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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2부 3부 감사의 말 참고도서 옮긴이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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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을 앓는 아버지를 둔 나의 탈출구는 책
책이 나의 훌륭한 탈출구가 돼주었다. 책이 지어낸 내러티브는 일관성이 있어서 세세한 플롯 조각 하나하나가 모여 전체를 이루고, 필연적인 해피엔딩 안에서 모든 게 납득이 되었다. 그에 반해 현실 세계는 뒤죽박죽이고 종잡을 수가 없었다. 스토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이해의 실마리가 잡혔지만, 내 가족의 내러티브는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 이야기처럼 여전히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너희 아빠는 어떻게 됐어?” 학교 놀이터에서 누군가 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스토리를 지어냈다. (……) 설령 내가 아버지의 병명을 알았다 해도 그 용어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과학 없이도 살아남는다. 고대 사회에서 하던 방식대로―어째서 어느 때는 비가 내리고 어느 때는 가뭄이 드는지, 별은 어디에서 생겨나고 인간이 왜 이 땅에 살게 됐는지, 설명하는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아이일 때는 부모가 신처럼 보이게 마련이고, 따라서 웅장한 내러티브가 필요해진다. 그저 우리 아버지가 ‘미쳤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게 들리고, 아버지를 너무 허약하고 너무 인간적인 인물로 보이게 만든다. 아버지는 비극의 영웅이 되어야만 했다. 특히나 아버지를 쥐고 흔드는 힘은 내적 힘이 아니라 외부 힘이어야만 했다. --- pp.24~26 간병인의 역할 간병인carer, 또 이 말이다. 갈수록 사람들이 나에게 이 이름표를 붙이려 하는데 나는 여전히 이렇게 불리는 게 이상했다. 간병인이라고 하면 청색 가운을 입고 고무장갑을 끼고 침대 시트를 교체하는 사람이 연상됐다. 한없는 인내와 에너지와 사랑을 품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같은 사람. 구글에서 이 말의 동사형인 ‘to care(돌보다, 간병하다)’를 검색해보니, 이 말은 독일어에 어원을 두고 있으며 비탄과 슬픔을 뜻하는 고지 독일어오늘날의 표준 독일어의 ‘chara’와 관련이 있다. ‘돌본다는 것’은 괴로움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세월을 거치며 의미가 유연해져 누군가를 부양하고 보살피는 것까지 뜻하게 되었다. --- pp.34~35 결혼 전 레너드는 버지니아가 정실 질환을 앓는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아버지를 걱정하며 암울한 나날을 보내던 나에게 레너드는 영감을 주는 존재였다. 버지니아가 신경쇠약을 앓고 자살을 기도하던 시기에도 그는 내내 엄청난 극기심과 애정과 의리로 버지니아를 간호했다. 간병인의 역할은 고독한 의무 같기도 하다. 주위 모든 사람이 나비처럼 자유로이 사는데 이 세상에서 나 혼자만 간병이라는 제약에 시달린다는 느낌이 들 수 있다. 나는 레너드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버지니아의 끼니를 챙겨야 했고, 때로는 발버둥 치기도 했으며, 의사들을 신뢰하지 못했고, 아내의 건강을 보살피느라 자기 건강을 해치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가 깊숙이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레너드에 관해 찾아낼 수 있는 자료를 샅샅이 찾아 읽었다. 그를 더 잘 이해하고 싶기도 했지만, 동시에 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 질문의 해답을 간절하게 찾고 싶었다. 결혼 전에 레너드는 버지니아가 정신 질환을 앓는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아니면 결혼한 이후에 깨닫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그 사실이 그에게는 충격이었을까? 우리 부모님이 그랬듯, 두 사람 관계의 어느 시점에서인가 남편과 아내에서 간병인과 환자로, 이 두 가지 경계가 흐트러지는 미묘한 변화의 순간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이 새로운 역할을 수용하기가 힘들지 않았을까? --- pp.63~64 버지니아 울프의 천재성을 보호하기 위한 남편의 노력 “나도 보고 싶어요, 하지만 이게 최선이에요, 내가 이토록 끔찍하게 어리석은 맨드릴만 아니라면. 모두 내 잘못이에요, 내가 창피해요, 당신 보기에.” 이런 온순한 어투에서 나는 아버지가 연상된다. 정신병동 안에서 긴장한 아버지, 직원이나 의사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매번 신경 쓰는 아버지가 떠오른다. 