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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동아시아사의 서유럽모델론 비판, ‘소농사회론’
1장 ‘소농사회론’을 구상하기까지 나의 연구 이력, ‘도쿄에서 서울로’ 식민지근대화론자라는 뜻밖의 오해 ‘소농사회론’이라는 가설 2장 동아시아 소농사회의 형성 주자학과 소농사회 소농사회의 형성과정 소농사회, 동아시아 역사의 분수령 3장 ‘소농사회론’그 이후의 공부 호적대장과 역사인구학 동아시아 속의 한국과 일본 나의 연구 정리 2부 동아시아에서 본 조선시대 4장 사대부와 양반은 왜 토지귀족이 아닌가 양안, 검지장, 어린도책 비교 한ㆍ중ㆍ일 토지대장의 공통성 특권적 토지 지배의 소멸 5장 조선시대 신분제 논쟁 왜 신분인가? 중국과 일본의 신분제 유형 양반은 신분인가? 6장 양반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지배계층의 정의 과거시험, 양반으로의 도약대 문과급제자, 특정의 소수가문이 독점했을까? 문중별 문과합격자 분석 조선시대 지배계층 재생산 메커니즘 7장 한국의 역사인구학은 가능한가? 인구사와 역사인구학 외국의 역사인구학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한국 역사인구학의 과제 8장 사회적 결합에서 본 동아시아 사회적 결합을 비교하는 의미 가족, 친족 결합의 비교 조선시대 ‘계’와 사회적 결합의 특징 3부 동아시아사의 가능성 9장 민족주의와 문명주의, 3ㆍ1운동에 대한 새로운 인식 「독립선언서」 조선민족대동단의 「일본국민에게 고함」 일본의 태도 10장 ‘화혼양재’와 ‘중체서용’의 재고 『미구회람실기』와 ‘항해술기’에 대해 일본, 중국과 구미의 만남 그리고 그 비교 ‘화혼양재’와 ‘중체서용’에서 ‘동도서기’로 11장 유교적 근대로서의 동아시아 근세 ‘동아시아 근세론’의 문제점 주희와 중국적 근대 동아시아의 유교적 근대 12장 역사학자의 소설읽기, 황석영의 소설 『심청』 화폐와 여성 19세기 후반이라는 시기 설정 동아시아에서 구미의 존재를 어떻게 자리매길 것인가 왜 심청인가? 현실은 소설보다도 더욱 복잡하고 중층적이다 4부 21세기 동아시아학과 한국학을 위한 제안 13장 동아시아세계 속의 한국학 ‘지역연구’ 비판 동아시아사 연구에서의 유럽 중심주의 동아시아사 속의 한국사를 위하여 14장 21세기 동아시아 연구와 대학의 역할 동아시아 각국의 대학 편성, 그 문제점 전통과의 단절을 왜 문제시해야 하는가? 전통과 근대의 이분법을 넘어서 참고문헌 미주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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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에서 소농사회가 성립함과 더불어 형성된 사회구조의 여러 특징은 종래 ‘전통’이라는 말로 일괄적으로 통칭되어왔다. 그리하여 전통과 근대,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에 좀 더 높은 가치관을 발견할 수 있는지의 구별은 있더라도, 이 둘을 대립시키는 것이야말로 일본의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의 전제가 되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먼저 첫 번째로, 전통이란 것은 동아시아의 오랜 역사에서 본다면 지극히 새로운 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결코 아주 오래된 옛날부터 존재해온 것이 아니라 14~17세기에 걸쳐 일제히 형성된 것이며 세계사적으로 보면 그것은 오히려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해당한다. 두 번째로, 전통은 근대에 의해 해소되거나 소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상은 오히려 그 반대이며 전통이라는 것의 대부분은 근대 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때로는 강화되기도 했다. 원래 전통이라는 것이 의식된다는 것 자체가, 그것이 소멸해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의미 있는 것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오랜 기간에 걸친 사회변동을 거시적으로 볼 때, 그 최대의 분수령은 전근대와 근대의 사이가 아닌 소농사회 성립의 전후에, 달리 말해서 전통의 형성 이전과 그 이후 사이에 두어야 한다. 그리하여 1990년대 중엽이라는 현재의 시점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소농사회 성립기에 필적하는 제2의 대전환기의 출발점에 해당된다. ---p.81 매년 29.2명의 문과급제자가 배출되어 평균적으로 30년 생존했다고 가정한다면 어느 시점에서든 867명의 문과급제자가, 그래서 대략 계산하면 약 900명 정도가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900명의 자리를 둘러싸고 양반들이 경쟁했다는 것이 되는데, 그 경쟁률은 어느 정도였을까? 양반의 전체의 수를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전체 인구수를 1천만 명, 인구의 5~10%가 양반 가문에 속했다고 가정하면, 50만~100만 명이라는 숫자를 얻을 수 있다. 이 가운데 과거 수험 자격이 없는 여성과 실질적으로 수험이 불가능한 어린 남자(17세로 문과에 급제한 것이 최연소 기록이다.)를 제외하면, 20만~40만 명 정도가 문과 수험 유자격자였다고 상정할 수 있다. 이들이 900명 중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경쟁한 셈이다. 얼마나 격렬한 경쟁이 벌어졌을 것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일본의 도쿠가와시대에 비유하면, 900명이라고 하는 최상층의 무사-300명 정도의 다이묘와 가장 유력한 하타모토의 수를 합치면 비슷한 인원수가 될 것이다-의 지위를 둘러싸고 수십만 명의 무사들이 경쟁을 펼쳤다고 상상해 보면, 조금은 실감이 느껴지지 않을까? 물론 일본에서 최상층 무사의 지위는 세습으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과거에 의해서 관료가 선발되는 조선사회의 양반과는 그 성격이 크게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격렬한 경쟁이 장기간에 걸쳐 가능했던 이유는 일본의 전국시대와 같은 ‘무’가 아니라 ‘문’에 의한 경쟁이었기 때문이다. ---pp.186-187 『심청』을 읽기 시작할 때 필자는 막연하게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16세기나 17세기쯤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아시아를 무대로 심청을 쓴다고 할 때 16~17세기가 가장 알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선입견 탓일 것이다. 그 때문이었는지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도 작가가 왜 19세기로 그 시기를 설정했는지 의문이 남는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앞에서도 언급했던 바이지만 심청이 편력을 가능케 한 것은 당시 국제적인 화폐의 흐름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화폐들은 거의가 은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동아시아 지역에 있어서 은의 폭발적인 유통이 시작된 시기는 16세기였다. 