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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가 선생님
2. 새로운 스승들 3. 일본에서 벌인 활동 4. 해방이 될 때까지 5. 분단이 불러온 전쟁 6. 동래 수곡과 천하정 제자들 7. 3·4월 민족항쟁과 민족통일운동 8. 민족일보와 수감생활 9. 그리운 가족 10. 마지막 남은 힘까지 특별 부록. 깊이 보는 역사/ 이종률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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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3월, 종률은 공학회 결성에 참여하였다. 공학회는 처음 만들어진 사회과학연구 학생단체로 ‘공동의 힘으로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공동의 단결로 일제의 식민지교육에 반대한다.’는 기치를 내걸었다. 항일 학생운동단체인 공학회가 만들어지자 유심히 지켜보던 종로경찰서에서 종률과 권혁을 불렀다.
--- p.26 1년 가까이 구금되었던 종률이 풀려났다. 종률은 새로 합류한 동료들과 사회실정조사소 일을 다시 시작하였다. 그와 함께 이러타사도 설립했다. ‘이러타’는 ‘이렇다’는 말이었다. 사회실정조사소가 나라 안팎의 자료를 수집하고 외국의 책과 자료를 번역하는 연구소라면, 이러타사는 그 결과를 『이러타』라는 책으로 펴내는 출판사였다. 종률은 양쪽 일을 다 보았다. 『이러타』 일은 거의 혼자 책임지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런 종률을 사람들은 ‘이러타!’라고 불렀다. --- p.45 종률은 한국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제국주의 침탈로 발생한 민족문제임을 확실히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종률은 자신의 생각을 책으로 펴냈다. 대학에서 강의를 맡아 ‘민족혁명론’을 펼치기도 하였다. 민주일보의 주필로도 활동했다. 민족의 위기 앞에서 종률은 힘닿는 대로 자신의 역할을 해나갔다. --- p.64 ‘수요산언’은 정치 현안에 대한 시사 칼럼이었고, ‘백만 독자의 정치학’은 정치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글이었다. 독자들은 신문을 통해 종률의 강의를 듣는 셈이었다. 그는 영향력 있는 필자들이 신문사에 많이 들어올 수 있도록 힘썼다. 소설가 이병주도 그의 추천으로 논술위원으로 활동했다. 종률은 대구의 영남일보의 논설위원과 편집국장을 맡기도 했다. --- p.76 그러나 현실정치의 벽은 매우 높았다. 종률은 선거에서 떨어졌다. 총선거에서 종률만이 아니라 진보진영 후보들은 대부분 떨어졌다. 의지는 높았지만 그것만으로 선거에서 이길 수는 없었다. 선거운동에 참가했던 많은 청년 자원봉사자들은 흩어지지 않고 민민청 회원이 되었다. 민민청 조직은 더 커지고 단단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통일에 높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선거는 졌지만 완전한 실패는 아니었다. 종률은 통일논의가 활기를 띠는 것이 더없이 반가웠다. --- p.86 서울로 간 종률은 신문사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신문사에서 일하는 여러 선배를 만나 조언을 듣고 편집국을 어떻게 꾸릴 것인지 계획을 세웠다. 신문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여러 차례 토론도 하였다. 대중일보와 민족일보 두 가지 의견이 팽팽했다. 드디어 종률이 제안한 ‘민족일보사’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등록하였다. --- p.93 종률은 인간의 땅에도 나무를 심고 싶었다. 민족과 인간을 위한 나무를 심고 싶었다. 그 나무의 뿌리가 내리고 둥치가 자라고 열매를 맺게 하고 싶었다. 종률은 나빠지는 건강을 무릅쓰고 ‘정치학계에 남겨두는 선교공남 난고’라는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종률은 하루하루 힘들여 글을 써나갔다. 갇혀있는 몸이라 자료를 구하기도 힘들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 p.111 종률은 우리 민족이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통일민주조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믿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새로운 세계사 체제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를 위한 일이 민족혁명, 인간혁명이라고 생각하였다. --- p.117 1968년이었다. “이종률 선생님. 이번에 제가 개운중학교와 웅상학원을 사들였습니다.” 종률을 잘 따르던 청년 채현국이 종률에게 말했다. “교육 일을 해 보려는가.” “제가 하려고 산 게 아닙니다. 선생님이 맡아주십시오.” “뭐라고? 자네 아버지와 의논한 일인가?” “아버지한테 말씀드렸더니 제 뜻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채현국은 남몰래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 p.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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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적이고 진보적인 민족사회를 위해 헌신한
산수 이종률의 발자취를 조명하다 산수 이종률(1902~1989)은 한국 근현대사의 대표적인 민족사상가이자 이론가이다. 1925년, 국내 최초의 사회주의 학생모임 ‘공학회’ 대표를 맡았고 이후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해 신간회 동경지회 활동을 했으며 1931년에는 기관지 [이러타]를 창간해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아 운영했다. 창간 1년 만에 전국 28개 지역에 지국을 설치하는 성과를 이루지만, 일제의 악랄한 탄압과 고문에 시달리며 복역 생활과 출소를 끊임없이 반복해야만 했다. 해방 후에도 분단을 막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지만 6·25전쟁이 한반도를 덮치며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전쟁을 통해 민족의 단결과 통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더욱 깊이 깨달았고 전쟁 후에는 부산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부임해 후학들에게 민족주의에 대한 중요성을 강의하는 한편 활발한 언론활동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전파했다. 독립운동부터 정치사회, 언론, 통일운동까지 한평생 조국 통일과 민족 평화를 꿈꾸다 이종률은 일제 강점기부터 8·15광복, 4·19혁명 등 한국 사회가 커다란 변화의 물결을 맞이할 때마다 그 중심에서 서 있었다. 항일혁명운동, 단독정부 반대 투쟁, 자주적 통일 운동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조국 통일과 민족의 평화를 위해 온몸으로 맞섰다. 또한 학문과 사상을 정립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으며 다수의 저작물을 남겼다. 이종률 선생의 일생을 살펴보다보면 곳곳에서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인물들과 만나게 되는데 함께 민족일보를 창간했다가 박정희에 의해 사형 당한 조용수, 개운중학교과 웅상학원을 맡아달라고 찾아온 청년 채현국 등이 그들이다. 산수 이종률 선생은 1989년, 오랜 수감 생활과 고문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자택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오랜 시간 자신을 찾아오는 학생 및 젊은이들과 교유하며 자신의 이론과 사상을 가르쳤다. “민족주의를 버리면 밖에서는 국제침략세력이 들어오고 안에서는 또다시 6·25 같은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 본문 中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획한 [인물로 만나는 부산정신] 시리즈, 그 네 번째 이야기 도서출판 호밀밭과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박재혁, 박차정, 안희제, 이종률, 최천택까지 총 5권으로 구성된 [인물로 만나는 부산정신] 시리즈를 기획했다. 개성고등학교 출신 박재혁 의사는 부산경찰서 폭파 의거를 통해 3.1운동 이후 침체된 독립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다시 살려놓았고, 박차정 여사는 남편인 의열단 김원봉 단장과 함께 평생을 바쳐 민족과 여성의 해방을 위해 싸웠다. 백산 안희제 선생은 교육과 무역, 언론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일제에 항거했고 산수 이종률 선생은 자주적이고 진보적인 민족혁명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으며 박재혁 의사의 오랜 친구였던 최천택 선생은 숱한 고문과 고통 속에서도 죽는 날까지 일생을 조국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