틀림없이 통제력을 상실하는 데 대한 두려움과 언제쯤 격리에서 풀려나게 될지에 대한 불안감이 작용했겠지. 레너드의 답장은 한결같이 상냥하다. 그는 버지니아가 스스로를 탓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를 불행하게 만들고 그에게 짐이 될까 염려하는 버지니아에게 그는 이렇게 답한다. “더할 나위 없는 행복 외에 그 무엇도 당신 때문이라고 다시는 말하지 말아요, 왜냐하면 말 그대로, 솔직하게, 나는 그저 당신 곁에 조용히 앉아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행복을 느끼니까요.” --- p.109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을 돌보는 것은 운명과 싸우는 일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은 자기 삶의 통제권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을 좌지우지하는 건 운명이다. 다시 말해 사회, 의학적 소견, 대중적 인식, 가족의 이해심, 돈 등등을 뭉뚱그린 그 모호한 단어 말이다. 나는 레너드와 버지니아가 떠올랐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레너드가 징집될지도 모를 상황에서, 버지니아의 한 친구는 버지니아가 ‘자신의 운명에’ 내맡겨지게 될까 걱정했다. 레너드가 곁에 없으면 그녀의 죽음?자살?을 피할 수 없을까 봐 두려워한 것이다. 조현병 환자의 평균수명은 전체 국민 평균수명보다 십~십오 년 더 낮다.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을 돌보는 것은 운명과 싸우는 일이다. 운명에 개입하는 것?혹은 개입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 p.125 아버지의 질병이 내가 쓴 소설 모든 페이지마다 투명무늬로 찍혔다 나는 소위 여성이 쓸 글이 아니라고들 하는 그런 종류의 책을 쓰고 있었다. 서점을 둘러볼 때마다 컬트소설 섹션의 9할 내지 10할은 남성작가들 차지였다. 버로스Burroughs, 부코스키Bukowski, 폴 오스터Paul Auster, 헌터 S. 톰슨Hunter S. Thompson, J. G. 발라드J. G. Ballard―그리고 윌 셀프까지. 아방가르드라는 용어 자체가 프랑스어로 전위부대를 뜻하는 군사 용어에서 파생된 단어이고, 소설의 관습적 경계를 깨부수기 위해 전진하는 남성적인 힘과 권력을 암시한다. 컬트소설 진열대는 마치 남자는 자기 글을 들고 세상에 나가 싸워야 하고 여자는 집 안에서 가사에 전념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시사하는 듯했다. 나는 이 모든 것에 손가락 욕을 날려주고 싶었다. (……) 나는 조현병적 행위로서 책 읽기라는 아이디어를 다뤄보고 싶었다. 내 아버지의 질병이 책의 모든 페이지마다 투명무늬로 찍혀 있었다. --- pp.184~185 버지니아 울프가 남편에게 남긴 편지 사랑하는 레너드 내가 다시 미쳐가고 있다는 걸 확실히 느껴요. 그 끔찍한 시간을 우리가 또다시 겪지는 못할 것 같아요. 이번에는 회복이 힘들 거예요.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해서 집중을 할 수 없어요. 그래서 나는 지금 최선이라 생각되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당신은 가능한 가장 큰 행복을 내게 주었어요. 당신은 모든 면에서 누군가가 될 수 있는 전부가 돼주었어요. 우리보다 더 행복했던 두 사람은 없었으리라 생각해요, 이 끔찍한 병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나는 이제 더는 싸울 수가 없어요. 내가 당신 인생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없으면 당신이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요. 일하게 될 거예요, 내가 알아요. 이 편지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게 보이지요. 글자를 읽을 수가 없어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 인생의 모든 행복이 당신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온전히 나를 참아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 말을 해주고 싶어요. 모두가 잘 알아요. 누군가 나를 구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그건 당신이었을 거예요. 내게서 모든 것이 사라졌어도 당신의 선한 마음만은 확실히 남아 있습니다. 더 이상 내가 당신 인생을 망칠 수는 없어요. 우리보다 더 행복했던 두 사람은 없었을 거예요. V. --- pp.203~204 조현병 스펙트럼 조현병 환자는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더 타인에게 노출되어 있고 더 상처받기 쉬운 동시에 더 고립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자신이 유리로 만들어져 있다고, 유리처럼 투명하고 부서지기 쉬워서 자기에게 쏠린 시선 하나가 자신을 정통으로 꿰뚫어 산산조각 낸다고 말할지 모른다. 