당시 은의 유통은 아메리카 대륙과 일본 열도에서 은이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가능해졌는데 그 은은 아시아, 특히 중국의 상품인 차, 생사, 비단, 도자기 등을 구입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수연(垂涎)의 대상이었던, 이 세계적인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세계 화폐로서의 은이 지구를 돌아다녔던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세계 경제의 탄생을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중략) 작가가 이 소설의 무대를 19세기 중엽으로 설정한 이유는, 구미의 존재를 중시하고 그것이 오늘날 동아시아의 많은 분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필자는 19세기 이후의 동아시아는 그 이전부터의 연속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작가가 전통과의 단절을 강조하고 더욱이 서양의 충격 이전의 시기를 심청으로 하여금 그립게 회상할 수 있는 시대로 묘사하는 시대 파악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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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치 있는 연구에도 고려-조선의 왕조 교체에서 변화와 지속의 문제와 관련해 포괄적인 비판적 검토는 없었고, 내재적 발전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지방 향리 출신의 중소 지주라는 배경 아래 정주학을 이념으로 선택했으며 친명 대외 정책을 옹호한 신흥 사대부가 흥기한 결과로 그 사건을 해석했다. 그들은 부재의 대지주로서 사상적으로 불교에 찬동하고 친원 외교 정책을 추구했던 중앙에 기반을 둔 귀족들로 구성된 오래된 지배층을 전복시키고 권력을 잡았다고 해석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고려-조선의 이행에 관련된 여러 특징을 ‘신흥 사대부’론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생각을 점차 굳히게 되었다. 첫째 평양 조씨 출신의 조준과 황려 민씨 출신의 민여익처럼 고려의 주요 가문 출신의 여러 인물은 1392년 이후에도 고위 관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둘째 14세기 후반 조정을 장악한 이인임 같은 ‘구 귀족’은 명과 견고한 관계를 맺었고 그들에게서 거절될 경우에만 원에 귀부하는 유연하고 실제적인 외교 정책을 추구했다는 사실이었다. ---pp. 18~19
고려-조선 교체기의 주요 양반 가문이 그들의 영속적인 거주지를 어디에 유지했는가 하는 문제에 좀더 결정적인 대답을 제공하려는 목적에서 필자는 1392~1405년 동안 가장 주요한 10개 가문의 족보에서 묘소에 관련된 자료를 모아 분석했다. 필자는 고려 후기 관원 58명과 조선 전기 관원 39명의 묘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고려 후기 관원 58명 중 45명은 우봉, 장단, 풍덕 같은 지역을 선호해 수도 주위에 묻혔고, 수도 주위에 묻히지 않은 13명 중 8명은 본관 지역(안동, 문화, 파주, 여주), 3명은 한양 주위, 2명은 청주에 묻혔다. 조선 전기 관원 39명 중 29명은 한양 일대에 묻혔는데, 이것은 옛 고려 수도와의 일정한 지역적 연결을 보여주며, 나머지 6명은 남쪽의 남원부터 북쪽의 평산에 이르는 다양한 지역에 안장되었다.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의 가장 유력한 양반은 수도 주위에 계속 항구적으로 거주한 것으로 나타났다. ---p.206 고문과 정주학이 결합된 접근이 14~15세기에 일반적인 사상적 경향이 된 까닭은 무엇인가? 어떤 학자들은 형이상학에 초점을 맞춰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의 정주학의 불일치가 두드러진 까닭은 정주학에 대한 이해가 미숙한 것을 반영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한국인은 기대승, 이황, 이이 같은 인물들이 성리학의 형이상학과 관련된 담론을 발전시키기 시작한 16세기 중반까지 정주학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특히 14세기 후반 권근의 『입학도설』에서 신유학의 형이상학을 설명한 사실을 감안하면, 한국인이 성리학의 형이상학에 관련된 논쟁에 참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정주학을 이해하는 데 250년 넘게 걸렸다는 것은 수긍되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문학의 본질과 역할에 관련된 고문적 태도의 존속은, 정주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초기 사상적 전통의 흔적이 남아 있던 것일 뿐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런 주장의 문제점은 한국의 양반에게 영향을 준 고문은 문학에 관련된 생각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14~15세기의 양반 개혁자들도 정주학보다 고문에 가까운 정치적 태도를 나타냈다. ---pp.370~3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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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두 가지 중요한 가설을 검증하는 데 목적이 있다. 첫째, 조선 후기 한국의 사회상이, 윤곽을 대략 파악할 수 있는 고려시대 한국의 사회상과는 뚜렷이 다르다는 가설이다. 이렇듯 현저한 차이는 틀림없이 한국 사회가 고려 후기부터 조선 중기까지의 전환기에 일어난 근본적 변동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이러한 변동을 일으키고 연출한 원동력은 정치적 또는 경제적 요소가 아니라-정치적 또는 경제적 영역에서는 지속성이 상당하다- 신유학이라는 가설이다. 고려 후기부터 중요한 지적 영향력을 행사해온 중국의 신유학은 한국의 학자 관료계급(사대부)에 사회조직에 대한 특별한 이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들이 이것을 환경에 이식하는 데 필요한 기준이 되었다. 그리하여 새로 시작된 한국 사회의 재조직화는 다른 어떠한 곳에서도 사회적 행동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울 정도의 깊이와 넓이에 이르렀다. 이것은 시기나 연대를 산정할 수 있는 어떤 단일한 사건과 결부되지 않았으므로 특정 시기의 것도 아니고 명칭도 없다. 그런데도 한국의 유교를 기초로 한 변동은 한국 역사에서 획기적인 변화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린 것이다.--- pp.21-22
고려에서 사람들이 성장하는 데 가장 있을 법한 사회 환경은 모친이 원래 출생한 집단에서 성장한다는 사실이다. 부친은 혼인하면서 정치적·경제적 이유에서 신부집으로 이주할지 선택하였다. 처가 거주제도〔婦處制〕는 고려에서 흔한 일이었다. 거주지를 선택하는 데 뚜렷한 제약은 없었다. 처가 거주제도냐 본가 거주제도〔夫處制〕냐에 관계없이 부모의 거주 형태가 아이들의 신분을 결정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집에서 아이들은 어머니 쪽 친족에 둘러싸였다. 어머니의 남자형제들은 출생 서열에 따라 각기 다른 혈연 용어로 구분되는데, 이들은 아마도 아이의 인생 초기에 중요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중 한 사람이 아마도 미래의 장인이 되었을 것이다. 외사촌과 혼인하는 일이 적어도 고려 초기에는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선호까지 한 것 같다. 집안의 연장자는 외조부모로, 이들의 사랑과 관대함에 상응하여 1년 동안 상복을 입는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pp.116-117 서자 차별은 부분적으로 한국의 제사에서 사용되는 규제방식의 직접적 결과이다. 중국에는 이와 대응하는 것이 없었다. 아버지의 아들로 인정받더라도 서자는 모친의 지위가 낮아서 계보 면에서나 사회적인 면에서 유대가 약했으므로 서자 출계집단은 서자를 주변화했다. 