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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_우리는 왜 동물 탈옥수를 응원하나
1부 길들임과 지배 사이 1장 최초의 협력자: 사피엔스-개 동맹 2장 고래잡이배의 은밀한 거래: 에덴의 범고래 3장 콜로세움에서 멸종하다: 북아프리카코끼리 4장 스스로 길들어 슬픈 동물이여: 은여우, 보노보 그리고 인간 2부 동물정치의 개막 5장 만국의 동물이여, 단결하라!: 당나귀와 말 6장 기계가 지워 버린 생명의 눈망울: 미국 대평원의 긴뿔소 7장 우리는 어디까지 공감할 수 있는가: 잉글랜드의 어린양과 화천의 산천어 8장 그들은 진정한 동물의 대변자였을까: 크라운힐 농장에서 풀려 난 밍크 9장 도그쇼라는 이름의 괴물쇼: 크러프츠의 순종견 3부 동물 영웅 잔혹사 10장 오해와 폭력의 기원, 동물원: 고릴라 하람베와 빈티 주아 11장 군인 194명을 구한 통신병은 행복했을까: 비둘기 셰르 아미 12장 비좁은 수족관이 싫어서, 엄마가 보고 싶어서: ‘살인고래’ 틸리쿰 13장 영웅 혹은 반영웅의 초상: 커스터울프와 늑대 오식스의 최후 14장 사자는 지도를 볼 줄 모른다: 세계를 흔든 세실 4부 동물, 그 자체를 향해 15장 아기 고래야, 제발 가라앉지 마: 탈레쿠아와 17일의 장례식 16장 말하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야: 말하는 유인원 17장 거울 실험과 자의식의 탄생: 서울대공원의 오랑우탄들 5부 앞으로 올 인간-동물 관계 18장 난 죽음의 사자가 아니야: 임종을 예견한 고양이 오스카 19장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를 찾아: 단 하나뿐인 52Hz 고래 20장 침팬지의 절망에 응답하기: 침팬지 루시와 사람 카터 에필로그_지리산반달곰 KM-53의 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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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은 평소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행동하다가도 갑자기 비일상적인 행동을 폭발시킴으로써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들이다. 언제든 파업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노동자에게 권력이 있듯이, 탈출하고 공격하고 파업할 수 있기 때문에 동물에게 권력이 있다. 사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고, 세계를 바꾸는 영향력이 있다. 이 책의 목적은 사자에게 역사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동물이 주체적으로 참여한 공동의 세계를 조명하는 것이다.
---「프롤로그_우리는 왜 동물 탈옥수를 응원하나」중에서 인간이 동물을 바라보는 관점은 몇 종의 가축으로 인해 크게 변했다. 인간은 숲에서 빠져나와 강 옆에 도시를 짓고 정주함으로써 자연과 분리되었다. 인간은 더는 자신을 동물의 일원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하나의 세계’는 ‘두 개의 세계’로 분리됐다. 한때 동물과 섞여 살았던 인간은 이제 자연에 방벽을 치고 인간의 땅에 살았다. (…) 자연과 동물은 외부 세계에 사는 존재, 길들여 사용하고 사고파는 존재, 즉 ‘타자’가 되었다. ---「4장_스스로 길들어 슬픈 동물이여」중에서 근대 자본주의가 출현하면서 동물에게 일을 시키는 행위가 산업화됐다. 많은 생산물을 만들어 내고, 그 생산물을 대중에게 전달해야 했으므로 동물의 역할이 중대해졌다. 막대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동물을 대량 번식시켰다. 동물은 중앙 집중적으로 관리됐다. (…) 19세기 중반까지도 전체 에너지원 중에서 동물 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30퍼센트를 웃돌았다. 산업혁명이 한참 진행되고 있음에도 석탄 에너지 사용량은 그보다 적었다. 한밤중 도시를 환하게 밝힌 고래기름, 밀물처럼 쏟아져 내려와 러시아워를 만드는 말과 마차들, 그리고 도시의 노동자들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느라 살찌웠던 소와 돼지들까지 산업혁명을 일으킨 원천적 에너지는 역설적으로 동물에 기반해 있었다. 동물이 없으면 자본주의는 돌아가지 않았다. ---「5장_만국의 동물이여, 단결하라!」중에서 인간이나 동물은 모두 정서적인 주체다. 동물은 고통을 느끼고 희로애락의 감정을 표현할 줄 안다. 정서적인 두 주체가 만나는 지점에서 영향력이 교환된다. 인간은 물론 동물에게도 ‘힘’이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정동(affect)’을 일으키는 힘이다. 