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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열하일기 - 월드북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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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동서문화사 2013.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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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품의 시리즈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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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목차

압록강을 건너며
심양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
말타고 지나가듯 쓴 수필
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여행
만리장성 북쪽 변방을 가다
태학관에 묵으며
북경으로 되돌아오는 길에서의 견문
열하에서 만난 중국 벗들
라마교에 대한 문답
반선의 역사적 내력
활불 반선을 만남
열하에서의 이러저러한 기록
천하의 형세를 살피다
양고기 먹는 일조차 잊게 한 음악 이야기
곡정 왕민호와 나눈 필담
산장에서 쓴 여러 편의 글들
요술놀이 구경
더위를 식히며 시를 논하다
고북구 장성 밖에서 들은 기이한 이야기
여관 옥갑에서 묵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북경 관광
공자 사당을 참배하고
쪽지에 쓴 짧은 기록들
동란재에서 쓴 글
이러저러한 의약 처방 몇 가지

박지원의 생애와 사상

저자 소개1

朴趾源, 호 : 연암

仲美, 호는 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이다. 18세였던 1754년(영조 30), 우울증과 불면증을 앓아 이를 극복하고자 여러 계층의 진실한 인간형에 대해 모색한 전傳 아홉 편을 지어 『방경각외전放?閣外傳』이란 이름으로 묶었다. 1771년경 마침내 과거를 그만 보고 재야의 선비로 살아가기로 결심, 연암은 서울 전의감동典醫監洞(지금의 종로구 견지동)에 은거하며 벗 홍대용洪大容 및 문하생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과 교유하면서 ‘법고창신法古創新’ 즉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새롭게 창조하자’는 말로 집약되는 자신의 문학론을 확립하고, 참신한 소품小品
仲美, 호는 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이다. 18세였던 1754년(영조 30), 우울증과 불면증을 앓아 이를 극복하고자 여러 계층의 진실한 인간형에 대해 모색한 전傳 아홉 편을 지어 『방경각외전放?閣外傳』이란 이름으로 묶었다. 1771년경 마침내 과거를 그만 보고 재야의 선비로 살아가기로 결심, 연암은 서울 전의감동典醫監洞(지금의 종로구 견지동)에 은거하며 벗 홍대용洪大容 및 문하생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과 교유하면서 ‘법고창신法古創新’ 즉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새롭게 창조하자’는 말로 집약되는 자신의 문학론을 확립하고, 참신한 소품小品 산문들을 많이 지었다.

1780년(정조 4) 삼종형三從兄 박명원朴明源이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을 축하하는 특별 사행使行의 정사正使로 임명되자, 연암은 그의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서 연행燕行을 다녀왔다. 이 결과 지어진 것이 『열하일기』이고, 이는 완성된 전권이 나오기 전부터 열띤 반응을 받았다. 50이 된 1786년, 연암은 음직蔭職으로 선공감 감역繕工監 監役으로 관직을 맡게 되고 그 후 경상도 안의 현감安義縣監, 의금부 도사, 의릉 영懿陵令 등을 거쳐, 1797년부터 1800년까지 충청도 면천沔川(지금의 충남 당진)의 군수 등으로 재직하며 농업 장려를 위해 널리 농서를 구한다는 윤음綸音(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진상했다.

1800년 음력 8월 연암은 강원도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승진했으나, 궁속宮屬과 결탁하여 양양 신흥사神興寺 승려들이 전횡하던 일로 상관인 관찰사觀察使와 의견이 맞지 않아 1801년 늙고 병듦을 핑계 대고 사직했다. 1805년(순조 5) 음력 10월 29일, 69세의 나이로 연암은 서울 북촌 재동齋洞(지금의 가회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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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 고산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비교문화학과 졸업하였다. 소설 「청계천」으로 「자유문학」 등단하였고, 1956년~현재 동서문화사 발행인으로 있다. 1977~87년 동인문학상운영위집행위원장으로 역임했다. 1996년 「한국세계대백과사전 전31권」 편찬주간발행했다. 한국출판문화상, 한국출판학술상을 수상했다. 지은책에 「청계천 사람들」 「불굴의 혼·박정희」 「한국출판 100년을 찾아서」「망석중이들 잠꼬대」 「청년들아 야망을 가져라!」 「高山 大三國志」「불과 얼음·장진호 혹한 17일」 등이 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9월 09일
이용안내
  •  배송 없이 구매 후 바로 읽기
  •  이용기간 제한없음
  •  TTS 불가능
  •  저작권 보호를 위해 인쇄 기능 제공 안함
지원기기
크레마, 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 아이폰, 아이패드, 안드로이드폰, 안드로이드패드, 전자책단말기(저사양 기기 사용 불가), PC(Mac)
파일/용량
PDF(DRM) | 6.80MB ?
글자 수/ 페이지 수
약 1038쪽 ?
ISBN13
9788949706719