그러므로 서자는 기껏해야 자신의 아버지 계통을 잇는다는 수준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었으나, 조상을 돌보는 일을 맡을 수 있는 자격을 갖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중략) 여성의 경우에도 비슷한 이유로 더 나을 것이 없었다. 조상들, 다시 말해서 그 자신과 남편의 조상에 대한 여성의 위치는 애매하였다. 여성이 그들 자신의 출계집단의 실제 일원이었던 조선 전기에는 남자형제들과 제사 책무를 나누어 맡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여성이 남편 출계집단에 차츰 병합됨으로써 상징적으로나 때로는 지리적 거리에서도 자신이 출생한 집과 거리가 멀어졌다. 조상들에게서 분리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상속권 상실을 초래하였다. 혼인한 여성은 남편 조상에게는 낯선 존재였다. 그러므로 여성에게는 결코 자신의 인족의 사당에서 의례에 참여하는 자격이 부여될 수 없었다. --- pp.385-3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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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농사회론’과 40년 한국사 공부의 집대성
“한·중·일 역사 비교를 통해 찾은 한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 『양반』의 저자이자 궁도박사(宮嶋博史)로 잘 알려진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성균관대학 동아시아학술원, 도쿄대학 명예교수), 그가 처음으로 제창한 이론이자 동아시아사와 한국사의 서유럽모델론 비판인‘소농사회론’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40년 한국사 연구 성과를 한글로 써서 집대성한 『미야지마 히로시, 나의 한국사 공부』를 펴냈다. 식민지근대화론자인가? - ‘도쿄에서 서울로’ 그의 앎을 향한 이력 식민지근대화론자라는 오해를 받으면서도 도쿄대학 교수를 박차고 성균관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화제가 된 바 있는 것처럼 미야지마 히로시는 한국사와의 인연이 남다른 역사학자이다. 이 책의 1부는 ‘소농사회론’이란 담론을 전후한 문제의식의 변화과정에 관한 경위, 즉 역사학자로서 그의 연구이력서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학원분쟁’(60년대 말부터 일본에서 크게 일어난 학생운동)이 휩쓸 당시 교토대학을 다닌 그가 한국사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부락문제연구회’라는 서클활동에서 만난 재일한국인(조선인)과 그에 대한 차별문제였다고 한다. 대학원을 진학하자 그의 주임교수는 “미야지마 군, 한국사를 공부하는 것은 좋지만 대학에 취직할 것은 단념하게.”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는 기억에서부터 한국어 문법과 발음을 배우던 이야기, 그리고 그의 첫 성과이자 저작인 『조선토지조사사업사의 연구』(도쿄대학 동양문화연구소, 1991년)가 나오기까지 교토에서 도쿄로, 도쿄에서 다시 서울로 이어진 그의 앎을 향한 이력이 마치 지도에 그린 듯이 선명히 다가온다. “당시 규장각은 서울대 도서관 1층에 있었는데 양안을 보려면 마이크로필름을 빌려가지고 4층으로 가서 봐야 했다. 내가 한국에 온 그 무렵에는 학생운동이 활발해서 도서관 앞 광장에서는 매일같이 집회가 있었다. ‘아침이슬’ 노래가 끝나면 곧 데모가 시작되고 경찰이 최루탄을 쏘는 그런 나날이었다. 도서관 안에서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왜 이런 연구를 하고 있는가를 반복해서 자문할 수밖에 없었다. 월드컵 응원, 촛불시위가 있을 때면 1987년 6월의 그 열기가 다시 떠오른다.” 첫 책이 출판된 직후인 1991년 4월 그가 다시 한국에 왔을 때 흥미롭게도 국내학계는 그를 ‘식민지근대화론자’로 각인한다. “오자마자 내 책에 대해 한국학계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비판의 주된 내용은 토지조사사업을 근대화를 위한 사업으로 평가한 내 입장에 대한 것이었다. 이런 비판은 나에게 그야말로 뜻밖이었다.” 미야지마 교수에게 덧씌워진 ‘식민지근대화론’이란 간단히 말해 일본의 식민통치가 한국 근대화를 이룩한 원동력이었다는 일제미화론이다. 미야지마 교수의 반론은 이렇다. “토지조사사업이 한국의 토지제도를 근대화시켰지만 그것은 일제의 혜택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이미 수조권적 토지 지배가 해체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한국사학계의 주류적 견해인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하여 토지조사사업을 토지수탈을 위한 것이라고 파악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라 꼬집는다. 왜냐하면 조선후기 부농형의 토지소유가 발전했다면 토지조사사업이 시행되었던들 쉽게 토지를 약탈당했을 리 없을 것이고, 사업 자체가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 보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농민들이 토지를 대량으로 상실했다는 견해만큼 당시의 농민을 우습게 보는 시각도 없다. 이러한 견해가 일제를 미화한 것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지금도 도저히 납득하기 힘들고, 내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미야지마 교수의 입장을 정리하면,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한국 토지제도를 근대화시킨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한 토대는 조선시대 토지제도 자체가 근대화에 도달할 만큼 이미 성숙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농사회론’의 결정판,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모습과 근대 이행과정의 특질을 밝히는 것” 과연 그는 ‘일제미화론자’인가? 『미야지마 히로시, 나의 한국사 공부』에는 그를 향한 각종 비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어떠하며, 역사학자로서 구축하려는 역사상이 무엇인지를 잘 집약하고 있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동아시아 소농(小農)사회론’이다. 1994년 「동아시아 소농사회론의 형성」이란 논문으로 처음 제기한 이 담론의 목적이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모습과 근대 이행과정의 특징을 파악하는 것”이라는 미야지마 교수는 “얼핏 보면 시대와 지역에 관계없이 소농사회는 극히 보편적인 존재라고 생각되지만 17~18세기의 동아시아에서처럼 소농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사회는 오히려 예외적”이라 한다. 소규모 자급자족농민들이 밀집해 살고 있던 동아시아는 대규모 부농 중심의 서구와는 다른 형태의 사회였으며, 그래서 근대화의 길도 달랐다. 중국에서는 명대에, 한국과 일본에서는 17세기경에 성립한 동아시아 소농사회는 단순히 농업 기술상의 변혁이나 농촌 구조상의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거시적으로 보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동아시아 사회구조의 특질은 이 소농사회의 성립과 더불어 생겨난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동아시아의 역사를 소농사회의 성립 전후로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을 정도로 획기적인 변화였기 때문이다. 