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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지은이 서문 19
서론 : 반노예제 선각자 24 1장 초기 생애 38 코퍼드 : 평민[공통인] 39 퀘이커교도 45 포덤 : 양치기 52 콜체스터 : 장갑 제조공 54 런던 : 선원 56 2장 “싸움꾼 투쟁가” 65 런던, 1714년~1718년 66 바베이도스, 1718년~1720년 71 런던, 1720년~1722년 76 콜체스터, 1722년~1726년 78 콜체스터, 1729년~1732년 90 3장 필라델피아의 “유명인들” 96 공동체 100 되돌아본 노예제 105 샌디퍼드 찾기 108 “대죄” 112 게릴라 연극 115 자격 논쟁 118 사라의 죽음 121 되돌아온 싸움꾼 123 4장 배교자가 된 노예 소유자들 129 기원 132 움직임 140 예언 152 5장 책과 새로운 삶 165 율법 폐기론 168 견유 철학 174 언론의 자유 183 행복에 이르는 길 188 땅으로 돌아가기 194 새 예루살렘 197 6장 죽음, 기억, 영향 200 힘을 잃은 선지자 207 “유명인들”과 다시 한번 맞붙다 218 영향 222 결론 : 커다란 오크나무 232 지은이의 말 246 감사의 말 249 약어표 253 날짜에 관한 알림 255 옮긴이 후기 256 후주 259 인명 찾아보기 292 용어 찾아보기 296 도판 출처 303 |
Rediker, Marcus Buf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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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은 혁명가였습니다. 그는 1640년대 영국 혁명에서 자주 인용되는 성경 구절을 따라, “세상을 뒤집고자” 했습니다. 이 말에는 왕과 왕비, 부유한 신사, 노예 소유주, 대주교, 그리고 모든 종류의 억압자들의 통치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요구가 담겨있습니다.
---「한국어판 지은이 서문」중에서 벤저민은 퀘이커 교리를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고 서로 연관도 없을 것으로 여겨지던 폐지론과 채식주의, 동물 권리, 사형 반대, 환경주의 그리고 소비 정치와 같은 다른 급진적 사상 및 실천에 조합했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3분의 1을 동굴에서 자기 먹거리를 재배하며 자기 옷을 지어 입고 살았다. ---「서론 : 반노예제 선각자」중에서 벤저민은 자신의 항해 지식을 활용해서 노예무역상을 살인자 계급으로 고발했다. 그는 아마도 그런 일을 한 첫 번째 인물이었을 것이다. ---「1장 초기 생애」중에서 그는 산업화한 설탕 생산 도중에 일어나는 끔찍한 사고도 보았다. 노예들이 난도질당하며 잘린 신체의 일부가 끓고 있는 설탕통 속에 떨어지면서 결국 설탕에 “사지와 창자 그리고 배설물까지” 함께 들어갔다. 농장 생산의 엄청난 폭력성에 관해 누구도 사회운동을 벌이고 있지 않았던 예전 시기에 벤저민은 이미 “설탕이 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2장 “싸움꾼 투쟁가”」중에서 그는 여자 노예들이 “빨래, 청소, 걸레질, 요리를 아주 꼼꼼하게 잘 해내고 재봉질, 뜨개질, 바느질도 시키면 척척 해내는 모습과 다른 곳에서는 우유를 짜고 저어 치즈를 만들기도 했고 집 안팎의 모든 일상 잡일과 부엌일을 도맡으며”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이처럼 지루한 노동을 노예 소유자들의 비열한 나태함과 대조하여 보여주었다. 그는 노예들의 굶주린 배를 그 주인들의 “게으르고 불경한 배”와 견주었다. ---「3장 필라델피아의 “유명인들”」중에서 벤저민은 이미 있던 논쟁의 범위를 넘어갔다. 그의 독창성은 노예제에 전혀 타협하지 않는 태도에 있었다. 노예 소유는 단순한 죄악이 아니었다. “더럽고”, “추잡하며”, “사악하고”, “섬뜩한” 죄악이었다. 이는 “영혼의 죄”였다. 실제로 “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이었다.” ---「4장 배교자가 된 노예 소유자들」중에서 벤저민은 독학자들이 주로 그러하듯 책을 좋아했다. 그는 만족을 모르고 책을 모으며 읽었다. 독서와 반추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였다. 1732년에 그는 단연코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던 책을 필라델피아로 가지고 왔다. 