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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내며
1부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메시지 방귀가 선물이 되는 순간 “나, 누나 좋아해요”의 현상학 가독성의 본질은 ‘쉬움’에 있지 않다 어른의 신 기계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얕은 도덕과 깊은 도덕이 있을 뿐 악이 아니라 악인부터 시작하자 소수파의 말하기 2부 명사에서 동사로 사상은 언제 부활하는가? 어른이란 자립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상식에 대해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동사로 살기가 빠지기 쉬운 함정 교양 재생 프로그램 과거는 가변적이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역사 공부는 연대표 외우기부터 계속하는 힘 동사로서의 종교 가끔은 명사적 사고가 필요하다 3부 몰역사적 개체에서 사회문화적 사이보그로 마리는 과연 요리를 만들었을까? 허구와 현실의 다툼 사회문화적 사이보그인 나 남성/여성은 사회문화적 사이보그와 관계없죠? 24초 룰이라는 디자인된 현실 계산하는 생명 아빠, 그럼 지금부터 점심밥 먹자! ‘일상’에서 ㄹ을 뺄 수 있다면 |
박동섭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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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아역으로 등장하는 미노루와 오사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영어 선생님과 고모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의 진짜 목적은 유용한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메시지의 증여와 답례를 통한 공동체의 구축(사랑을 나누는 실천 공동체)이다. “어디에 가시는 길인가요?”라고 묻는 사람은 목적지를 묻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 가시든지 당신의 걸음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같은 축복의 말을 선물하기 위해서다. 이 물음에는 고마움을 담아서 “니시긴자에 갑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p.18~19 레비나스는 신의 침묵을 신의 피조물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라는 메시지로 바꾸어 읽었다. 이런 읽기는 목숨을 건 도약이라고 할 정도의 논리적 곡예다. 그런데 레비나스의 말은 그 후 넓고 깊게 유대인 사회에 침투했다.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던 배교의 움직임이 레비나스의 연설을 계기로 딱 멈췄다. ‘신은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은 우리를 믿고 있었다’는 레비나스의 해석에 유대인들은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울부짖음을 멈추고 잠자코 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p.39 우치다 타츠루는 진리론자와 달리 모성애는 단지 환상 혹은 픽션에 불과하다고 쿨하게 인정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픽션이기 때문에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 말한다. 우치다 타츠루는 연출가로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자신의 내면에 모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틀렸고, 밖에서 가져다가 연기하는 거예요. ‘아무리 해도 아이가 예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여성들이 있는데 당연하지 않나요? 해보면 알잖아요. 어떤 여성을 딱히 좋아하지 않더라도 ‘사랑해’라고 계속 말하다 보면 여성 쪽에서도 그런 것 같고, 말을 하는 사람도 그렇게 되잖아요. 상대가 기분이 좋아져서 잘해주니까 관계가 좋아지고요.” 연출가는 모성애가 일종의 환상 혹은 픽션이라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다. 그런데 모성애를 분석적으로 보는 일에 너무 몰입하면, 마음을 빼앗긴 관객(아이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긴 부모)만이 환시하는 극적 세계(아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연스럽게 생겨난 모성애)를 놓칠 가능성이 있다. --- p.108~109 우리 인간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기억을 재구성합니다. 과거의 기억은 전혀 때 묻지 않은 채, 혹은 불멸의 실체(명사)로 뇌 안에 저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그때그때 소환되어 만들어집니다. 인간 지성은 시간을 역행해서 과거에 입력된 데이터를 창조할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경험하지 않았던 것, 몰랐던 것을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어땠는지에 관한 모조기억을 편집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시간 속을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하지요. 하지만 인공지능은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인공지능은 ‘무시간 모델’입니다. 인공지능은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는 무진장의 데이터를 한순간 모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즉 수평 방향으로 자유자재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직 방향으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데이터를 떠올리거나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 지성과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 p.148 후쿠이특수학교라는 실천 공동체에 사는 아이들에게 만약 다른 실천 공동체의 산물인 능력이라는 필터를 갖다 대면 거의 모든 항목에서 안 되는 것들뿐이다. 