소농사회의 성립을 전후로 하는 동아시아 사회구조의 대변동에 비한다면 전근대로부터 근대로의 변화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작은 것이었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근대는 실로 많은 것을 소농사회의 유산에서 힘입었다고 볼 수 있다.” 『미야지마 히로시, 나의 한국사 공부』는 저자가 2002년 도쿄대학에서 성균관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 지난 10년 동안,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양상, 그리고 이와 깊이 결부되어 있었던 양반의 존재양식, 나아가서 신분제의 독특한 양상, 토지소유와 신분과의 분리, 인구사와 가족사 등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일본과의 비교를 통해 조선시대의 특성을 규명한 책이다. 다시 말해 ‘소농사회론’의 각론까지 집대성하여 담아낸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저자의 문제의식과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중·일 동아시아 3개국의 근대는 ‘소농’을 기반으로 한 사회라는 것이다. 중세유럽의 영주계층이나 무굴제국 시기 인도의 자민다르(페르시아어로 ‘토지소유자’라는 뜻)와는 달리 소농에 대비되는 거대 토지귀족이 없다는 점을 동아시아 근대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는다. 둘째, 따라서 소농사회론은 ‘고대-중세-근대’라는 시대구분을 무너뜨린다. 자연히 서구사회에서 근대의 이행 전단계인 봉건제가 동아시아에는 없었다는 봉건제 부재론’으로 연결된다. 3분법은 철저히 서구적 기준인데, 그동안 동아시아 근대의 기준으로 고민 없이 고스란히 베껴왔다는 것이다. 셋째,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주희의 사상, 즉 주자학을 동아시아 근대의 수은지로 본다는 점이다. 사회의 토대인 ‘소농’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지의 관점에서 볼 때 주자학은 세계사적으로 비교해 보아도 가장 선진적인 이론 체계로 종래 부정적으로 평가해왔던 이 역사적 경험을 재평가하자고 한다. “특권적 토지소유가 없는 것이야말로 양반과 조선시대의 실상을 밝히는 핵심” 『미야지마 히로시, 나의 한국사 공부』는 동아시아라는 세계사에서 본 조선시대와 한국사의 특징을 밝히는 책이다. 저자는 조선시대를 봉건사회로 보고, 조선후기를 봉건제 해체기로 파악하는 한국역사학계의 주류 견해인 내재적 발전론에 대해 비판적이다. 한국의 근대는 19세기 개항 때부터가 아니라 소농사회가 형성되는 16세기부터이기 때문이다. 경영형 부농의 출현과 신분제 해체를 골간으로 한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지배층으로서 양반을 서구의 귀족과 동일시 한 논리로 조선시대의 발전 모델을 서유럽에서 찾으려 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조선시대 양반은 서유럽의 경우처럼 토지귀족이자 특권신분이었을까? 이 책에서는 조선시대의 양안(量案), 명·청시대의 어린도책(魚鱗圖冊), 도쿠가와시대의 검지장(檢地帳) 등 한중일 3국의 토지대장을 비교 검토한다. 미야지마 교수는 조선후기 양안(量案)과 호적대장에 양반과 평민이 나란히 토지소유자로 기재되어 있음에 주목하면서 토지귀족이 없었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사정은, 다시 말해 토지귀족 부재 현상은 세부적 차이가 있을지언정 큰 틀에서는 중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특권적 토지소유가 없는 것, 이것이야말로 양반과 조선시대의 실상을 밝혀내는 핵심이라 지적한다. 따라서 저자는 ‘양반’을 과연 신분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양반이란 지위는 국가의 법제적 규정도 아니고, 양반으로서의 근거나 양반들끼리의 격(格)의 상하를 결정하는 기준도 없었기에, 양반계층 내부의 경쟁이 격렬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의 ‘조선시대 신분제 논쟁’과 함께 ‘양반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등의 논문을 통해 중국의 사대부와는 다른 조선시대 양반이라는 특수한 성립과정을 살피는 가운데 조선왕조가 500년이란 오랜 기간 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것도 양반의 존재 양식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 말한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 비교를 통해 토지소유와 국가체제, 신분제, 지배계층, 가족과 친족 등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 한국의 역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밝히고 있다. 이는 경제사연구에 중점을 두고 사상사까지 연구를 확장해온 역사학자로서 미야지마 교수의 연구이력이 아니고서는 거의 불가능한 성과가 아닐까? “한국의 가족, 친족 결합의 특징을 동아시아 3국의 비교라는 관점에서 자리매김 해보면, 일본의 명사적 관계 그리고 중국의 형용사적 관계의 중간적 성격을 가졌다고 하겠다. 남자의 균분 상속이라는 형용사적 관계를 한편으로 유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장남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는 명사적 관계를 중시한 독특한 가족, 친족 결합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30쪽 동아시아의 유교적 근대, 동아시아 역사상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 이 책의 후반부는 주로 근대 개항기를 대상으로, 소농사회로서의 동아시아가 서구의 근대와 만나는 과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관한 글이다. 특히 이 책 11장의 ‘유교적 근대’라는 개념은 근대의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가 소농사회론 이후 도달한 현 단계의 획기적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요지는 다음의 다섯 가지이다. 첫째, 근대라는 개념은 본래 현재와 직결되는 시대라는 의미이며, 시대구분에서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근대 이전과 근대의 구분이라는 점이다. 둘째, 이제까지의 패러다임에 의거하여 중국의 역사와 현재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유교적 근대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서 다시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 유교적 근대의 핵심에 있는 중국적 근대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주희의 사상이 지닌 근대성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고, 넷째, 중국적 근대는 명대에 확립되었지만, 그 기본구조는 19세기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섯째, 중국적 근대의 영향을 깊이 받은 동아시아 지역들의 역사도 유교적 근대라는 개념에 기초해서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점 등이다. 