동물의 몸과 인간의 몸의 만남은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가져온다. 인간에게 사랑, 귀여움, 애착, 혐오 등의 감정을 일으키는 동시에 쓰다듬거나 안고 피하고 도망치는 등의 행위를 촉발한다. 그 과정에서 영향받는 것은 인간뿐만이 아니다. 인간과 동물, 두 주체의 몸을 관통하며 흐르는 감정과 행동은 서로를 공명시킨다. 이렇게 몸과 몸을 연계하는 에너지 혹은 능력을 정동이라고 한다. ---「6장_기계가 지워 버린 생명의 눈망울」중에서 사실 동물을 사물화하는 것이나 의인화하는 것은 인간의 방식을 통해서 동물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동물은 종마다 특징적인 감각기관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인지구조나 사고방식, 행동 양식이 진화했다. 또한 동물은 즐거움과 고통,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감응력 있는 존재(sentient beings)’로서 함부로 물건 취급을 받아서도 안 된다. 사물화나 의인화는 동물 그 자체를 보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 동물원은 신체의 감옥이자, 의인화의 감옥이다. 인간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주기 위해 동물은 인간처럼 꾸며지지만(의인화), 인간에게 위협적인 순간이 발생하면 즉각 사살되어도 되는 물건으로 전락한다(사물화). ---「10장_오해와 폭력의 기원, 동물원」중에서 나는 틸리쿰의 저항이 세상을 바꾸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쯤에서 이렇게 걸고넘어지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틸리쿰에게 저항할 의도가 있었는가? 그렇다면, 고려 시대 반란을 일으킨 노비 만적은 모든 사람이 평등한 권리를 갖는 ‘근대 민주주의’를 알아서 봉기한 것인가? 아니다. 그는 계급이 폐지된 세상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허기와 굴욕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삶의 밑바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서 창을 들었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갖고 있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마찬가지다. 틸리쿰은 그저 비좁은 수족관이 참을 수 없어서 반란했다. 갑갑한 일상이 죽을 만큼 싫어서 반란했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엄마가 생각나서 반란했다. 그리고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바꾸었고 세상의 변화로 이어진 것이다. ---「12장_비좁은 수족관이 싫어서, 엄마가 보고 싶어서」중에서 식민주의는 원주민의 몸에도 흐르지만, 동물의 몸에도 흐른다.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원주민과 아메리카들소와 늑대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원주민과 사자와의 관계를 분석하면 이들의 신체를 식민주의가 관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구 생태계의 지배계급은 원주민과 동물의 삶터를 점령하고, 그들을 계몽해야 할 야만으로 치부하며, 그들의 몸을 자신의 정치체제에 복속시킨다. (…) 아프리카 야생에 대한 지배는 식민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바뀌었다고 댄 브로킹턴은 말한다. 식민지 시절 닥치는 대로 사자를 잡아들였다면, 지금은 쿼터를 주고 사냥허가권을 판다. 보전의 외피를 둘러쓰고 이윤을 창출한다. ---「14장_사자는 지도를 볼 줄 모른다」중에서 어떻게 보면, 찬텍은 괴물이었다. 인간도 아닌 오랑우탄도 아닌, 반인반수. 인류학계에 휘몰아친 1960~1970년대의 수화 연구 열풍은 이런 유인원을 열 마리 이상 탄생시켰다.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은 네댓 살만 되면 인간 어른보다 훨씬 센 힘을 갖는다. 화가 나서 생긴 약간의 완력에도 사람은 크게 다칠 수 있다. 그걸 모르지 않았을 텐데, 과학자들은 그들을 집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버렸다. 