잠시 쉬기도 했지만, 일생에서 그는 상당한 기간을 서적상으로 일했다. ---「5장 책과 새로운 삶」중에서 벤저민은 대부분의 돈을 “가난한 친구들”에게 남겼다. 여기에 지칭된 두 단어는 매우 중요했다. 그는 양모 생산자, 정원사, 톱장이, 도살자, 제분업자 그리고 직조공과 같은 동료 노동자들을 도왔다. 심지어 그는 콜체스터 퀘이커 매장지의 묘지기이자 모임에서 그를 내던져버렸던 경비 무리였던 사이러스 스콧에게도 돈을 남겼다! ---「6장 벤저민 레이」중에서 요약하자면 벤저민 레이는 계급, 성, 인종, 환경 의식을 가진 채식주의 초(超) 급진주의자였다. 이 책의 독자 대부분은 이러한 신념의 조합이 레이의 놀라운 삶이 끝나고 2세기가 완전히 지난 1960년대는 지나야지 가능하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는 오늘날 착취공장에 맞서는 세계적 운동을 움직이는 원칙을 따라 살았다. 이 착취 공장의 상표가 박힌 옷과 신발은 노동자들이 상품을 생산하는 끔찍한 환경을 가리고 있다. ---「결론 : 커다란 오크나무」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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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사상가, 벤저민 레이
이 책 『벤저민 레이』에서 “아래로부터의 역사가” 마커스 레디커가 18세기의 퀘이커교도 벤저민 레이(1682~1759)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양치기로 일했던 벤저민 레이는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저민 레이는 전 세계적으로 노예제 폐지를 최초로 요구한 사람 중 한 명이 되었으며, 노예제 폐지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책 『무고한 이를 속박해두는 모든 노예 소유자, 배교자들』을 썼고 이 책은 벤저민 프랭클린이 1738년에 출판했다. 레디커는 레이가 선원으로 일하면서 뱃동지들로부터 선상에서 읽고 쓰는 법을 배웠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레이의 책과 삶의 궤적을 좇으며 저자가 발견한 것은 신장 120cm의 작은 거인 벤저민 레이가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였다는 점이다. 그는 1968년 혁명에서 비로소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고 여겨져온 다양한 사회적 쟁점들에 관해서 이미 18세기에 종합적으로 사고한 인물이었다. 레디커는 이에 대해서 레이가 “교차성”을 담지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다는 표현을 쓴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벤저민 레이는 선원 생활, 그리고 바베이도스의 설탕 농장들에서 자신이 목격한 노예제의 참혹한 현실을 바탕으로 인종 문제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노예제의 즉시 폐지를 주장했다. 벤저민 레이는 계급 불평등을 비판했고 가난한 사람들이 주린 배를 움켜쥘 때 자기 배를 채우고 ‘이익을 위해 땅에 독약을 푸는’ 부자와 권력자들의 탐욕을 공격했다. 벤저민 레이는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퀘이커교 집회의 성별 좌석 구분을 흐트러트리며 거리낌 없이 여성 신도들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는 동물권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모든 동물을 인류의 ‘동포’(fellow creatures)로 여겼다. 그는 사람들이 동물을 죽이면 결국 서로를 죽이게 될 것이라는 피타고라스에 동의하면서 비건이라는 말이 탄생하기 200여 년 전에 채식주의자로 살았다. 벤저민 레이는 생태와 환경 문제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동굴에 살며 스스로 먹을 음식을 재배했다. 그는 현대의 소비자 불매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벤저민 레이는 설탕이 아프리카인 노예들의 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예 노동으로 만들어진 어떤 상품의 소비도 거부하면서 설탕을 불매했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벤저민 레이는 담배도 사지 않았고 자신이 입을 옷을 직접 지어 입었다. 