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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_한국, 아시아, 그리고 전길남이라는 이름
1장 한국행을 결심한 자이니치 소년 사이렌 소리 수영선수의 꿈 러셀, 아인슈타인, 그리고 수학의 매력 운명처럼 마주친 사건 만나고 싶은 나라 내가 선택한 곳 일본 이름을 버리고 2장 NASA에서 배운 시스템공학 시스템 엔지니어링 박사 보이저 계획에 투입되다 NASA를 성공으로 이끈 시스템 시스템 차원에서 생각하는 훈련 3장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터넷을 구축하다 마침내 고국에서 인터넷 혁명이 시작된 날 무모한 도전 네트워크의 산실 불모지에서 탄생한 신기술 선진국을 추월한 후발 주자 차별 없는 접속 인터넷의 폭발적 성장 초고속 인터넷 프로젝트 4장 최상의 연구 시스템을 만들다 최고의 교육은 최고의 환경에서 연구를 위한 필수 조건 한 장 요약 특혜와 의무 비용 절감보다 중요한 것 스트레스 밸런싱 5장 벤처의 산실이 된 연구실 존경은 있어도 학맥은 없다 벤처를 독려한 이유 벤처의 산실 온라인 게임 서비스의 탄생 비화 세상에 없는 새로운 것 6장 도전의 의미를 묻다 오래 품어온 강렬한 꿈 등반가의 삶 악우회와의 만남 마테호른 북벽 등반 불가능에 대한 도전 암벽 추락 사고 인생의 본질을 생각하다 7장 모두를 위한 네트워크 세계가 더 주목한 사람 인터넷 보급의 선도자 아시아넷의 탄생 아시아에서 전길남이라는 존재 약자에 대한 배려 공정한 게임의 규칙 8장 기술의 고삐를 누가 쥘 것인가 인터넷 기술과 사회 문제 기술공학자의 역할, 사회과학자의 역할 전문성과 사명감 지속 가능한 인터넷 기술에 대한 통제 아시아 인터넷의 역사를 기록하다 9장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어나간 삶 아이디어와 함께 잠자리에 들다 객관적 인식에 투철한 현실주의자 ‘공정한 기회’에 대한 집착 이방인의 한국 생활 ‘재가수도자’ 시스템 엔지니어 부록 대담 1. 인터넷과 인공지능의 미래 - 전길남, 구본권 대담 2. 인공지능 시대, 과학 교육과 과학연구 - 전길남, 정재승 글을 맺으며 전길남 연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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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길남은 5분 뒤 있을 연설을 위해 연설문 초안을 읽으면서 연습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문장을 읽는데, ‘우리 나라’라는 말이 도저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채 주검으로 발견된 김주열 군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생생한 김주열 군의 모습 앞에서 ‘우리 나라’라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부정 선거에 항의해 분연히 일어난 어린 학생들이 희생을 치른 한국을 두고 일본을 ‘우리 나라’라고 말할 수 없음을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몸이 느낀 것이다.
--- p.41 시스템 엔지니어링은 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른 통제를 통해 최적의 해결 방안을 찾는 분야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목표와 과정을 예측하고 관리하는 것이 핵심이다. 개인의 탁월함이나 열정에 맡긴 뒤 사후에 평가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세우고 그에 이르는 길을 통제하면서 목표에 접근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이를 위해서는 전체 과정을 최대한 객관화하고 수학적·과학적 방법을 통해 조작할 수 있게 만들고 단계별 성공 가능성을 확률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예측과 통제가 가능하다. --- p.75~76 도전은 험난했다. 훈련된 전문 인력과 지식은 물론 기본적인 장비도 없었다. 우선, 미국에서 IMP를 구할 수 없었다. IMP 없이는 TCP/IP 연결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미국은 IMP를 수출 금지 전략 물자로 지정해 해당 기술을 통제했다. 