말하는 유인원들은 어정쩡한 삶을 살다가 지금 연구실의 좁은 시멘트 방에서, 동물 보호소에서 아픈 과거를 삼키며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 ---「16장_말하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야」중에서 미국의 포스트휴머니즘 철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동물과의 윤리를 ‘응답-능력(response-ability)’에서 찾는다. 해러웨이는 종 차별을 전면적으로 철폐할 수 있다는 동물권론자의 전망에 대해 회의적이다.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인간-동물 관계의 전면적 회복은 불가능하다. 지구 내의 행위자는 각각의 필요와 욕망, 감정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전체를 통괄하는 윤리는 애초에 없다. 따라서 해러웨이는 무언가를 한 번에 바꾸는 정치 기획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인간이 자신이 대면하는 동물과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부분적 회복을 도모하는 ‘관계적 윤리’가 현실적이다. ---「20장_침팬지의 절망에 응답하기」중에서 |
‘동물의 공간’이 아니라 ‘문명의 공간’에서 살아간 개, 범고래, 돌고래…
동물은 인간 문명의 조연이 아니다! “인간과 개는 어떻게 만났을까?” 책을 여는 것은 최초의 가축, 개에 대한 질문이다. 저자는 인류학자와 고생물학자 사이의 치열한 갑론을박에서 늑대와 개의 능동성을 강조한 대담한 이론 두 가지에 주목한다. 하나는 동물생태학자 코핑거 부부의 ‘스캐빈저 가설(scavenger hypothesis)’이고, 다른 하나는 고생물학자 팻 시프먼의 ‘늑대-개 가설’이다. 전자는 쉽게 말해 가축으로서의 운명은 인간이 아니라 늑대가 선택했다는 주장이며, 후자는 개와 맺은 동맹 덕분에 현생인류가 네안데르탈인을 앞지르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 책은 코핑거 부부와 팻 시프먼의 가설이 생태계 행위자로서 동물의 능동성을 인식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이야기한다. 가축화에는 두 상대, 즉 인간과 동물이 있다는 점을 직접적으로 강조하는 한편, 인간의 몸과 동물의 몸은 동시에 진화한다는 점을 포착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가축의 기원, 나아가 동물의 역사를 논할 때 놓쳐 왔던 부분이다. 이 책은 가축화에 대한 전복적인 시선에서 출발해, 동물이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서 협력하며 지구의 역사를 써 내려온 모습을 촘촘히 복원한다(1부). 100여 년 전 오스트레일리아 에덴 앞바다에서 이뤄진 ‘인간-범고래 공동 사냥’, 지금 이 순간에도 지속되고 있는 브라질 라구나 마을의 ‘인간-돌고래 공동 어업’ 등의 사례가 그렇게 이 책에 불려 나온다. 인간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빠진 ‘동물’이라는 퍼즐을 하나씩 끼워 맞추는 이 작업이 향하는 목표는 분명하다. 동물들의 누락된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만이 문명을 일구고 문화를 계승했다고 자부하는 관점이 철저히 인간 중심적인 도그마임을 일깨우며, 복잡한 그물로 얽혀 있는 생명의 역사를 복기해 나간다. “탈출하고 공격하고 파업할 수 있기 때문에 동물에게 권력이 있다” 자본주의경제의 축소판인 근대 ‘노동자’ 동물의 삶 2부에서는 근대 이후 인간-동물의 관계를 다룬다. 인간이 동물을 상품화해 정치의 최하위 계급으로 복속시킨 이 시기의 적나라한 초상을 인간과 동물 간에 이뤄지는 지배·협상·저항의 틀, 이른바 ‘동물정치’의 관점에서 읽어 낸다. 산업화 이후 인간이 동물을 통치한 논리와 방식은 무엇일까? 인간의 지배는 동물의 삶과 죽음, 생활양식을 어떻게 바꾸었을까? 이 같은 문제의식과 함께 소환된 동물의 삶은 그 자체가 자본주의경제의 축소판이다. 물자와 사람을 이동시키느라 산업 역군으로 혹사당한 역용마, 최초로 컨베이어시스템이 도입된 대규모 정육 단지 ‘유니언 스톡 야드’와 그 안에서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한 긴뿔소, 공장식 축산의 핵심을 이루는 밀집형 가축 사육 시설(CAFO, Concentrated Animal Feeding Operation)에서 대량생산 되는 소와 닭과 돼지의 실상 등을 밝히며, 저자는 지금껏 주목받지 못한 동물을 역사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되살려 낸다. 인간의 일방적인 지배에 저항해 태업하고 파업하는 ‘노동자’ 동물의 정체성 또한 중요하게 다룬다. 이 책은 동물을 ‘의식 없는 기계’로 단정한 기존의 역사가 인간과 동물 사이의 미시적 정치학을 애써 무시한 결과라고 지적한다. 