조현병 환자가 자기 자신을 경험하는 방식이 정확히 이러하리라고 우리는 추측해봄 직하다. 비현실적인 인물이 그토록 자기 은폐에 능숙해진 것은 바로 이렇게 정교한 취약성을 토대로 한 것이라고 짐작된다. (……) 시간이 갈수록 나는 포괄적으로 쓰이는 조현병이라는 용어 자체가 혼란스러웠다. 아버지가 쓰러지기 전까지 내가 만난 조현병 환자는 우리 아버지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환자들을 많이 마주칠수록 그들이 모두 얼마나 제각각인지, 교과서적 정의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는 환자의 숫자가 얼마나 적은지, 점점 분명하게 보였다. 그날은 병동에 새로운 환자가 와 있었다. 은발을 짧게 자른 자그마한 체구의 그리스 여성이었다. 이 환자는 귀에 거슬리는 울음소리를 내며 걸어 다녔다. 양손을 쥐어짜면서 그리스어로 사람들에게 말하는 모습이 마치 데우스엑스마키나deus ex machina가 내려와 자신의 고통을 해결해주기를 간청하는 것 같았다. --- pp.306~307 자신과 아내, 모두를 파멸시킨 스콧 피츠제럴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녀가 어떻게 변해 버린 거지? 모든 게 그의 잘못일까? 스콧은 모아둔 자금이 바닥났다. 『밤은 부드러워라』가 기대했던 것만큼 팔리지 않았다. 오히려 『위대한 개츠비』보다도 더 큰 실패작이다. 고작 5천 달러에 불과한 그의 인세 수입으로는 에이전트와 출판사 측에 진 빚을 갚기도 부족하다. 젤다가 현재 입원 중인 크레이그하우스의 치료비도 더는 감당할 수가 없다. 크레이그하우스에서 젤다는 개인 간호사, 부지 내 골프 코스, 수영장 등의 시설을 누리며 지냈다. 스콧은 비용이 더 저렴한 볼티모어 인근 셰퍼드앤에녹프랫 병원으로 젤다를 옮겨야 했다. 이곳은 창문에 창살을 쳐놓고 출입문을 잠가두었다. 음침하고 시설이 변변찮은 곳이다. 처음 병원에 들어갈 때 젤다는 거친 몸수색을 받고 소독용 목욕까지 견뎌야 했다. 젤다는 환각 증세를 일으키고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스콧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 ‘내 책에 담았던 그 여자를 나는 잃고 말았다’는 스콧의 말소리가 귀에 들린다. 그녀는 자기 목을 조르려고 시도한다. 1935년 내내 그녀는 자살 충동 환자로 분류된다. (……) 언젠가 스콧은 적었다. “젤다와 내가 충돌했을 때 내 삶은 끝났다. 만약 그녀가 건강해진다면, 나는 다시 행복해지고 내 영혼은 풀려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영영 불가능하다.” 돌봄이 어떻게 그를 심리적 감금 상태에 놓이게 했는지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지만, 그녀를 대하는 그의 태도 탓에 그의 형량은 늘어나기만 했다. 젤다의 집요한 병세는 그를 지치게 만들었고, 젤다가 ‘하나의 사례―사람이 아니라―’가 돼버렸다는 자각과 함께 그를 절망에 빠뜨렸다. 그러나 젤다를 고유한 바람과 욕구와 창작의 야심을 지닌 한 사람으로 대하지 못한 스콧의 실패가 결국 아내의 병을 지속시켰다는 건 비극적이다. 그는 아내를 파멸시키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파멸시켰다. --- pp.373~3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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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을 둘러싼 무게와 복잡함을
소설가의 눈으로 사려 깊고 우아하게 성찰한 에세이 아버지를 돌보던 엄마의 죽음, 엄마를 대신해 아버지의 보호자가 된 딸 아버지의 조현병이 처음 발병했을 때 저자는 세 살이었다. 아버지의 병증과 병명을 말해줘도 몰랐을 나이다. 간헐적인 발작으로 입원과 퇴원을 거듭하며 아버지는 가족의 일상에서 점점 지워졌고, 다시 나타날 때마다 가족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점점 멀어졌다. 마치 “사라짐을 시연하는 마술 트릭”을 부리듯. 집 안에 있지만 없는 존재인 아버지 자리를 어머니가 대신했다. 어머니가 가족의 생계와 돌봄을 책임졌다. 가난, 성장기의 우울, 아버지를 닮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모두 어머니가 내민 손을 잡고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런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혼자 두기엔 위험했다.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처음엔 잠깐이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회복은 더뎠고 발작은 잦아졌다. 돌봄은 길어졌고 그렇게 딸은 아버지의 보호자가 됐다. 버지니아 울프와 레너드 울프, 젤다 피츠제럴드와 스콧 피츠제럴드, 아버지와 나 문학을 전공한 소설가 샘 밀스는, 아버지의 간병인으로서의 그녀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버지니아와 레너드 울프, 스콧과 젤다 피츠제럴드의 관계와 연결시켜 ‘정신 질환자 간병’을 풀어나간다. 버지니아 울프도 조현병을 앓았다. 