그래서 전길남은 하드웨어인 IMP를 기능적으로 대신할 수 있는 라우터를 구성해보기로 했다. 다행히 1981년 미국의 통신 기기 회사인 쓰리콤(3Com)이 TCP/IP 패키지 소프트웨어인 UNET을 개발해 판매에 나섰는데, 구입이 가능했다. 나중에 시스코에서 상업용 라우터를 만들었지만, 그 이전에 소프트웨어로 라우터를 구현한 것이다. --- p.89~90 전길남이 SDN을 운영한 방식은 독특했다. SDN은 연결을 희망하는 국내 각 대학과 연구소에 문호를 개방했다. 전길남 연구실은 최초로 유닉스 운영 체제를 설치하고 TCP/IP 네트워크를 구축한 노하우를 살려 설치를 원하는 각 대학과 연구소를 지원했다. 처음이 힘들고 어렵지, 일단 길이 만들어지면 한결 수월하다. 거의 도움 없이 매뉴얼을 독학해 스스로 TCP/IP 연결이라는 길을 개척한 전길남과 대학원생들의 노하우 덕에 각 대학과 연구소들은 어렵지 않게 노드에 추가되었다. 박사 과정 학생이던 허진호와 박현제 등은 마그네틱 테이프를 들고 SDN 연결을 원하는 대학에 찾아가 설치를 지원해주거나, 문의가 오면 구체적인 노하우를 전수했다. 각 대학 전자계산소와 컴퓨터공학과가 관심을 갖고 하나둘 참여하기 시작해 1985년 5월에는 20여 곳의 대학과 연구 기관이 전용선 또는 공중 전화망을 이용한 다이얼업 방식으로 SDN에 연결되었다. --- p.95~96 “전 박사, 그걸 2개의 별도 프로젝트로 꾸미면 어떡합니까? 그렇게 해서는 백날 신청해도 통과되기 어렵습니다. 하나의 프로젝트로 묶어서 제안하는 게 좋습니다. 정부의 연구 프로젝트 심사라는 게 결국은 제한된 예산을 집행하기 위해서 불요불급한 프로젝트를 잘라내는 과정입니다. 둘이 분리된 프로젝트면 둘 중 하나만 지원하고 하나는 죽이기 얼마나 쉽습니까? 만약 이게 꼭 해야 하는 프로젝트라면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에 결합시켜서 제안하세요. 정부가 국산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는 절대 탈락시킬 수 없을 테니까요.” 한국 물정에 어두운 전길남에게 어떻게 해야 네트워크 연구 프로젝트에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정치적 방법’을 알려준 것이다. --- p.102 컴퓨터 네트워크 연구 개발에 대한 정부 지원은 일 년으로 끝이었다. 개발을 제안하고 주도한 전길남은 그해 전자기술연구소를 떠나 카이스트로 옮겼다. 서울과 구미 사이에 연결된 TCP/IP 네트워크가 테스트만 통과한 뒤 방치되거나 망실될 수 있는 여건이었다. 하지만 정부 지원이 일 년짜리로 끝나고, 전길남이 카이스트로 옮긴 게 결과적으로는 도움이 되었다. 천대받던 컴퓨터 네트워크 연결이 전길남과 그의 연구실인 카이스트 시스템구조연구실 대학원생들이 도맡는 ‘비정부’ 프로젝트가 되었기 때문이다. --- p.110 SDN 이용자가 늘면서 통신료 부담도 증가했다. 대부분 미국과 유럽 등으로 UUCPNet을 연결한 국제 전화 요금이었다. 1983년 첫해 50만 원이던 요금이 일 년 뒤인 1984년에는 2,400만 원으로 50배 가까이 급증했고, 1986년 무렵에는 국제 전화 요금이 4,000만 원, 1988년에는 6,700만 원 수준까지 나왔다. 1988년 서울 강남의 은마아파트 가격이 5,000만 원대이던 시절이다. 거의 대부분이 전자 우편 사용료였다. 전길남은 자신의 연구실 학생들은 물론이고, SDN에 연결된 카이스트 외부의 가입 기관이나 개인들이 별도의 통신료 부담을 지지 않게 했다. 오히려 학생들에게는 네트워크를 이용해 외국의 최신 정보와 연구 자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라고 격려했다. --- p.112~113 1994년, 전길남은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 방안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서 미래 한국의 초고속 정보통신망을 광통신으로 깔고, 2개 이상의 사업자로 경쟁 구도를 가져가야 한다고 명확한 목표를 제시했다. 기존 전화망을 활용하지 않고 광케이블을 새로 깔아 이용자 증가에 영향받지 않고 최종 이용자인 가정까지 속도 저하 없이 광통신으로 연결하는 게 목표였다. FTTH(Fiber~optics to the home)로 불리는 연결 방식이었다. 기존 전화선을 활용하는 ISDN에 비해 몇 배나 많은 예산인 20조~25조 원이 소요되는 규모였다. --- p.119~120 시스템구조연구실 학생들이 컴퓨터를 본격적으로 활용하게 되면서 사용 시간도 늘고 학생들의 욕심도 커졌다. 