저자는 서구적 근대가 상대화되고, 유교적 근대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이슬람적 근대, 나아가 인도적 근대 등 다양한 근대 개념이 병존하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라면, 그로부터 근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이념과, 그 이념에 기초한 사회를 구상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인류의 미래가 걸려 있다는 생각을 제시한다. “명대 이후를 근대로 보고, 서구의 근대와 대등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근대 중국에 관해서도 완전히 다른 상을 그려낼 수 있다. 중국에서 서구적 근대의 수용이 그토록 어려웠던 것은 결코 중국이 뒤쳐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중국에는 별도의 근대가 이미 존재해 있어서, 공동체 등 중간단계의 존재를 부정한 중국의 근대가 공동체를 기초로 한 서구의 근대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구적 근대가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이념 아래 모든 중간단체, 나아가서는 국민국가마저도 부정하는 방향으로 번져가는 가운데 벌거벗은 개인을 기초로 하여 사회질서를 어떻게 형성해나갈지의 문제가 새로이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는 중국이 천년 이상 씨름해 왔던 과제였다.”- 343쪽 저자의 말 ‘소농사회론’은 조선시대를 봉건사회로 보고 조선후기를 봉건제 해체기로 파악하는 내재적 발전론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재적 발전론도 전전(戰前)의 일본 봉건제론과 같이 유럽모델을 한국사에 적용한 것이고, 일본 봉건제론이 이데올로기적인 것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내재적 발전론도 이데올로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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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통설, 조선왕조의 ‘신흥 사대부’ 건국론에 도전한다
획기적인 연구이며…… 조선왕조의 본질과 기원에 관련된 기존의 여러 통설을 뒤집는 독창적이고 원숙한 업적이다. - 제임스 B. 팔레, 워싱턴대 교수 “이 책의 통계적 증거는 조선전기 지배층의 구성에 관련된 이전의 견해가 틀렸다는 의견을 제기한다. 던컨은 지금까지 가장 풍부한 증거를 모았다. - 마르티나 도이힐러, 런던대 교수 한국사의 최대 전환기였던 1392년의 ‘고려-조선왕조 교체’,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처럼 역사적 중요성이 전혀 없는 단순한 궁중반란인가? 아니면 신흥 사대부가 고려의 구세력을 축출하고 새 시대를 연 일대의 사회혁명인가? 조선왕조가 그 이전의 과거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는 사회였음을 제목에서 암시하는 이 책의 주장은 무엇일까? 1966년 미군으로 한국에 와 비무장지대 부근에서 근무한 뒤 고려대에서 한국사 공부를 시작한 이래 40여 년 동안 한국을 바라본 친한파이자, 1989년부터 UCLA 교수로 재직하며 지금까지 24명의 한국학 박사를 배출하며 현재 서구에서 한국 역사학을 이끄는 존 던컨 교수. 그는 이 책에서 조선왕조의 뿌리를 고려왕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조선의 건국을 단순한 왕조교체로 보지 않고 한국사회의 질적 변화로 인식해 온 통설을 뒤엎는 것이다. 이 책의 고려-조선왕조 교체에 대한 핵심요지는 고려전기부터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의 완성으로, 고려의 중앙관료귀족이 지방의 귀족인 향리를 완전히 제압한 기나긴 역사적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던컨 교수는 조선의 건국에 대해 “지방에 근거한 향리 출신의 지배층이 타락한 옛 중앙 귀족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중앙의 관료적 귀족이 지방 자치적이며 향리 중심적인 신라-고려 교체기의 옛 제도에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둔 것”이라 한다. 저자는 40년 한국사 공부 역량을 총동원한 이 책이 한국에서 출간된다는 소식에 접하며 “한국사 통설인 신흥 사대부설에 정면 도전하는 연구로서, 다시 여말-선초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조금이라도 불러일으켜 이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에 대해 더 좋은 해석이 나오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한다. 고려와 조선의 정치 엘리트집단은 뿌리가 같았을까? 현행 국사 교과서를 포함하여 학계의 통설에 따르면 조선왕조를 창건한 주도세력은 고려 말에 대두한 ‘신흥 사대부’였다. 이 새로운 엘리트집단은 지방의 중소지주였고, 향리 출신이었다. 과거시험을 통해 중앙관계에 진출하였으며,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신봉자들이었다. 이들은 대지주이자 중앙의 문벌귀족이며, 불교를 신봉하던 종래의 엘리트집단과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배경이 달랐다. 이 이질적인 집단이 구체제와는 다른 ‘새 시대, 새 질서’를 열었다. 따라서 1392년 조선왕조의 성립은 한국사의 질적 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던컨 교수는 이 통설이 허구임을 증명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고려전기(10세기)에서 조선전기(16세기)에 이르는 거의 6백 년 동안 임명된 관료 약 5천 명의 성분을 조사했다. 관심의 초점은 조선왕조를 개창한 엘리트들과 고려시대의 엘리트집단 사이에 뚜렷한 단절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이었다. 그동안 1351년 공민왕 때 신흥 사대부가 중앙관계에 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던컨 교수의 연구결과는 그와 큰 차이를 보인다. 그는 조선전기의 주요 양반가문으로 38집안을 지적하였는데, 그중 9집안만이 1351년 이후 관계에 진출한 것으로 판명된다. 이들 가문과 공민왕 이전에 약간 명의 관리를 배출한 7집안까지를 더한 16집안을 던컨 교수는 신흥 사대부로 일단 가정해 놓고 보다 정밀한 검토 작업을 꾀한다. 그 결과, 이 16집안조차도 조선 초기 중앙관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았고 왕조 교체의 주역은 더더욱 아니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고려 말에 ‘신흥 사대부’ 같은 새로운 엘리트집단의 출현은 없었다는 것이다. 고려후기 권문세족과 신흥 사대부가 서로 대립하였다든지 권문세족이 도당(都堂)의 핵심이었다는 견해에도 던컨 교수는 동의하지 않는다. 권문이란 당시 사회에서 비난의 대상이 된 세력가 개인 또는 그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에 비하여 세족(世族)은 전통 깊은 귀족으로서 그들이 다름 아닌 사대부였다. 고려 말의 정치현실을 보면, 세족이 중심을 이루는 도당이 세족의 일부 구성원을 권문이라 하여 공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기원』의 한국사 통설에 대한 비판은 계속된다. 흔히들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고려의 귀족이 대거 숙청되었다고 믿고 있으나, 그 역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고려 말의 유명한 귀족 가운데 조선왕조가 등장함으로써 몰락한 가문은 겨우 셋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도 16세기경까지 관계에 복귀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여말선초의 신흥 사대부는 문반이며, 과거에 급제한 관리로 보는 견해에 대하여도 던컨은 이의를 제기한다. 