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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시간을 되돌린다면2부 또 죽고 싶지 않아3부 학교에 들어올 수 없는 경우4부 나가자5부 흑귀는 반드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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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요태 노래처럼2022년 5월부터 아작은 투고 원고를 더 이상 받지 않는다. 2015년 9월 번역서로 첫 책을 내고 이후에도 오랫동안 해외 SF를 소개하는 데 공을 들였지만 꾸준히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내기 위해 투고를 받아 왔고, 들어온 원고는 어느 하나 빠짐없이 꼼꼼히 읽고 출간 여부를 결정했다. 투고 원고로 낸 첫 책이 아작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걸작인 문목하 작가의 《돌이킬 수 있는》이고 보면, 투고 원고에 대한 아작의 기본 태도는 늘 ‘설렘’이다. 이름도 모를 어느 작가가 몇 달 혹은 몇 년에 걸쳐 완성한 자신의 작품을, 마찬가지로 이름도 모를 누군가에게 보내고 또 받는 과정은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하지만 매일 ‘설렘’만으로 평생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한국 작가의 SF를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오히려 과부하가 걸릴 정도로 원고가 쏟아져 더 이상 예전처럼 모든 원고를 꼼꼼히 읽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작가를 무한정 기다리게 할 수 없어서, 그렇다고 원고 검토를 위해 여느 대형 출판사처럼 담당 인력을 늘릴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더 이상은 투고를 받지 않는다는 공고를 올리고 설레는 일을 그만두었다. 물론 그사이 공모전을 열게 되었고, 계간 잡지까지 발행하게 되었으니 중구난방으로 설레지 않고 시스템을 갖춰서 설레게 되었지만. 소설 《이계학교: 죽어야 가는 학교》는 아마도 어쩌면 아작에서 내는 마지막 투고작이 될지도 모르겠다. 김영리 작가가 이 소설을 투고하던 때 출판사는 안팎으로 많이 힘든 시절이었다. 해외 번역서에서 국내 작가 작품 출간으로 전환되는 시점이기도 했고, 그러기 위해 대책 없이 벌인 일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못 챙긴 실수도 많았을뿐더러, 그 수습에는 또 몇 배의 수고가 들기도 했다. 그 즈음 투고받은 이 소설을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앉은 자리에서 딱 두 시간 만에 읽었다. 어쩌면 흔한 이야기. 거의 고아로 자란 아이가 가출팸에 들었다 장기를 잃고, 더 이상 삶의 의지를 잃고 자살을 하러 산에 올랐는데 자기보다 더 불쌍해 보이는 어른 남자를 보고 그를 구하려고 애쓰다 결국 죽음에 이른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왜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차피 죽으려고 했는데 결과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 죽음과 내 의지가 아니라 알 수 없게 죽어버리는 건 달라도 많이 다른 일이니까. 아니 마지막인데 기억이 안 나는 건 너무 억울한 일이니까.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소설의 장르가 판타지여서 죽었다고 다 끝나버리지는 않는다. 죽은 주인공을 어딘가로 데려가려는 사람들, 아니 귀신들이 나타나고 우여곡절 끝에 따라간 곳은 어이없게도 ‘학교’다. 살아서도 제대로 못 다닌 곳이 학교인데 죽어서 가는 학교라니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학교는 더 어이없게 경복궁이고, 이 학교의 선생과 학생들은 신라 고려 조선을 거쳐 현세까지 대대로 뒤섞여 있다.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자신의 마지막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끝도 없이 알 수 없는 소동에 휘말리며 주인공은 자신의 죽음의 비밀을 밝히려 싸워야 하고, 이미 죽었는데도 또 죽이려 드는 자들과 싸워야 한다. 보통은 죽음을 영원한 잠, 영면(永眠)이라 부르지만 죽어서도 잠들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그 말도 사치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또 죽음을 반복하게 되는 일은 그 자체로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닌가 싶지만 작가는 캐릭터들을 극한으로 내모는 데 주저함이 없는 분이다. 그것도 일반적인 이야기의 몇 배나 되는 속도로.처음 투고 받은 원고는 지금 이야기보다 다섯 배쯤 빨랐다. 넷플릭스 드라마를 최소 16배속으로 보는 기분이었고, 그 여운은 또 길었다. 그래서 작가와의 미팅을 통해 속도를 조금만 줄여보자고 제안했다. 조금 느리게 가는 대신 이야기의 속을 더 채워달라고, 너무 빨라서 보지 못한 이야기들이 너무 궁금하다고. 제안을 할 때만 해도 그렇게 다시 이야기를 늘리려면 몇 달은 더 걸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작가는 또 몇 배 속으로 집필을 했는지 불과 몇 달 만에 세 배로 늘어난 이야기를 들고 왔다. 그래서 이 책은 그 늘어난 이야기의 첫 번째 권이다.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여전히 빠르다. 최소 두 배속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러다 보니 조금은 이야기에서 거리가 생기고, 그 발생한 거리만큼 유쾌하다. 비극으로 느낄 만큼 가까이서 보지 않으니 종종 희극이 된다. 그렇다고 마냥 깔깔거리게 되지는 않는다. 결국은 마지막으로 달려가는 이야기들이 정말로 희극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작가는 소설 속 인물들에게 “코요태 노래처럼” 살기를 원한다. (다른 말이지만, 그룹 코요태가 ‘코요테’가 아니라 ‘코요태’인 것을 이번에야 알게 되었는데 심지어 그 한자가 高耀太로 ‘높고 크게 빛나는’ 태양을 뜻한다는 것까지 찾아보고서는 기획사를 차린다는 게 정말 쉬운 일은 아니겠구나 했다.)어쨌거나 아작의 마지막 투고작은 코요태 노래 같은 소설이다. 인생도 귀생도 그리고 소설을 만드는 일도 소설을 읽는 일도, 부디 코요태 노래 같길 바란다. 어떤 사람에게는 흔한 유행가 같은 이야기일 수도, 또 어떤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끝도 없이 되풀이되는 일상을 다시 한 번 돌이켜볼 수 있어서 이 소설이 좋았다. 그 어떤 삶도, 그 어떤 죽음도 코요태 노래 같길 바라게 되어서 좋았다. 이 재미있는 이야기가 두 권 더 남았다는 사실이 그중에서도 가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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