학생들은 지도 교수인 전길남에게 연구실에 슈퍼미니컴퓨터가 1대 있었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유수의 종합 대학 중앙전산소에나 1대 있는 중형 컴퓨터를 교수 연구실에 비치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당돌한 생각이었다. 당시 종합 대학교 1만~2만 명이 사용하는 컴퓨터 자원을 30여 명 규모의 연구실에서 내부용으로 요청한 것이다. 전길남은 “왜 슈퍼미니컴퓨터가 필요한지 1페이지 문서로 나를 설득시켜라”라고 말했다. 그러자 학생들은 “미국에서 컴퓨터 네트워킹 연구를 선도하는 대학들은 모두 그 수준의 컴퓨터를 갖고 있는데 우리도 비슷한 수준의 컴퓨터를 갖고 있어야 협력이 가능하고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인터넷 연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학생들의 요구는 타당했다. 전길남은 “알았다”라고 답했다. --- p.128 초기에 전길남을 지도 교수로 시스템구조연구실을 선택한 학생 수는 전산학과에서 가장 많았으니, 전체 학생의 30퍼센트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나 연구실 생활은 힘들고 어려웠다. 석·박사 과정을 마치지 못하고 중도에 탈락하는 학생의 비율이 해마다 30~50퍼센트 수준이었다. 카이스트에서 가장 높은 탈락률이었다. 박사 과정을 마쳐야 병역 특례가 주어지는 점과 각종 특혜를 고려했을 때 카이스트를 그만둔다는 것은 학생으로서도 고통스러운 선택이었다. ... 하지만 전길남은 자기 학생들 전부를 어떻게든 지도해서 졸업시켜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 p.145 카이스트가 홍릉에 있던 시절, 전길남은 어려운 연구 과제를 안고 씨름하는 학생들에게 종종 ‘산악 달리기’를 하게 했다. 홍릉에서는 북한산이 멀지 않았다. 모두에게 시킨 것은 아니고 운동 잘하는 학생에게만 적용한 ‘훈련’이었다. 전길남은 “문제가 어려울수록 더 힘든 코스를 더 빨리 뛰어서 올라가라”고 주문했다. 뭔가 어려운 과제를 풀려면 핵심에 접근해야 하는데, 몸 상태를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방법이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산에 뛰어 올라가면서 줄곧 한 가지만 생각하면 어느 순간 평소에는 떠오르지 않던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 있다고 믿고, 학생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했다. --- p.151~152 사실 인터넷은 개발 초기 단계부터 설계자의 통제와 예상을 벗어난 행로를 밟았다. 인터넷의 전신 아르파넷은 기본적으로 연구와 교육 목적의 컴퓨터 네트워크였다. 기업이나 개인 등 소비자를 위한 범용 네트워크는 아르파넷과 별도로 많은 국가가 참여한 가운데 국제 표준 제정 차원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국제표준기구 ISO와 국제통신연합 ITU을 중심으로 추진되던 OSI(Open Systems Interconnection)였다. 컴퓨터 네트워크의 표준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중에 월드와이드웹이 등장하고, 이어서 그래픽 환경의 웹 브라우저인 모자이크와 넷스케이프가 개발되면서 웹은 통제할 수 없는 속도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결과적으로 TCP/IP 방식의 인터넷이 지배적인 네트워크가 되면서 표준 제정을 논의하려던 전문가들의 시도도 사실상 끝나버렸다. --- p.250 인터넷 보급과 거버넌스 논의는 금전적·사회적 보상보다 지속적 관심과 헌신적 참여가 요구되기에 이익과 명예를 기대하고 참여하는 사람들은 오래 버틸 수 없다. 결국에는 전문성과 진정성을 가진 사람들 위주로 재편된다. --- p.257 고교 시절 한국행을 결심한 일부터 인터넷 네트워크 구축과 교육에 뛰어든 일,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많은 개발도상국에 인터넷을 보급하고 조언자로 활동한 일,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는 인터넷 관련 국제회의에서 줄기차게 개발도상국과 소수의 목소리를 대변한 일 등 그가 평생 열정을 쏟은 일에는 공통된 배경이 있다. 바로 ‘공정한 기회’다. 개인과 국가의 생존과 번영에 꼭 필요한 영역은 ‘도착한 순서대로(First come, first served)’ 선발 주자 몇이 나눠 먹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었다. 