근대의 산물인 능력이라는 필터를 벗어던지기 위해서는 ‘이것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고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능력은 근대 사회가 다양한 상품을 특정한 생산 방식(벨트컨베이어)으로 교환 가능하게 제조하는 과정에서 편의상 구성한 시스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확고부동하게 여기는 신념과 달리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 p.190 그럼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떨까? 딸이 유치원을 다닐 무렵 외할머니가 오랜만에 우리 집에 오기로 한 날, 아침밥을 먹으면서 나눈 대화다. “오늘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놀러 오신대.” “와! 언제쯤 오시는데?” “음……그러니까 경령이가 점심 먹고 나서 조금만 있다가, 그때 오실 거야.” “아 진짜? 아빠, 그럼 지금부터 점심밥 먹자!” “?? ㅎㅎ.” 스스로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처럼 지금이라도 당장 점심을 먹을 기세로 바쁘게 움직이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외할머니가 계신 소호(울산광역시 울주군 소재)에서 우리 집이 있는 부산까지 버스로 1시간 40분 정도 걸린다든지, 지금은 아침 8시라든지, 외할머니가 오시는 시간은 오후 1시라든지는 딸에게 통하지 않았다. 딸의 시간은 숫자라는 사회문화적 도구에 의해서 아직 구조화되어 있지 않았다. 딸은 아직 시간 감각을 내면화한 사회문화적 사이보그가 아니었다. --- p.252~2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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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적 사고’를 만나다
“계몽은 동사에서 명사를 잉태시켰으나 엉덩이가 무거워진 명사들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 동사를 깔아뭉개고 있었다.”, “명사, 혹은 명사적 사고만큼 인류사를 집요하고 지속적으로 지배했던 발명은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동사로 살다』는 철학자 김영민이 쓴 이 두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저자 박동섭은 김영민의 『컨텍스트로, 패턴으로』에서 명사적 사고, 동사적 사고라는 말을 우연히 접했다. 처음에 이 명제는 물론이거니와 책의 내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생소한 어휘꾸러미와 낯선 논리 전개 때문에 한 쪽 읽는 데 한나절 걸린 적도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어로는 한 번도 읽어본 적 없는, 일종의 천둥소리 같은 예지의 말을 청취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성 들여 듣고 온몸으로 음미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말이 갑자기 세계의 벽을 뚫고 다가온 듯했다 박동섭은 비고츠키 심리학과 그로부터 파생된 사회·문화·역사적 접근, 그리고 상황학습론(Situated Learning) 등에 기초한 질적심리학, ‘담화심리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다. 최근에는 파슨스와 뒤르켐 등의 규범 사회학을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학을 창시한 해럴드 가핑클의 에스노메소돌로지(Ethnomethodology) 연구도 병행한다. 그는 비고츠키 심리학을 만난 뒤, 마음을 일종의 고정된 실체로 간주하는 주류 심리학이 채용하는 진리라는 이름의 박제된 절대주의로부터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노력했다. 마음은 기껏해야 우리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는, 진리의 다른 극단인 무리(無理)로 치닫는 무책임한 상대주의에 보기 좋게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능력, 장애, 마음은 모두 환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공고히 하는 쪽으로 달렸다. 이러한 편협함은 극단적인 사고(진리 혹은 무리) 말고 제3의 사고(일리)가 있다고 역설한 김영민의 ‘일리의 철학’과 만나면서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동사로 살다』는 명사적 사고에서 동사적 사고로 나아가는 지적 여정에 관한 자기 고백이다. 허위상식 뒤집기 『동사로 살다』는 대학 강단을 떠나 독립연구자로 사는 박동섭의 첫 철학에세이다. 일상 언어와 학술 언어의 경계를 쉴 새 없이 넘나들며, 우리가 흔히 상식이라고 말하는 것들의 뒤집기를 시도한다. 한마디로 ‘허위상식 뒤집기’다. 김영민, 우치다 타츠루, 레프 비고츠키, 에마뉘엘 레비나스, 해럴드 가핑클 등의 사상을 지나며 저자가 발견한 우리 시대의 가장 큰 허위상식은 ‘명사적 사고’다. 명사적 사고란 ‘객관적 사실이 실체(명사)로서 존재한다’는 사고다. 김영민은 『철학과 상상력』에서 이렇게 정의한다. “‘어디에 쌓아 둔다’는 발상이 가능한 소이(所以)는 인간을, 그리고 특히 정신(mind)을 장소적, 공간적인 개념으로 오인한 데 있다. 데카르트가 정신의 본성을 ‘사유하는 실체’라는 말로써 파악하려 했다는 고전적인 인용을 재론하지 않더라도 실상 ‘무엇을 담아 놓을 수 있는 상자’ 같은 것으로 마음을 영상화, 공간화시키는 태도는 일상인들이 ‘마음’에 대해 갖는 기초적인 상상력을 지배한다. 그러나 마음을 상자같이 꽉 막혀진 어떤 것(something)으로 보는 소위 ‘명사적 사고’(Nounal mode of thinking)는 무슨 실험과 검증을 거쳐 밝혀낸 생리학적인 탐구 결과가 아니라 잘못된 유비관계(analogy)가 빚은 시각적인 오류에 가깝다.” 이러한 명사적 사고는 생각보다 우리 일상을 깊고 넓게 지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자립”, “자립” 쉽게 말한다. 하지만 자립은 단지 타인으로부터 독립해서 생계를 꾸리거나, 혼자서 빨래하고 요리하고 청소하는 것과 다르다. 정해진 수입이 있어서 집세를 내는 것은 자립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우리는 뭔가에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이것은 ‘사실’이다. 동시에 우리는 자기책임으로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것은 ‘이념’이다. 그러고 보면 사실과 이념은 모순이다. 이 모순되는 요청을 잘 절충하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자립은 홀로 서면서도 의존하는 양상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자립한 사람은 “아, 이 사람은 자립하고 있구나. 정말 훌륭하다. 