아내 버지니아 울프의 보호자 남편 레너드와 아내 젤다의 보호자 스콧 피츠제럴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가장 가까이에서 버지니아를 관찰하고 정신과 의사를 선택하는 것에서도 아내의 의견이 우선인 레너드와 스위스 최고급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스콧. 버지니아 울프의 천재성을 보호하기 위한 레너드의 노력에 반면 스콧은 젤다를 다루기 힘든 애 취급한다. 두 문학인 커플의 삶을 비교하며 풀어나가는 저자가 찾아낸 발견들은 마치 세 이야기가 한 이야기처럼 스며들어 독자들에게 매우 매혹적으로 읽힌다. 돌보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죄책감, 피로, 불안, 좌절 등 복잡한 감정들 간병인은 환자의 시간에 함께 머무는 동시에 자신만의 사회적 시간에도 머무른다. 내가 간병을 잘하고 있는지 항상 고민하고 환자에게 집중하는 동시에 간병인도 생활인으로서 일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 환자를 보살피면서 간병인 자신도 돌보는 일은 과연 가능한가. 아픈 사람의 곁에서 돌본다는 것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특히 정신 질환을 앓는 가족을 돌보는 일에 우리는 얼마나 무지하고 무능한가. 간병인에게 교차하는 복잡한 감정들이 문장에 그대로 스며든다. 돌봄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 우리는 누구나 그 한쪽이 될 수 있다. 때문에 돌보는 사람들로부터 우리는 배워야 한다. 이 이야기가 경험의 독백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돌봄이 학습 과정이라면, 그것은 또한 우리가 창조적인 행동으로 바꿀 수 있는 활동이다. 돌보는 사람의 행위가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매우 필요한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회고록이다. 돌봄의 개인적이고 문학적이고 정치적인 반짝이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저자는 돌봄과 정신 질환을 열쇳말 삼아 책에서 실마리를 구한다. 특히 자기보다 앞서 정신 질환을 앓는 가족의 간병인이었던 두 사람의 생애에 강하게 이끌린다. 저자가 존경하는 성공한 간병인 레너드 울프, 그리고 샘이 닮을까 우려하는 실패한 간병인 스콧 피츠제럴드. 돌봄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딜레마는 이 이야기의 굵직한 씨줄이다. 무엇보다 번번이 샘을 미궁에 빠뜨리는 존재는 ‘자기 안의 고립에 갇힌’ 아버지다. 아버지의 미스터리한 병증을 해독해보려고 샘은 정신 질환 이론과 사회적 처우의 역사를 공부한다. 절박한 독서는 샘의 시야를 넓히고 이야기에 한 겹 더 새로운 층위를 입힌다. 아름다운 회고록. 이 용감하고 독창적인 글에는 개인적이고 문학적이고 정치적인 갖가지 반짝이는 이야기의 파편들이 가득하다. - [더 타임스] 밀스의 글에는 예리한 정서적 지성이 흐른다. 그가 들려주는 절망에는 회복이 깃들어 있다. -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러먼트] 밀스는 역사적 이야기와 현대적 이야기를 함께 엮어 가족, 연인 간의 유대가 갖는 복잡한 의미를, 그리고 우리가 회피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런 유대가 개인의 삶과 일을 풍요롭게 해주는지를 보여준다.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미지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여러 갈래의 길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 [스펙테이터] 정신 질환을 앓는 아버지의 간병인이 된 자전적 이야기를 통절하게 들려준다. 젤다 피츠제럴드를 비롯, 비슷한 싸움을 치렀던 문인들에 대한 묘사와 자신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나로 녹여낸다. - [인디펜던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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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는 행위를 둘러싼 모든 것을 소설가의 눈으로 사려 깊고 우아하게 성찰한 책
인간은 누군가의 돌봄 속에 나고 자라서 돌보는 어른으로 성장하고, 어느 날 정신과 육체의 쇠락과 장애를 겪으며 다시 돌봄을 받는 자로 원점 회귀한다. 사회관계론적 측면에서 보면 인생이란 돌봄의 역할을 끝없이 순환시키는 연극 무대 같다. 어머니의 죽음을 겪고 아버지의 조현병을 돌보는 자신의 감정뿐만 아니라, 국가 보건 행정과 정신병리학의 진보와 퇴행에 대한 사회과학적 통찰, 아울러 광기와 충만의 경계에서 선 예술가의 삶을 비추어 돌봄이 자아내는 비극과 희망까지 낱낱이 들여다본다. 누군가에겐 진심 어린 위로가, 또 다른 누군가에겐 가슴 시린 미래 예언과 도전이 되리라. 삶의 진실을 담은 책은 으레 그런 역할을 한다. - 김완 (특수청소부, 『죽은 자의 집 청소』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