미국이 인터넷 기술을 개발하고 선진국 위주로 먼저 보급했다고 해서 그 후의 인터넷 관련 국제 규약과 권리 주장이 선발국 위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고 국제적인 논의 무대에서 고집스레 주장해왔다. 동등한 지분은 아니더라도 후발 참여국들의 목소리가 일정 수준 반영되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 p.297~2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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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터넷 40주년, 21세기 대한민국을 만든 연결기술의 탄생
1982년 5월 어느 날 경북 구미 전자기술연구소와 서울대 사이에 우리나라 최초로 ‘인터넷 프로토콜 패킷 통신’이 이루어졌다. 전자기술연구소 컴퓨터연구실에서 책임연구원인 전길남과 연구원 손유익, 차의영 등 개발자 수십 명이 잔뜩 긴장한 채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컴퓨터 화면에 흰색 픽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S’자가 만들어졌다. 서울대에서 보내기로 한 학교 영문 약자 ‘SNU’의 첫 글자였다. 1,200bps 전용 회선을 통해 초당 1,200개의 신호가 오는 환경이니, 알파벳 세 개가 완성되는 데도 꽤 시간이 걸렸다. “와, 성공이다!” 환호성과 함께 박수가 쏟아졌다. 250킬로미터 떨어진 서울대에서 보낸 문자 ‘SNU’가 경북 구미 전자기술연구소 컴퓨터로 전송된, 한국 정보통신사에서 주요 이정표로 기록될 순간이었다. _84쪽 꼭 40년 전, 서울대의 PDP11/44 중형 컴퓨터와 구미 전자기술연구소의 PDP11/70 중형 컴퓨터가 인터넷 통신규약(TCP/IP)을 따른 통신에 성공했다.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자체적으로 컴퓨터 네트워크 연결(SDN)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이듬해 연구과제 연장 여부를 심사하는 자리에서 정부 담당자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참 쓸모없는 연구를 하셨군요.” 컴퓨터 대수도 많지 않고, 컴퓨터를 통한 업무 처리도 한정적이던 현실에서 컴퓨터들을 연결한다고 당장 눈에 보이는 효용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담당자의 질책이 이어졌고, 연구 지원금도 끊겼다. 하지만 통신기술의 불모지에서 이뤄진 이 일은 훗날 한국 인터넷을 10년 앞당긴 것으로 평가받는 쾌거이자 정보화 강국 대한민국의 등장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중심에 전길남 박사가 있었다. 전길남에 관한 최초의 평전 전길남 박사는 도무지 한마디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운 인물이다. 재일한국인 출신의 코즈모폴리턴, NASA의 보이저 계획에 참가한 시스템엔지니어, 전설적인 시스템구조연구실(SA랩)을 이끌던 카이스트 교수, 국내 최초로 마터호른 북벽에 오른 산악인, 세계 2번째 인터넷 구축의 주인공이자 인터넷 보급에 힘써 인터넷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아시아 인터넷의 아버지’…. 이따금 인터뷰를 통해 단편적으로 소개되기도 했으나, 그의 생애와 업적 전반을 기록한 책은 없었다. 때문에 제자들뿐 아니라 전길남을 조금이라도 아는 정보통신 분야 종사자들이라면 그의 삶을 기록한 책을 기다려왔다. 대한민국 인터넷 구축 40주년에 즈음하여 출간된 《전길남, 연결의 탄생》은 자신의 일과 삶에 대한 기록을 미래 세대를 위해 남기고자 한 전길남 박사와, 그의 인생과 추구를 널리 알리는 것이 현대 한국 사회에 의미 있는 일이라고 판단한 IT 전문 저널리스트 구본권 기자가 뜻을 같이해 이루어낸 결과물이다. 2015년부터 7년간 전길남 본인을 비롯해 가족과 제자, 동료 등 다양한 지인들을 만나 취재하고 인터뷰하여 인간 전길남의 다양한 면모를 충실하게 그려냈다. 추천사를 쓴 송재경 대표의 말처럼 “전길남 박사 개인에 관한 전기”이자 “한국 인터넷의 초기 발달 과정을 상세히 알 수 있는 훌륭한 기록”이다. 전길남은 누구인가 전길남은 1943년 오사카에서 재일교포 2세로 태어났다. 