조선초기의 재추(재신과 추신, 즉 고위 관료) 중에서 20%는 무반 출신이었고, 조선초기에도 음직(蔭職)은 여전히 출사의 중요한 통로였다는 것이다. “중소지주이자 향리 출신인 신흥 사대부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왕조를 건국하였다.”고 하는 역사적 해석에 대해 호된 비판을 하는 저자는 고려 말의 대표적인 귀족가문의 후손들이 조선전기 지배층의 주류였음을 실증해 내고 있다. 성리학이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이었을까? 소위 신흥 사대부가 조선왕조를 창건한 주역이 아니었다면, 과연 성리학은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이었을까? 던컨 교수는 여말선초의 한국지성계가 기존연구에서 밝혀진 것보다 훨씬 복잡 다양하였다는 점을 증명한다. 11세기 말 12세기 초에는 경세와 고전 중심의 유학이 발전하였고, 1170년 무인정권이 수립된 뒤에는 상당 기간 동안 사장(詞章)을 숭상하는 풍조가 두드러졌다. 그렇지만 여러 학풍이 혼재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고문학(古文學)은 김황원과 김부식이 대표하였으며, 12세기 사상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그 뒤에는 북송의 고문학자 소식의 인기가 일세를 풍미하였다. 그 고문학의 전통이 연면히 이어져 이제현, 이곡, 이인복 등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제현은 고문학과 성리학에 모두 정통하였다. 조선전기 성리학자로 이름난 김종직도 마찬가지였으며, 15세기 후반 한국의 저명한 유학자들은 대체로 그러하였다고 한다. 불교와 고려후기 양반의 관계는 대단히 밀접하였다고 하는데 그런 사정은 조선전기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성리학자로 유명한 권근의 형도 승려였으며 조선의 왕실이 불교를 후원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조선왕조의 기원』은 한국사회가 성리학 중심의 사회로 가는 과정에 있어서 조선 초기는 한당유학과 성리학이 공존하는 일종의 과도기였다는 것이다. 그만큼 사상사적인 변화에 있어서도 점진적이었다는 점을 그는 강조한 것이다. 사실 그동안 학계에서 성리학이 왕조교체의 이념적 무기였고 조선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다는 주장이 철저히 검증 받은 적이 없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고려-조선 왕조의 지적 전통이 복합적이었다는 던컨 교수의 주장은 경청할 만하다. 고려-조선왕조 교체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고려-조선왕조 교체가 지배층의 교체도, 사상적 변화도 동반하지 않았다면, 왕조교체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던컨 교수는 고려와 조선의 지배층이 높은 연속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새 왕조 건국에 수반된 개혁의 본질을 근거로 하여 “조선의 건국은 지방자치를 극복하고 중앙집권적인 관료적 정치체제를 수립하려는 고려 전기의 노력이 거둔 궁극적인 열매”라 한다. 한국의 역사에서 ‘장기적 지속성’을 찾아내려는 던컨의 다각적인 노력은 실로 감탄할 만하다. 고려-조선의 왕조교체가 연구의 주된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그는 연구대상을 시간과 공간을 크게 확장시킨다. 7세기의 통일신라로부터 시작해서 16세기 조선에 이르기까지 1,000년의 한국역사를 해부한다. 중국의 당, 오대, 송, 원 및 명의 권력구조, 지배세력 및 통치이념의 변천을 밝힌 최근의 중요한 연구업적도 두루 참고한다. 시간과 공간으로 멀리 확장된 던컨의 비교사적인 관심은, 그러나 분산되어 흩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의 연구의 주된 대상은 고려-조선의 왕조교체이다. 그는 한국사의 정치, 경제, 사회와 문화 네 가지 측면의 상호관계에 주목하면서도 정치체제의 변화, 다시 말해 한국의 중앙집권적 관료제도의 형성과정을 구명하는 데에 연구역량이 총집결된다. 『조선왕조의 기원』에서 던컨 교수는 신라 말에서 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과거제도의 출현과 그로 인한 지배층의 성격변화를 매우 중요한 변동으로 파악하였다. 동시에 신라 말 무인적 배경을 지닌 지방호족 세력이 고려왕조의 출현과 과거제도의 실시로 문민적 중앙귀족 관료제로 전환되는 과정을 중시한다. 그러나 고려시대 중국적 관료제를 수용하였다 하더라도 전통적으로 뿌리 깊은 지방 세력을 완전히 제압할 수는 없었기에, 지방통치에 있어서 지방토착세력인 향리들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인적, 물적 자원에 대한 통제력을 두고 국가의 공권력과 지방 세력가 사이에 대립과 경쟁관계를 남겨둘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건국으로도 지배세력의 전면적 교체가 있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두 왕조의 지배세력의 구성이라는 면에서 일체성이 더 강하였음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던컨 교수는 조선왕조의 창건으로 한국사회의 중앙집권화가 더욱 강화되어 갔다는 점에서 중요한 발전을 이룩하였다고 강조한다. 이런 결과를 놓고 볼 때 그동안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론은 실증적 토대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에 맞선 민족주의적 당위론에 따른 목적론적 요인이 강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발견한 것만으로도 한국사회를 정체적이라 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일침을 가한다. 기다렸던 역사담론, 던컨 교수의 ‘장기적 지속성’론 해방 후 한국 역사학계의 과제는 식민사학의 청산이었다. 고려-조선왕조 교체가 단순한 권력투쟁의 결과라는 매우 부정적으로 해석했던 시각이, 해방 후 긍정으로 달라지는 가운데 1960년대 말에 새로이 등장한 사관이 ‘내재적 발전론’이다. 이 시각에 따르면 한국사의 각 시기마다 새로운 사회세력이 등장해서 역사를 주도해 간 것으로 한국사가 체계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역사상 주도세력의 변천을 강조하는 발전사관은 점차 한국사학계의 주류로 성장했다. 고려시대의 호족-문벌-권문세족-신흥 사대부와 조선전기의 훈구-사림 등으로 지배층의 변화를 설명하는 시각은 현행 교과서를 비롯하여 중고등학교 시절 국사를 공부한 분이라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중앙의 지배층이 교체되는 역동적인 사회변화가 일어났다는 내재적 발전론은 식민사학의 극복이라는 모토에 부합되면서 힘을 얻게 되는데, 70년대 말에서 80년대에 조선 건국사에서 지배층으로 떠오른 신흥 사대부나 이후 사림에 대한 연구 또한 이때 이루어진다. 즉 단순한 권력투쟁에 의한 왕조교체가 아니라 다분히 사회혁명적인 요소가 있었음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던컨 교수는 한국사에서 자본주의의 등장이 내부적 발전 논리의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내재적 발전론의 암시에 불만을 느꼈다고 한다.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저자의 비판 배경과 이 책의 집필 동기에 대해 한국어판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1980년대 중엽에 박사학위 논문주제를 고심하던 중 지도교수 제임스 팔레 선생님의 건의에 따라 15세기 후반 사림파의 형성문제를 다루기로 했다. 