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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

악의 평범성

창비시선-453이동
이산하 | 창비 | 2021년 02월 0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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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2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148쪽 | 202g | 126*200*20mm
ISBN13 9788936424534
ISBN10 893642453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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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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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찍어라.
그럼 난
네 도끼날에
향기를 묻혀주마.
---「나무」중에서

내 독방은 옛날에 한 사형수가 살았던 방이었다.
그가 무기수로 감형돼 30년을 살던 어느날
친한 교도관이 3일 뒤 특사로 나갈 거라고 귀띔했지만
특사명단은 극비라 반신반의하면서도 심장이 뛰었다.
그날부터 그는 사형선고 때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석방일 아침 교도관이 수번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3시간쯤 전 화장실 창살에 목을 매어 자살한 것이다.
너무 변해버린 세상에 대한 두려움 탓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3시간을 더 기다릴 수 없었던 탓이었을까
---「3시간」중에서

나이에 맞게 살 수 없다거나
시대와 불화를 일으킬 때마다
난 얼어붙은 겨울 폭포를 찾는다.
한때 안팎의 경계를 지웠던 이 폭포는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여전히 공포에 떨고 있다.
자신의 모든 틈을 완벽하게 폐쇄시켜
폭포 바닥에 깔린 돌들의 외침이며
사방으로 튀어나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물방울들의 그림자며
지금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저 헛것들의 슬픔까지
폭포는 물의 마디마디 꺾어가며
자신을 허공으로 던진다.
---「겨울 폭포」중에서

TV의 ‘제주 4·3’ 70주년 추념식을 무심히 보는데
가수 이효리가 내 시를 낭송하는가 싶더니
추념사를 하는 문재인 대통령 입에서 내 이름까지 나왔다.
아득히 환청처럼 들리면서 현기증이 일어났다.
몸은 감옥 밖으로 나왔지만 ‘이산하 시인’이라는 이름은
극좌의 상징으로 30년 동안이나 세상에서 유배된 상태였다.
4·3의 진실을 폭로하다 외면당한 금기의 이름이었다.
‘아?이제야 유배에서 풀려났구나……’
혼자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유배지가 어른거렸다
---「새로운 유배지」중에서

거듭 말하노니,
나를 위해 울지 말거라.
현대사 앞에서는 우리 모두 문상객이 아니라 상주이거늘
끝까지 그대들이 그대들 스스로를
버리지 않는 한 아무도 그대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은 모두 숨 쉴 때마다 언제나 ‘최후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백척간두에서 한 발 내디디며 숨을 쉬어야 한다.

빗줄기가 바람 한 점 없이도 허공의 허리를 베어내고
오래 참고 참았던 꽃들이 마침내 피어나는 이 작두골에서
그대 산 자들에 대한 한결같은 그리움으로 이 추도시를 쓴다.
---「나를 위해 울지 말거라」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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