출판사 리뷰

연경 기행문학의 백미: 한국고전의 명저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조선 정조 때 학자로 청나라를 다녀와서 기행문집 열하일기를 저술하였다. 그는 이 열하일기에서 유려한 문장과 진보적 사상으로 이름을 널리 떨쳤으며, 북학론을 주장하고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다.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제목만 얼핏 보아 일종의 여행일기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책은 결코 흔히 쓰는 개념으로서의 일기나 기행문이 아니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단지 기행문체를 이용하여 자신의 작품들을 종합하는 편성 체계로 삼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연암이 이 열하일기 속에 수록한 작품들의 형식은 오늘로 보아 기행, 평론, 소설, 시, 르포, 실화문학, 펠레톤, 수필, 스케치 등 동서고금의 여러 문학적 장르가 있는 대로 구사되고 있다. 또한 그 내용 역시 정치, 경제, 천문, 지리, 철학, 역사, 사회, 문화, 언어, 문학, 예술, 종교, 과학, 기술, 의학, 군사 등 백과사전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광범위한 주제를 총망라하였다. 연암이 열하일기에서 다룬, 이처럼 다양한 형식과 광범위한 내용은 결코 세속적인 박물군자의 호기적 지식자랑이거나, 현학자의 문자놀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나라를 문명하고 부강하게 만들려는 애국정신의 소산이었으며, 그러한 연암의 사상은 열하일기 전편에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이러한 열하일기는 여행지에서의 견문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신문물과 북학파의 실학을 소개하고 있어 수많은 조선시대 연경 기행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한국 풍자문학의 진수 ‘열하일기’

연암은 당시 봉건관료들의 온갖 악덕과 유학자들의 사대주의, 그리고 그들의 위선 및 허례에 지독한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양반사회의 부패한 현상과 고루한 학풍을 타파하기 위해 이 열하일기를 통해 이를 다양한 기법으로 폭로 비판한다. 그는 한낱 음풍영월이나 관능 만족의 도구로 일삼는 그즈음 유학자들의 조류에서 벗어나, 연암 자신의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문학예술적 재능으로써 사회 발전을 막고 있는 세력의 위선과 모순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비판했던 것이다. 연암의 이러한 성격은 양반전, 광문자전(廣文者傳)등 그의 한문소설에서도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의 소설들은 대개가 그 시절 역사적 현실과 연관시킨 것들이거나 인간의 내면 세계 또는 민족문학의 맥과 상통하는 것들로 이루어지면서도 강한 풍자성을 띠고 있어서 읽는 이로 하여금 통쾌함을 느끼게 한다.

북학파 실학문학의 집대성

연암은 청나라 건륭제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의 사설수행원 자격으로 청국여행을 떠난다. 그는 열하의 문인들과 사귀고, 북경의 명사들과 교유하며, 그곳의 문물·제도를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이 열하일기에 기록했다. 이 책은 1780년 6월 24일 압록강 국경을 건너는 데서부터 시작해 요동, 성경, 산해관을 거쳐 북경에 도착하고 열하로 가서, 8월 20일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기까지 두 달간 겪은 일을 날짜 순서에 따라 항목별로 적고 있다.

이 여행에서 청나라 문물과의 접촉은 연암의 사상체계에 크나큰 영향을 주어, 이를 계기로 연암은 인륜 위주의 사고에서 이용후생 위주의 사고로 전환하게 된다. 특히 그는 이 열하일기를 통해 청국여행에서 보고들은 선진문화와 선진적 산업시설 및 근대적 과학이론을 상세히 소개하면서, 이를 우리나라에 적극 도입하여 백성들의 생활에 이바지할 것을 강력하게 호소하고 있다. 연암은 귀국한 뒤 이 열하일기 저술에 온 힘을 기울였다. 열하일기는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호질·허생전 등 한문소설과 함께 중국의 풍속·제도·문물에 대한 소개와 인상, 조선의 제도·문물에 대한 비판 등이 들어 있는 문명비평서이다. 연암은 1783년 무렵에 원고를 완성했으나,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개작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리하여 열하일기의 최종적인 수습은 연암이 죽은 뒤 1820년대 초반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구적인 연암문학

열하일기는 특히 자유분방하고도 세속적인 문체와, 그즈음 국내에 널리 퍼져 있던 반청의식 때문에 찬반의 수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루하고 보수적인 소화의식(小華意識)에 젖어 있는 지식인들이 열하일기를 거세게 비난하자, 정조 임금도 1792년에는 연암에게 반성문을 지어 바치라는 처분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즈음 연암은 양반사회에 대한 비판과 부패의 폭로가 더욱더 원숙해졌고, 사회모순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드러냈으며, 이용후생의 실학을 대성하기에 이르렀다. 열하일기는 처음부터 명확한 정본 없이 여러 필사본들이 많이 유포되어 그 이본들이 다양하다. 열하일기를 비롯해 연암사상이 잘 반영되어 있는 저서들은 모두 그쟀 문집인 연암집에 수록되어 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그 시대의 사고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기에, 실제로 그의 문집이 초록 형태로 김만식 등에 의해 서울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간행된 것은 1900년에 이르러서였다. 연암이 죽은 지 1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서야 연암집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연암의 손자 박규수(1807~1876)가 우의정을 지냈으면서도, 할아버지의 문집을 간행하지 못했음은 그의 문집 내용이 그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 짐작케 한다. 그 뒤 열하일기의 전편 간행본으로는 1901년 김택영이 연암집 원집에 이어 간행한 연암집 속집(구활자본)에 처음 수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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