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바둑을 두는 적수들의 경우에는 이곳에서 그야말로 승부의 흑백을 다투었지만 네 경우는, 그렇지,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의 흑과 백을 견주어 본다는 뜻이 되려나. 반드시 백은 백, 흑은 흑이 아니라 관점을 바꾸면 색깔도 바뀌어 그 틈새기의 색깔은 존재한단다…. 무엇이 백이고 무엇이 흑인지는, 실은 너무나 애매한 거야.”---p.97
스승의 한 손을 공손하게 잡고, 다쓰지로도 눈을 바싹 대다시피 하며 살펴보았다. 작지만 깔쭉깔쭉한 상처는 무언가에 물린 듯 보였다. “이 녀석 때문이다.” 세이로쿠는 비단보 위의 자물쇠를 눈으로 가리켰다. “누가 만지작거리는 것이 싫은 게지.” 다쓰지로는 한순간 오싹해졌다. 하지만 우선은 웃어 보았다. “설마요 스승님, 자물쇠는 산 것이 아닙니다.” “아니, 살아 있다.” 처음 듣는 말은 아니다. 세이로쿠는 이전부터, 가끔 훈계하는 듯한 말투가 되어서는 다쓰지로에게 이렇게 말해 줄 때가 있었다. 자물쇠는 산 것이다. 생명이 있다. 사람의 마음이 담기는 물건에는 혼이 깃들 때가 있지. “하지만 손을 물다니…… 개나 고양이도 아니고.” “그런 못된 자물쇠도 가끔은 있다. 너는 아직 만난 적이 없을 뿐이야.”---pp. 122~123
“그래서 너는 화가 난 게냐.” 대답이 막혀, 오치카는 가슴에 손을 댔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오후쿠가 몇 번인가 했던 몸짓과 똑같다. 자신의 고동이 전해져 온다. 거기에 분노가 섞여 있을까. “―오시마 씨에게, 악의가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화는 나는 게로구나.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마구 짓밟힌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오치카는 기분을 표현할 말을 겨우 찾아냈다. 이 가슴을 꽉 막고 있는 후회와 가책을, 그런 것 따위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며, 타인이 손쉽게 옆으로 치워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