오사카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UCLA에서 시스템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미 항공우주국 제트추진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바이킹 계획과 보이저 계획에 참여했다. 1979년 한국 정부의 우수 해외 과학자 국내 유치 프로그램으로 귀국해 한국 전자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며 국산 컴퓨터를 개발하는 한편, 인터넷 방식의 컴퓨터 네트워크 구축에 성공한다. 1982년부터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산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2008년 퇴임했는데, 재직 시 그가 만든 시스템구조연구실은 대한민국 인터넷 개발 및 보급의 허브이자, 정철, 허진호, 김정주, 송재경 등 걸출한 IT 인사들을 배출한 벤처의 산실이기도 했다. 전길남은 1990년대 초 정부의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 마스터플랜을 설계하는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인터넷 한국의 청사진을 만들었고, 대가 없이 아시아·아프리카의 저개발국가 50여 개국을 수시로 방문하며 인터넷 구축과 운영을 자문하고 지원했다. 2011년 존 포스텔 상을 받았고, 2012년 인터넷 소사이어티의 ‘인터넷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80년 한국알프스원정대 등반대장으로 마터호른 북벽 등정에 성공한 업적으로 체육훈장 기린장을, 1997년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뭔가 다른 인물, 전길남이 지닌 다양한 이야기들 이상의 약력에 담을 수 없는 전길남의 성품과 삶의 방식, 업적, 그리고 그의 크고 깊은 문제의식을 책은 꼼꼼하게 기록한다. 무엇보다 전길남의 인생에 있었던 수많은 이야기가 빼곡하게 실려 있다. 독자적인 인터넷 구축과 보급, 제자들의 이어진 벤처 창업, 초고속 인터넷망 계획에 이르기까지, 그는 인터넷 역사의 가장 뜨거운 현장에 있었다.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가 그 안에 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고등학생 시절 4.19에 관한 소식을 듣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된 이야기며, 시스템구조연구실의 설립과 운영에서 있었던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결정과 실행, 그의 삶의 방법론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시스템공학적 사고에 대한 놀라운 일화들도 가득하다. 예를 들어, 전길남은 당시 규모 있는 종합대학 전살실에도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수억 원짜리 중형 컴퓨터를 연구실에 구비하여 마음껏 사용하게 했는데, 미국 유명 대학에 유학하지 않고도 그와 같은 수준의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학생들이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SDN이 구축된 이후, 카이스트 전산센터로 기능을 이관하기까지 전길남의 시스템구조연구실이 국내의 인터넷 연결 허브 역할을 하며 관리를 떠맡았는데, 한 해에 수천만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통신비는 모두 전길남의 연구실에서 연구비 조달을 통해 해결했다. 전담 사서를 두고 랩 라이브러리를 관리하게 한 것이나, 사무직원을 채용해 대학원생들이 행정업무 처리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고 연구에 집중할 수 있게 한 것은 지금 보면 당연해 보일지 모르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학교에서 그리고 인터넷 거버넌스에 관한 국제적 논의에서 그가 보여온 공정함에 대한 집요한 추구, 부당한 차별을 철폐하려는 노력은 세상이 많이 바뀐 지금 보기에도 획기적인 면이 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전길남이라는 인물의 됨됨이와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과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뛰어난 자질을 타고나기도 했지만, 그의 일생이 보여주는 다양한 측면은 타고난 능력을 넘어선다. 