대단하다”와 같은 주위 사람들의 승인과 경의를 버팀목 삼아 서 있는 존재이지, 혼자서 공중에 붕 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쉽게 말하면 자립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늘 뭔가를 부탁받고, 조언자로서 해야 할 역할을 의뢰받고, 의논할 일이 생겼을 때 찾아갈 수 있다. 이처럼 자립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바꾸어 말하면, 자립은 관계 속에 몸과 마음을 두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박동섭은 오랫동안 인류가 이렇게 실체에 붙박인 삶을 살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으니, 이제는 관계(동사) 중심으로 전환하자고 제안한다. 관계와 실체를 오가는 삶 “인간(人間)이라는 말을 적확하게 풀면 ‘사람과 사람 사이’다. 여기서 방점은 사람(개인)이 아니라 ‘사이’에 있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말은 ‘나(명사)’라는 존재가 아니라 나와 너 사이의 움직임(동사)을 가리킨다. 무인도에서 “나는 인간”이라고 아무리 소리쳐 보시라. 나를 불러주는 사람이 없으면, 내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너와 나 ‘사이’가 없으면 나는 인간일 수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 나와 너 ‘사이’, 나와 타자 ‘사이’를 사는 것, 사이를 묻는 것, 사이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인간 삶이다. 그리고 그 사이는 오로지 행위(동사)로써 가로지를 수 있다.” 황경민 시인의 이 글만큼 ‘동사적 사고(삶)’에 관한 단순명쾌한 정의는 없어 보인다. 물론 요즘엔 명사에서 동사로 급격하게 운전대를 돌린 사람들, 즉 오로지 동사적 삶이 최고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The Death of Truth)』를 쓴 미치코 가쿠타니(Michiko Kakutani)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파괴한 대표적인 것으로 “언어에 대한 신뢰”를 꼽는다. 이 책에 따르면, 데리다 철학을 미국에 도입한 몇몇 포스트모더니스트는 텍스트를 “불안정하고 환원 불가능할 정도까지 복잡하며 독자와 관찰자에 따라서 점점 가변의 의미가 부여”되는 것으로 보고, 텍스트 해석에서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선포했다. 이 세상에 객관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세계 인식은 각각의 주관적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원리적으로 맞다. 즉 ‘앎’으로서는 타당하다. 우리는 객관적 사실보다 주관적 바람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세계가 이랬으면 좋겠다’는 욕망은 ‘세계는 이런 것이다’라는 인지를 늘 압도한다. 사회문화적 사이보그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만인은 객관적 실재 같은 것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망상 속에서 평온을 즐길 권리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아무리 봐도 비상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객관적 사실은 실체(명사)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한층 진화된 앎의 차원에서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 여기서 말하는 한층 진화된 앎의 차원은 명사적 사고에서 동사적 사고로의 진화를 뜻한다. 그런데 이 동사적 사고라는 앎이 폭주하면 비상식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도' 아니면 '모' 식의 사고 또한 경계해야 한다. 명사적 사고의 폐해가 크다고 해서 우리가 최종적으로 당도해야 할 목표가 동사적 사고인 것은 아니다. 우리를 진짜 성숙으로 이끄는 힘은 ‘관계(동사)와 실체(명사)를 오가는 바지런하고 느릿느릿한 삶’이다. 명사적 사고에서 동사적 사고로 진화는 하나의 앎에서 다른 앎으로 갈아타기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러나 둘 사이의 왕복운동은 다른 앎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삶 그리고 몸이 성숙하는 도정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관심의 집적과 새로운 지평에의 참여가 왕복운동을 가능케 한다. 우리의 삶과 깨침에 따라 다른 경지와 지평이 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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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人間)이라는 말을 적확하게 풀면 ‘사람과 사람 사이’다. 여기서 방점은 사람(개인)이 아니라 ‘사이’에 있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말은 ‘나(명사)’라는 존재가 아니라 나와 너 사이의 움직임(동사)을 가리킨다. 무인도에서 “나는 인간”이라고 아무리 소리쳐 보시라. 나를 불러주는 사람이 없으면, 내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너와 나 ‘사이’가 없으면 나는 인간일 수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 나와 너 ‘사이’, 나와 타자 ‘사이’를 사는 것, 사이를 묻는 것, 사이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인간 삶이다. 그리고 그 사이는 오로지 행위(동사)로써 가로지를 수 있다. 『동사로 살다』는 그 사이를 탐구하고 묻고 답하고, 다시, 묻고 있다. - 황경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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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섭 선생은 세계에서 단 한 명뿐인 우치다 타츠루 연구자입니다. 그는 스스로 “우치다 타츠루가 쓴 글은 우치다 타츠루 이상으로 읽고 있다”고 단언합니다. 정말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글은 저의 사상을 단지 기술한 것이 아닙니다. 저의 사상과는 색깔과 결이 다른 그의 창작품입니다. 박 선생이 자기 사상과 문체를 구성하는 데 부분적이라도 저의 생각이 버팀목이 되었다면 아주 영광입니다. - 우치다 타츠루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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