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올해의 문제소설’에 선정되고, 한국일보 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문단의 큰 주목을 받아온 작가다.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마더」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파씨의 입문』, 『아무도 아닌』,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 『야만적인 앨리스씨』, 『계속해보겠습니다』, 연작 소설 『디디의 우산』 등을 썼다. 만해문학상, 신동엽문학상, 대산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젊은작가상 대상 등을 수상했다.
단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 365일 중에 298일이나 되는 이 세계는 줄곧 부서져 내리는 섬이고, 이 섬의 한 모퉁이에서 매일 소수점 아래를 정리하며 살고 있다. 그냥 내버려두면 물도 잘 마시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이것저것 만들다가 소설도 쓴다.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지옥 불 같은 물탱크 속에서 방금 사람들이 죽었다. 작가가 일부러 호명한 이름을 일일이 읽고도 그들이 전부 몇 명이었는지 세기 어렵다. 여태 그들의 몸이 뜨겁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이제 막 죽은 몸과 이십 년 전에 죽은 몸과 오십 년 전에 죽은 몸이, 그리고 현실에서 나크바Nakba 이후 칠십팔 년째 그 땅에서 죽어온 몸들이 여태 뜨겁기 때문에. 이 이야기들 속에서 가산 카나파니의 화자들은 신을 향해 반복해 질문한다. 과연 신이 있는지를 물으며 어째서 그가 여기 부재하는지를 묻고, 그들의 이야기를 읽는 우리는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지를 묻는다. 알고자 하는 사람은 알고 모르고자 하는 사람은 모르는, “왜, 왜, 왜.” 가산 카나파니의 이야기가 시작된 그 땅엔 이미 ‘왜’라는 질문이 남아 있지 않다. 물탱크 바깥에 선 우리가 순진하게 그것만을 묻는 동안 팔레스타인 땅에 쏟아진 이스라엘의 폭력은 추방에서 말살로 이동해왔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신을 향한 질문은 이제 마지막 남은 질문이 되어 사람인 우리 양심에 메아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까? 바로 이 순간에?
꽤 오래전부터 선생을 알아 왔다. 고백한 적은 없지만, 선생을 이룬 것 중에 내가 은밀하게 샘내는 것이 있다. 선생의 대관령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게 있다고 해도 선생처럼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선생은 선생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대관령을 말한다. 삶과 죽음을 나누고, 잇는 것. 한 번도 넘어보지 못한 자와 기어코 넘어가 버린 자를 가르는 것. 다시 한번 선생은 그곳을 부지런히 넘어 선생만 쓸 수 있는 이야기를 썼다. 한밤 한낮에 선생이 이 이야기를 어떻게 썼을까를 생각할수록 서둘러 읽을 수가 없었다. 거의 모든 문장을 소리 내 읽기를 권한다. 선생이 그렇게 썼을 것이다. 선생은 공들여 쓴 바른 문장으로, 일과 사람의 전후 사정을 정확한 바둑처럼 똑, 똑, 제자리에 놓는다. 조바심도 숨이 넘침도 없다. 인간을 두루 살피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한 편을 읽고 나면 누군가 소설 바깥으로 빠져나온다. 이 소설을 읽은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연희일 수도, 유강표일 수도, 시라키 레이일 수도, 길 아저씨일 수도 있겠다. 내게는 ‘누이들’이었다. 연희를 비롯한 그 시대의 딸들. 누나들. 소설에서 빠져나왔다기보다는 현실에서 소설로 들어간 사람들. 그보다는, 소설이라는 탁한 거울에 잠시나마 얼굴을 비춘 사람들. 변변치 못한 이 추천사 말미에라도 꼭 그녀들을 말해두고 싶었다. 그녀들에게도 삶이, 너무 지나가 버리지는 않았기를. 부디.
진학할 때까지, 육년이나. 정말 맛있었지. 특별하게 화려한 반찬도 없었는데. 도대체 비결이 뭐냐고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순자씨는 나를 한번 쓱 바라보더니 연륜,이라고 대답했다. 나이를 말하는 거냐고 묻자 단순하게 그런 것은 아니라고 그녀는 말했다. 새끼를 먹여본 손맛이지, 그런 연륜, 하고 그녀는 덧붙였다. 그렇구나. 하고나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