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2005년 계간 『문학동네』에 글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몰락의 에티카』 『느낌의 공동체』 『정확한 사랑의 실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출간했다. 2014년 봄부터 2022년 여름까지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재직했고, 2022년 가을부터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비교문학 협동과정)에 재직중이다. 관심사는 예술의 윤리적 역량, 윤리의 비평적 역량, 비평의 예술적 역량이다.
한국어엔 고유어, 한자어, 외래어가 있다. 소셜 미디어 일각에선 고유어를 사용한 문장을 보면 ‘오그라든다’며 조롱한다. 어떤 젊은이들은 대개 한자어로 된 관념어·추상어의 뜻을 모르고 심지어 그게 왜 문제냐며 따진다. 어떤 학자들은 영어와 일대일 교환이 안 되는 한국어는 개념어의 자격이 없다고 여겨 (외래어도 아닌) 외국어를 선호한다.
나는 언어본질주의자도 언어신비주의자도 아니다. 그러나 좋은 걸 좋은 줄 모르고 함부로 대하는 걸 보는 일은 힘겹다. 이럴 땐 누가 대놓고 한국어의 편을 들어주면 좋겠다. 저자가 고른 어휘도 신중하지만 거기 붙여둔 단상들이 읽기 아까울 정도로 어여뻐서 나는 이 책을 편든다. 한국어와 깊은 사랑에 빠진 이 사람의 말을 좀 듣자. 좋은 걸 좋은 줄 알고, 이미 알아도 다시 더 알자.
글쎄요. 체험 안 한 거라도 체험한 것처럼 쓰는 게 제일 좋겠지요. 당연히 제가 쓰는 이야기들도 모두 체험한 것들은 아닙니다. 그래도 그런 건 있어요. 뭐든 체험한 듯한 상태가 될 때까지 가야 쓸 수 있습니다. 내가 등단 초기에는 남자들 얘기도 배경도 그렇습니다. 그런 걸 쓰는 동안에는 남자가 돼야 하는 것이죠. 배경도 그렇습니다. 주인공이 상계동에 살면 좋겠다 싶으면 상계
그렇게 여러가지 꽃나무가 있는 줄은 몰랐다.향기 짙은 흰 라일락을 비롯해서 보랏빛 아이리스, 불꽃 같은 연산홍, 간드러지게 요염한 유도화, 홍등가의 등불 같은 석류꽃, 숨가뿐 치자곷,그런 것들이 불온한 열정-화냥기처럼 걷잡을 수 없이 분출했다. [그 남자네 집, 진절한 복희씨] 지난 봄날이 떠오른다. 아치울 마을을 찾아뵜는 일행에 끼게 되었
웃을 일이 없어서 내가 나를 웃기려고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 나를 위로해준 것들이 독자들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 작가의 말, 친절한 복자씨 ]내가 이직도 소설을 위한 권위 있고 엄숙한 정의를 못 얻어 가진 것도 '소설은 이야기다'라는 단순하고 소박한 생각이 뿌리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뛰어난 이야기 꾼이고 싶다. 남이야 소설에도 효능이
“관찰한다는 것은 구출하고 구원하는 것이며 삶을 그 자신으로부터 구해낸다는 것이다.” 제임스 우드는 문학적 작은 죽음과 실제 죽음, 두 가지 모두를 아울러 “작가들이 관찰 대상의 생명을 죽음으로부터 구해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110쪽)”고 통찰한다. 독자로서 어렴풋이나마 타자를 돌보고 지켜주고 싶은 관찰자(작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리딩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바라보는 것이며 경험의 구조를 탐색하는 것이다. 나무 그림은 그냥 나무가 아니라 누군가가 바라본 나무이다. 나무 한 그루가 놓인 풍경을 보는 것은 그 즉시 인식되겠지만, 나무 한 그루를 탐색하는 것(누군가가 바라보는 나무)은 몇 초의 짧은 순간이 아니라 몇 분에서 몇 시간까지 걸릴 뿐 아니라 이전에 나무를 바라봤던 경험을 포함하고, 그 경험에서 파생되
지금 이 순간에도 나 말고 에스테반과 페피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오직 카밀라만이 그녀의 아들과 피오 아저씨를 기억하고, 오직 이 여인만이 자신의 어머니를 기억한다. 그러나 우리는 곧 죽을 것이고, 그 다섯 명에 대한 모든 기억도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우리 자신도 한동안 사랑받다가 잊힐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사랑이면 충분하다. 모든 사랑의 충동은 그것을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