자본주의라는 말이 아직 탄생하기 전 시기에 벤저민 레이는 상품 시장을 비판했고 그러한 사상을 노예제에 반대하는 투쟁에 적용했다. 실제로 그의 신념과 요구 그리고 저항은 퀘이커교가 내부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한 최초의 집단이 될 수 있게 이끌었다. 퀘이커교에서는 1776년에 노예를 소유한 사람은 퀘이커교도가 될 수 없다고 공언했고, 여기에는 18세기 초부터 지속한 레이의 반노예제 투쟁이 큰 공헌을 하였다. 하지만 벤저민 레이의 이름은 한국은 물론 영국과 미국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역사는 오히려 노예를 소유하며 그들로부터 이익을 취한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인물을 “위인”으로 기록하면서, 누구보다 앞서서 혁명적 변화를 요구했던 벤저민 레이는 기억하지 않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레디커는 벤저민 레이의 귀환을 요구하고 있다. 마커스 레디커에 따르면 벤저민 레이의 사상은 마키아벨리, 스피노자, 홉스, 그리고 특히 ‘계몽된’ 노예 소유주인 토머스 제퍼슨의 사상과 함께 연구할 가치가 있다. 벤저민 레이의 게릴라 연극 1738년 9월 19일, 뉴저지 벌링턴의 퀘이커교 예배당으로 벤저민 레이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레이는 속이 텅 비어 있어서 물건을 숨길 수 있게 되어 있는 한 권의 책을 품속에 지니고 있었다. 책 속에는 미국자리공 열매의 붉은 즙을 담은 동물 방광 주머니가 들어 있었다. 퀘이커교도들의 예배 분위기는 자유로운 편이었다. 공식적으로 목사도 교회 의식도 없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영혼이 동하면 발언을 하곤 했다. 벤저민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뉴저지의 유력한 퀘이커교도들은 대서양 상거래로 돈을 벌었고 이들 중 다수는 노예 소유자들이었다. 벤저민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노예를 소유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이다!” 예언자처럼 메시지를 전한 벤저민은 코트를 벗어 던지며 숨겨온 칼과 책을 꺼냈고 그의 전투복 차림이 드러났다. 퀘이커교도들은 1660년 이래로 모든 무기와 전쟁을 거부하는 “평화선서”를 받아들였기에 벤저민 레이의 전투 복장만으로도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예배당의 퀘이커교도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벤저민 레이의 퍼포먼스는 절정을 향해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동포를 노예로 삼은 자들이 피를 흘리게 하리라!” 벤저민 레이는 칼을 뽑았고, 책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후 책 사이로 칼을 찔러 넣었다. 붉은 액체가 콸콸 벤저민 레이의 팔 위로 흘러내렸다. 예배당은 혼돈에 휩싸였다. 기록에 따르면 신도들에게 피를 흩뿌린 벤저민은 “동상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머지않아 몇 명의 퀘이커교도들이 120센티미터의 벤저민 레이를 들쳐 매고 건물 밖으로 끌어냈다. 이는 필라델피아, 벌링턴, 콘코드 등 셀 수 없이 많은 퀘이커 모임에서 벤저민 레이가 벌인 게릴라 연극 퍼포먼스 중 하나였다. 노예 소유자들을 공격하는 소동을 일으키기로 악명이 높았던 벤저민 레이는 언젠가부터는 퀘이커 모임에 나타나 앉아있기만 해도 쫓겨날 정도였다. 그러나 벤저민 레이는 비 오는 날에 거리로 내던져진 후에도 예배당 정문의 진흙 바닥에 누워 모임을 떠나려는 자는 누구든 자기를 밟고 가라고 요구할 만큼 완고했다. 벤저민 레이는 노예제의 즉시 폐지를 위해 몸을 던진 활동가이자 예술가였고, 모든 아프리카인 노예들이 해방될 때까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벤저민 레이가 역사에서 배제된 이유는 무엇일까? 벤저민 레이의 사상과 생애는 비범하다. 