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을 읽으면 장르를 흔드는 떨림 같은 것을 경험하게 된다. 소설인데 시도 있고, 에세이도 있고, 자서전도 있다. 역사인가 하면 신화이고, 신화인가 하면 다큐멘터리다. 박주연의 소설 『어리』가 그렇다. ‘제주 4·3’과 개발독재시기의 폭발음을 배경으로 한라산 소녀 ‘어리’의 성장통을 다룬 이 소설은 ‘검은 돌 무더기 위에서 하얗게 빛나는 노루뿔’의 상징을 제주의 역사뿐만 아니라 근대성의 한복판에 화두처럼 올려놓는다. 그리하여 ‘4·3’의 상처를 간직한 ‘진우’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어리’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의 이야기가 된다. 모계 신앙의 생태적 전통과 우애의 공동체들이 보여주는 공동선, 원형적인 감각과 절묘한 방언적 글쓰기는 소설을 읽는 또다른 재미다. ‘어머니가 내 이름을 부르자, 나뭇잎들이 일제히 흔들리며 대신 대답했다.’ 고통스러운 기억 가운데도 생명의 호흡을 잃지 않는 이 경이로운 시원을 향해 나도 나뭇잎이 되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