거기에 대한 여러 학자의 논문을 읽어보니 훈구와 사림의 대립은 사장학을 즐기고 서울에서 거주하는 대지주 계층인 훈구와 성리학을 신봉하고 지방에서 거주하는 중소 지주층인 사림 사이의 대립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15세기 후반의 문제만 놓고 보면 상당히 설득력 있는 해석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겨우 70~80년 전에 불교를 믿고 개경에서 거주하는 대지주였던 고려의 권문세족과 성리학 계통이고 지방 중소 지주 출신이었던 신흥 사대부의 대립과는 어떻게 달랐는가, 조선왕조를 건국했던 신흥 사대부들은 어떻게 됐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어 마침내 논문 주제의 초점을 고려-조선 왕조 교체로 돌렸다.” 이 책은 조선사회의 역동성보다는 안정성을, 단절성보다는 장기지속성에 무게를 둔 서술이다. 갑작스런 변화가 아니라 고려 전기부터 몇 백 년 이상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진행되어 온 장기지속적 변화였다. 지배층 내부의 상당한 연속성의 맥락 안에서 보면, 1392년의 왕조 교체는 혁명이라기보다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수립하려는 10세기의 노력이 4세기 이상 흐른 뒤에 정점에 도달한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기원』은 그동안 한국사의 뼈대를 이룬 ‘내재적 발전론’과 ‘장기적 지속성론’의 학문적 만남의 장이다. 이데올로기적 역사를 버리고 다양한 시각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하게 그릴수록 우리의 한국사에 대한 이해가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40년 동안 한국과 한국사를 바라본 노학자의 역작이 그래서 반갑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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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계중시, 장자우대 상속, 제사의 관행은 언제 형성되었으며,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다시 출간되었으면 하는 책 1순위 - 로쟈(이현우, 서평가) 부계중시, 종손의 가계계승, 장자우대상속, 제사의 관행들은 17세기에 형성되어 20세기까지 존속한 한국 사회의 특징이다. 우리는 소위 ‘전통’이 되어버린 이것이 아주 특별한 발달 과정을 거친 최종 결과물이라는 사실에 대해 아예 모르거나 종종 잊는다. 한국의 유교화 과정은 정말로 획기적인 것이었으며 거대한 변화였다. ‘한국학의 대가’ 스위스인 마르티나 도이힐러(런던대 명예교수)가 내놓은 『한국의 유교화 과정-신유학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나』는 15~16세기 당시 사회에 신유학(성리학)의 도입과 정착이 지속적으로 강력히 추진된 동기는 무엇이었으며, 신유학이 사회 구조에 미친 영향은 어떠했는가에 대한 공백을 메운 최초의 본격 시도였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 책이다. 20여 년이 걸린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역작은 약 150여 종이나 되는 사료와 290여 편의 각종 저작을 인용한다. 특히 사회인류학과 교류하면서 친족, 조상 숭배, 가계계승, 상속, 결혼, 상장례 등 6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고려 초기에서 조선 후기까지 한국의 역사를 통찰하는 가운데 매우 중요한 사실에 도달한다. 1392년 조선의 건국세력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추진된 유교 사회로의 전환이 이후 약 250년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완성되었고, 그 결과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조선의 양반 사회가 적장자 중심의 문중 사회로 재편성되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재구성된 조선 사회는 고려시대의 사회 구조와 확연히 달랐고, 유교사상이 중국 사회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지만 한국에서는 세계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는 『한국의 유교화 과정』 출간에 맞추어 너머북스를 방문한 자리에서 새로운 저서에 대한 계획도 밝혔다. 4~5세기 신라시대부터 한말까지 한국 사회의 기본 단위였던 고유한 씨족 형성과 발전을 구명한 『조상의 눈 아래에서 Under the Ancestors' Eyes: Kinship, Status, and Locality in Pre-modern Korea』를 하버드대 아시아센터에서 출간할 예정이다. 도서평론가 로쟈(이현우)가 “다시 출간되었으면 하는 1순위”라 한 이 책은 2003년의 초판이 절판된 이후 저·역자의 노력을 더하여 출간한 개정판이다. 소농사회론을 주창한 미야지마 히로시의 『나의 한국사 공부』, 고려-조선왕조 교체의 역사적 의미를 밝힌 존 던컨의 『조선왕조의 기원』에 이어 2013년 너머북스가 한국사의 새로운 이해를 찾아 펴내는 해외 석학 3부작의 마지막 책이다. 거대한 전환, 신유학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나? 마르티나 도이힐러는 조선왕조의 건국을 단순한 왕조 교체로서가 아니라, 신유학의 이념에 입각한 사대부들의 이상사회 건설을 향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고 있는데, 여기에 바로 『한국의 유교화 과정』의 독특한 점이 있다. 조준과 정도전을 비롯한 조선 건국의 주역들이 의식적으로 과거의 전통과 단절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 했다는 점에서, 저자는 조선왕조의 등장을 중요한 역사적 분기점의 하나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 정치적 배경은 고려후기로 올라간다. 무신정권기와 원 체제를 거친 공민왕 대의 큰 과제는 지금 말로 하면 ‘국정의 정상화’였다. 여기에 동참한 사대부들의 개혁은 조선왕조를 건국하였고, 세종을 거쳐 경국대전이 완성되기까지 150여 년 동안 정치 사회 개혁을 추진하며, 또한 보기 드문 방대한 법률을 제정했다. 이는 새 왕조의 초기에 일반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었다. 저자는 조선 초기의 일련의 입법에 대해 중국에서 11세기 왕안석의 개혁이 실패한 이후 동아시아세계에서 가장 야심차고 창조적인 개혁 시도였다고 평가한다. 조선 초기에 입법을 주도한 이들은 이미 확립된 전통과 어긋나는 개념과 견해를 한국 사회에 도입하려고 했으며, 이에 따라 갈등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렇다면 그토록 과감하게 입법을 밀고 나간 동기는 무엇일까? 한국의 유교화 과정, “전통과 유교를 조화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타협의 산물” 조선 건국의 주역들은 성리학적 이념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함으로써 당시 한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던 정치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였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고려 사회는 친족 구조상 양계적인 사회였고 또한 한 남자가 여러 명의 부인을 둘 수 있었다〔竝妻〕. 역설 같지만 이는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대부분은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 아들들은 모두 신분적으로 동등한 자격을 부여받았다. 