동물은 기계와 달리 ‘살아 있음’과 ‘행동 가능성’을 무기로 인간에 맞서 저항해 왔기 때문에 동물에 대한 전일적 지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고용주 인간’과 ‘노동자 동물’의 대립 구도가 선명히 드러난다. “노동자가 파업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기에 권력을 갖듯, 노동하는 동물도 말을 듣지 않을 수 있기에 권력이 있다.” 이렇게 지배의 틈새를 비집고 나온 동물의 고통스러운 얼굴과 몸짓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이들이 대리인으로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동물정치 또한 시작된다. “동물의 몸은 인간 욕망의 전쟁터” 동물의 노동과 사체, 희생을 밟고 선 ‘동물 영웅’ 담론이 놓친 것 3부에는 동물 지배 체제 속에서 떠오른 동물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흔히 동물의 희생과 헌신은 세간에 미담으로 회자되지만, 동물 영웅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위한 영웅’일 뿐이다. 사람을 살린 영웅으로 추앙받은 고릴라 빈티 주아, 총알을 맞고도 40킬로미터를 난 비둘기 전사 셰르 아미 등 몇몇 동물 영웅의 입장에서 질문을 던져 보면 대답은 자명하다. “이들은 영웅이 되고 싶어 했을까?” ‘동물 영웅’ 담론에는 인간-동물 관계의 모순이 숨어 있으며, 그 모순 속에서 동물의 행동을 인간의 기준으로 재단했을 때의 위험성이 드러난다. 인간 중심적인 시선을 거둔 이 책의 방향키는 다른 곳으로 향한다. 범고래 틸리쿰, 그리고 사자 세실의 삶이다. 수족관에 감금된 동물, 보호구역에 사는 야생동물을 각각 대표하는 틸리쿰과 세실은 이 시대 야생동물 착취 체제의 두 경로를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일련의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틸리쿰은 수족관에 끌려가 세 건의 인명 사고에 연루됐으나 범고래쇼의 비윤리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돌고래 해방운동의 견인차가 되었으며, 세실은 사람에게 살해되었으나 그 죽음을 통해 선진국의 기만적인 환경주의를 폭로했다. 저자는 인간 중심의 역사에 새로운 갈림길을 제시한 두 동물의 생애를 전기적(傳記的) 서사로 재구성함으로써, 이들의 고유한 삶을 집단적 종의 ‘생태’로 일반화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인간과 동물이 평등한 곳은 어디인가” ‘구원자 인간 vs. 희생자 동물’ 구도 너머의 질문 4부와 5부에는 동물에게 덧씌워진 인간의 편견을 깨부수고 동물의 진짜 모습에 다가가고자 하는 학계와 사회운동 진영의 이야기를 담았다. 과학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동물의 새로운 면을 보여 주었지만, 시행착오도 많았다. 특히 1960~1970년대 교차 양육과 수화 교육 실험에 동원된 ‘말하는 유인원’들의 아픔은 과학적 이상주의에 내재된 모순을 날카롭게 드러냈다. 삶 자체를 실험으로 전락시켰던 과학의 자기 확신은 침팬지, 고릴라, 보노보, 오랑우탄 수십 마리를 반인반수의 괴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야생에서, 때로는 실험실에서 쌓아 간 과학자들의 지식은 어두운 심연에 있던 동물에 대한 앎을 조금씩 확장했다. 고래, 유인원 무리 속에서 이뤄진 현장 연구는 죽은 이에 대한 애도와 추모가 인간만의 전유물이라는 통념을 깼으며, ‘세기의 실험’으로 꼽히는 침팬지 거울 실험은 동물이 인간의 자의식과 비슷한 정신 작용을 한다는 점을 증명했다. 이는 비인간인격체(nonhuman person) 담론으로 이어지면서 동물권 운동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다. 인간중심주의를 뛰어넘은 인간-동물 관계를 전망해 보는 것으로 책은 마무리된다. 인간과 동물이 평등하게 관계 맺기 위해서는 기존의 동물권 운동 또한 돌아봐야 한다. 동물복지의 향상이 20세기 동물권 운동에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동물을 단순히 피해자라는 정체성에 가둬 버린 것은 근대적 동물정치의 한계다. 저자는 ‘주폴리스(zoopolis)’, 즉 인간과 동물이 모두 속한 ‘동물정치 공동체’ 개념을 경유해 인간-동물 관계의 회복을 논하는 동시에, 도나 해러웨이의 ‘관계적 윤리’가 필요한 이유 또한 짚어 본다. “동물권을 위한 거시적인 기획도 중요하지만, 인간과 동물 개개의 관계에서 나오는 작은 행동 또한 역사를 바꾼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침팬지 루시의 요청에 응답했던 재니스 카터, 지리산반달곰 KM-53의 행동에 맞춰 정책을 조율한 사례에서 미약하게나마 변화의 씨앗이 보인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