다음날은 플립턴이었다. 실내 수영장 자유 수영 때는 아무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픈턴을 하는데, 사실 그 오픈턴도 정확한 자세로 하는 사람을 거의 본적이 없었다. 수영 대회에 나온 것도 아니고, 북적거리는 레인에서의 안전 문제도 있고 무한 자유형 뺑뺑이 돌기를 위해서는 그저 슬쩍 벽을 잡고 방향을 바꾸면 그만 아닌가. 그런데 할머니들은 마치 대회에 출전한 수영 선수들처럼 물속에서 앞 구르기를 해 턴을 하는 플립턴을 연습하고 계셨다. 자유형으로 가셨다가 벽 앞에서 돌고래처럼 앞 구르기, 그리고 벽 차기, 그리고 유선형 자세를 유지하며 다시 되돌아오기, 타이밍이 안 맞아 벽을 차는 발이 삐끗한 건지, 아니면 코에 물이 잔뜩 들어간 건지 중간에 멋쩍은 듯 배시시 웃으며 서실 때도 있었지만 할머니들의 플립턴 연습은 한 번, 두 번, 그리고 열 번 넘게 계속 이어졌다.
--- p.59
록쌤이 고개를 저은 이유는 내 다리가 가라앉기 때문이었다. 수영은 누가 물의 저항을 덜 받아 남들보다 더 빠르게 앞으로 나가는가 겨루는 경기다. 그런데 하체가 가라앉으니 기울어진 상태에서 온몸으로 저항을 받으며 남들보다 더 힘겹고 더 느리게 수영하고 있는 꼴이었다. 가라앉는 발차기를 교정하기 위해서는 당분간 다시 킥판에 의지한 채 코어에 힘을 주고 몸을 유선형으로 띄우는 것이 과제였다. 록쌤의 마지막 말이 내 귀를 때렸다.
“아마추어가 킥판 잡고 하는 게 뭐 어때서요. 회원님 인생에서 앞으로 킥판 안 잡고 수영할 날이 더 많아요.”
--- p.69-70
어쩌면 그 이름 모를 학생은 자신만의 ‘야옹이 올림픽’에 출전했는지도 모르겠다. 나 같은 속물 결과 지상주의자는 ‘그럴 거면 왜 대회에 나가느냐’는 질문을 던지겠지만 그의 레이스 너머에는 ‘아름다운 완영--- p.完泳)’ 같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의미가 있으리라. 기록도, 심지어 완영에 대한 목표도 없이, ‘6등할 거면 뭐 하러 출전해?’라는 시선 따위 아랑곳 않고 그저 그 초 단위 경쟁의 세계에 아무런 목표 없이 일단 몸을 던져 보는 일, 그리고 그 무대에서 남들이 앞서 가든 말든 신명 나게 놀아 보는 일을 내가 마지막으로 경험한 게 언제였을까. 무엇보다 메달이나 기록 없이, 누군가에게 순수한 기쁨으로 내 성취를 알린 적이 있었나. 나는 죽기 전에 그런 신나는 수영을 해 볼 수나 있을까.
--- p.129-130
숨을 쉬기 위해 몸을 너무 많이 비튼 걸까. 순간 뒤집어질 뻔했다. 코로 들어온 물이 쏴~아 하고 정수리까지 찌른다. 다리 사이에 끼운 킥판이 수영장 천장으로 튀어 오를까 번개 같은 속도로 멈칫하는 찰나 록쌤이 소리쳤다.
“잘 가다가 지금 왜 멈칫했어요?”
“뒤집어지면 물에 빠질까 봐 저도 모르게….”
“몸통을 최대로 돌려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이 겨우 물에 빠지는 거라면, 그냥 한번 빠져 보는 건 어때요?”
--- p.178-179
돌 전부터 엄마의 오리발과 수영 모자를 신나게 갖고 놀았던 딸은 말을 배우기 시작한 뒤로 이따금 핸드폰을 가리키며 ‘엄마 음~파! 음~파! 하는 거 볼래!’ 한다.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흑역사를 담은 수영 모습이지만 이 두 돌을 갓 지난 아기는 케이티 레데키나 마이클 펠프스가 하는 자유형을 본 적이 없으니 내가 엉망진창 수영을 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마음 놓고 보여 주곤 한다. 언젠가 동생이 호텔 수영장에서 내가 턴 하는 모습을 물속에서 찍어 준 적이 있는데 아기 눈에는 그게 꽤나 신기했던 모양이다. 아기는 연신 헤헤 웃으며 외친다.
“우와! 엄마가 새처럼 날아!”
--- p.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