그가 몸담은 시스템 엔지니어링과 고산 등반처럼, 그의 삶은 주어진 여건 속에서 보이지 않는 길을 탐구하고 개척해나가는 여정이다. 그것이 공학자, 교육자, 인터넷 전파자, 산악인 등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온 그의 삶을 관통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전길남이라는 개인의 삶이 그와 다른 방식으로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보편적인 물음과 울림을 줄 수 있는 까닭이다. 필자가 수년간의 작업을 통해 깨닫고 느낀 점을 독자들도 공감하리라 기대한다. _21-22쪽 인터넷은 지속 가능한가, ‘모두를 위한’ 네트워크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한국 인터넷의 역사만 아니라 인터넷의 시초인 아르파넷부터 CSNET, 월드와이드웹 개발, 웹브라우저 개발 등 인터넷 역사의 주요 국면을 두루 보여주는 이 책은 그 자체로 훌륭한 인터넷 교양서이기도 하다. IT 전문 저널리스트답게 어려운 개념들도 쉽고 간결하게 설명할 뿐 아니라, 이 방면 기술의 주요한 이슈들도 빠짐 없이 다룬다. 국내외에서 사회적 준비와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 인터넷이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나타난 문제점들을 살펴보면서, 지속가능한 인터넷을 만들기 위해 앞으로 어떤 점들에 대한 숙의가 필요한지 짚어보기도 한다. 부록으로 두 편의 대담을 수록했다. 저자와 전길남의 대화를 정리한 첫 번째 대담에서는 특히 인터넷과 인공지능의 미래를 심도 있게 살펴보고, 두 번째 대담에서는 전길남과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가 과학 교육과 연구의 현실에 대한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들려준다. 대화에서 드러나는 전길남만의 독특한 시각을 보는 것도 재미있고, 무엇보다 먼 미래까지 염두에 두고 기술의 방향을 고민하는 전길남의 사고의 크기에 감탄하며 읽다 보면 더 좋은 시스템을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도 독자 나름대로 품어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정보화강국 대한민국의 시작에 관한 책이면서 미래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전길남은 기본적으로 시스템 엔지니어이지만 인터넷 프로토콜과 같은 기술적 논의나 지평에 머무르지 않았다. 인터넷의 기술적 구조와 사용성의 차원을 넘어, 누가 어떤 의도로 인터넷의 구조와 질서를 만들고 논의에 참여하느냐를 중시했다. 그는 정보화가 모두에게 더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며 인터넷의 질서와 규약을 좀 더 공정하게 만드는 역할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겼다. _25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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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길남 교수님은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입니다. 박사님에게 배운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엔지니어로서 살아가는 태도였습니다. 늘 능력(ability)보다 태도(attitude)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책은 전길남 박사님 개인에 관한 전기이기도 하고, 더불어 한국 인터넷의 초기 발전 과정을 상세히 알 수 있는 훌륭한 기록입니다. -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창업자, ‘리니지’ 개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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