레디커의 말처럼 그가 시대를 2~300년 앞서간 사상가였음에도 합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마커스 레디커에 따르면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벤저민 레이의 서사가 노예제 폐지에 대한 주류 역사서술의 “하향식” 관점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유명한 폐지론자처럼 “신사 성자”가 아니었고 적절한 교육을 받지도, “계몽”되지도 않았다. 그는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난 평범한 노동자였고 선원이었으며 양치기, 장갑 제조공, 서적상 같은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그렇지만 벤저민 레이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지금까지의 역사서술이 잘못되었거나 적어도 반쪽짜리 그림이라는 것이다. 레디커에 따르면 벤저민의 시대에 교육받고, 계몽되고, 학식 있는 점잖은 사람들은 주로 노예제를 지지했고, 토머스 제퍼슨을 비롯한 많은 이들은 노예 주인이기도 했다. 반면에 17세기와 18세기에 가장 먼저 책을 출판한 노예제 비평가들은 거의 모두가 변변찮은 출신의 노동자들이었다. 벤저민 레이가 그러했고, 그 밖에도 조지 폭스는 신발 제작자의 도제였고, 토머스 트라이온은 양을 치고 모자를 만들었으며, 윌리엄 에드먼드슨과 엘리후 콜먼은 목수였다. 존 헵번은 계약하인으로 뉴저지에 왔고, 윌리엄 사우스비는 배를 건조했으며, 랠프 샌디퍼드는 대해를 항해했고 존 울먼은 천을 재단했다. 이들의 평범하고 고된 노동 생활이 노예들의 처지에 공감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제 폐지운동은 중간계급에 국한된 운동이 아니었다고 마커스 레디커는 쓴다. 두 번째 이유는 벤저민 레이를 “뒤틀린” 인물로 여겨온 편견 어린 시선에 있다고 레디커는 말한다. 120센티미터의 저신장 장애인, 척추 장애인이었던 레이는 괴짜로 생각되었고 그를 “미쳤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당대에도, 후대에도 많았다. 역사가들조차 그의 기여를 인정하면서도 그를 비하하고 조롱했다. 벤저민 레이의 계몽은 함선의 갑판과 노예사회의 부둣가에서 이루어진 아래로부터의 계몽이었고, “세계 곳곳”을 누비며 “모든 유색인과 민족”의 잡색 부대 한가운데서 레이는 역사를 만들어갔다. 벤저민 레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볼테르와 18세기 계몽운동과 같이 고위층과 연관된 반노예제의 역사보다 더 긴 궤적을 가진 “아래로부터의” 폐지론 역사에 속한다고 레디커는 말한다. 진실을 말하는 용기, 파레시아 고대 그리스의 견유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햇볕을 가리지 않게 비켜서 주시오”라고 말한 일화로 유명하다. 디오게네스는 ‘권력 앞에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인 파레시아를 실천했다. 독학 철학자 벤저민 레이는 자신이 거주하는 동굴에 이백여 권의 장서가 있는 서재를 갖추고 있었고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을 탐독했다. 디오게네스도 벤저민 레이가 열정적으로 읽은 사상가 중 한 명이었다. 레이는 디오게네스와 마찬가지로 당시 현실에서 결코 쉽게 행할 수 없는 행동을 실천하고 권력자를 비판하는 용기를 보였다. 그는 노예제가 당연시되던 시기에 권력을 지닌 사람에게 맞서며 노예제의 즉각적인 폐지를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는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레이는 퀘이커교 모임에서 네 번 파문을 당하는 불명예 속에서도 굽히지 않았고 저항을 이어갔다. (2018년에 벤저민 레이는 자신을 파문했던 네 개의 퀘이커교 집단에서 “복위”되었다.) 그의 전복적 요구에 두려움을 느낀 권력자들은 억압자로 돌변하여 그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벤저민 레이는 동료 퀘이커교도들에게 “당신은 어느 편인가?”를 물으며 노예제의 편인지 노예제에 맞서는 편인지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레디커에 따르면 그 시대에 지구상에서 가장 급진적인 사람임이 분명했던 벤저민 레이의 조언, “이득을 위해 세상에 독약을 푸는 부유한 자들을 경계하라”는 외침은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절실한 울림을 갖는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