게다가 고려 말에는 첨설직이나 검교직의 음직 들을 통한 신분 상승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기존의 사회구성 원리가 계속 통용되는 한에서는 지배층의 팽창이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조선 건국의 주역들이 신유학 이론에 의거하여 적장자가 중심이 되는 문중 사회를 확립하려 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즉 부계 귀속성을 강조함으로써 모계를 통한 지배 신분의 확산이나 사회적 특권의 계승을 저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조선 초기 개혁적인 입법과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 조선 초기에 병처의 관행이 점차 폐지되어 갔다. 그리고 서얼 차별과 같은 중국에 없는 독특한 사회 관습이 생기게 되었다. 이후 양반층의 수가 자연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다수 양반들의 정치적 진출이 전에 비하여 어려워지면서 경제적 기반 또한 약화되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자 양반층은 신유학이 말하는 적장자 중심의 문중 사회 이론을 확대 적용하여 장자우대 상속제를 확립함으로써, 가문의 명맥을 계속 유지하고자 했다. 이처럼 사회 구조와 변화를 지배 이데올로기와 관련하여 검토한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러나 도이힐러 교수가 내리는 결론은 한국 사회가 유교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음에도 완전한 유교사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회의 재편이 신유학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주형에 따라 이루어졌지만, 동시에 한국의 전통적 가치를 일면 보전하면서 타협하는 방향을 선택하였다는 것이다. 그 특징 가운데 중요한 것이 엘리트의 신분이 조선시대에도 계속 양계적인 조건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출계는 부계에 따라 결정되지만 신분, 즉 사회 지위의 정통성은 부계뿐만 아니라 모계를 통하여도 좌우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도이힐러 교수는 “전통과 유교를 조화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독특한 타협의 산물”이었다고 말한다. 여성의 눈으로 본 유교화 과정의 역사적 조류 특기할 만한 것은 조선시대에도 계속하여 모계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고려 말부터 조선 중엽에 걸친 과도기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 책이 고려와 조선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유교 사회로의 전환이라는 큰 역사적 조류를 염두에 두고 파악하려 한 점은 참으로 주목된다. 예를 들면, 고려시대 여성은 결혼 후에도 시댁의 일원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친가의 구성원이었으며 자녀 균분 상속으로 경제적으로도 독립적이었다. 그러나 출계 개념이 양계에서 부계로 바뀌게 됨에 따라 조선시대 여성은 결혼과 더불어 시가의 새로운 구성원으로 간주되었으며, 점차 경제적 독립성도 상실하게 되었다. 심지어 과부가 된 부인은 남편의 사후에 단지 일시적으로 그 유산을 간수하였을 뿐, 재산 처리에 대한 결정적인 권한이 없었다. 이혼이나 재혼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고, 산사의 출입은 금지되었으며, 친정의 방문초자도 특별한 경우에만 허락되는 등 사회적 행동이 전에 없이 많은 제한과 구속을 받게 되었다. 여성의 권위 상실은 가족제도에서 깊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신분제도에도 주목할 만한 변화를 일으켰다. 일례로 적서 차별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한 것이다. 엘리트 여성만이 적자를 낳을 자격이 있고, 사회 지위가 낮은 여성은 첩이 되어 그 자식은 서자(녀)가 되었다. 이는 일견 부계 제도와 모순으로 보이지만 실은 양계 제도가 부계제를 강화한 결과였다. 4조라는 개념에서 이 문제는 쉽게 이해된다. 4조란 부, 조, 증조, 외조를 가리키는 말인데 사대부 가문에서 시가에 들어간 여성만 처가 될 수 있었던 데 반해 첩의 경우에는 외조가(물론 있었지만) 없다고 생각되었다. 즉 처로 간주되는 여성만 자식에게 완전한 양계 제도를, 부계를 약화하지 않고 오히려 엄격한 제도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국학’을 세계에 알린 명저, 사회인류학과 협동하며 중국과의 비교사 시도 한국 사회의 유교화 이전과 그 이후를 비교하기 위하여 저자는 고려시대 친족제도 자체에 대한 해명에 힘을 기울였다. 고려시대의 제한된 사료를 분석하고 심층 해석하기 위하여 사회인류학의 친족제도에 대한 성과를 원용한다. 친족, 조상 숭배, 가계 계승, 상속제, 결혼, 상장례를 기본 축으로 하는 가운데 고려시대 친족의 양계성, 외손이나 타성에 의한 가계 계승, 토지와 노비의 여성 균분 상속, 양계 친족간의 결혼 등을 깊이 있게 다룬다. 부계와 모계, 양계였던 한국의 전통적 친족 구조가 이른바 ‘당내(堂內)’라 하는 부계 문중으로의 변동하는 과정을 해명하는 저자의 작업은 세계적인 사회인류학 연구사에 있어서도 선례를 찾기 힘든 일대 개가로 꼽힌다. 한편 저자는 한국의 유교화 과정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중국 사회(일본 사회와 함께)와 시종일관 비교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전환기의 한·중 사회를 구체적으로 비교하여 얻은 결과 중 흥미로운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 사회는 중국 사회에 비하여 모계가 지니는 사회적 의미가 컸다. 상장례에서 한국은 모계 친족에 대한 배려가 훨씬 많았다. 혼례에서 중국은 신부가 신랑집에 와서 결혼식을 거행하는 ‘친영’이 보편화되었으나 한국에서는 왕실을 제외하면 조선 중기까지도 신부집에 가서 혼례를 거행하고 처가살이를 하였다. 때때로 친영제 시행이 강조되었지만 ‘반(半)친영’을 채택하는 정도에서 타협하였다. 또한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는 관혼상제 중 관례가 별로 중시되지 않았다. 그밖에 고려나 조선에서 신원을 공식적으로 조사할 때면 언제나 4조라 하여 ‘외조’를 포함하는데 반해 중국 사회는 부계에 한했던 것이다. 저자의 말 1967년 가을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한국의 경제발전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생활은 어려웠어도 살아 있는 유교전통을 목격할 수 있어서 참 기뻤다. 당시 내가 한국에 온 목적은 한국의 유교를 공부하자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끔 지방에 내려가서 제사 같은 유교 의례를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한국 사회에 관심이 커짐에 따라 한국의 전통적 사상과 사회를 공부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옮긴이의 말 저자가 제기한 물음은 신분과 계급의 틀에 구속되어 이른바 한국적 ‘구별 짓기’를 간과한 종래 연구에 새로운 지표가 될 것이다. 서구 연구자들의 지적 성과를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중에서도 방대한 자료의 활용과 이론적 성과의 연계, 나아가 동아시아 전반에 대한 비교사적 접근 등에 기초한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의 이 책은 그 정점에 놓여 있다고 보아도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