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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강화 돈대에서 바라본 역사적 풍경 1부 돈대 탄생의 배경 가도의 주둔군 모문룡 신이 된 임경업 황손무, 조선 지식인을 꾸짖 강도몽유록의 여인 세상 조선의 북벌론 실체 ‘영고탑 회귀설’이란 음모론 정도령이 쳐들어온다 오삼계와 삼번의 난 2부 돈대의 출현 남인들의 집권과 몰락 김석주 대 윤휴 돈대를 설계한 사람들 죽을 고생한 승군 돈대지기들의 구슬픈 연가 3부 돈대의 수난 관우는 왜 우리 신이 되었나? 병인양요와 천주교 도모지 전쟁에 나선 병사들은 무얼 먹었나? 만들어진 영웅 한성근 손돌목돈대의 슬픈 사연 정한론과 운요호의 사기극 스웨덴 이방인이 본 강화도 4부 돈대의 부활 강화도의 치부, 양민학살 박정희의 반미 성지 만들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능성 변경과 돈대의 역사 주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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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벌에서 올려다본 갑곶돈대는 초라했고, 쌓은 돌의 정신은 박정희의 유신정신이었으며 게다가 급조되어 경직되었다.
--- p.74 더욱 중요한 것은 영고탑이 청나라의 발상지도 아니었고, 그들이 영고탑으로 돌아간다는 것 자체도 효종의 ‘가짜 뉴스’였다는 점이다. --- p.90 영조와 정조 시대는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일컫지만 또한 역모가 가장 많은 시기이기도 했다. --- p.101 강화도의 돈대는 대만의 정성공?정경 부자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돌덩어리에 암호처럼 새겨진 역사의 일부이다. --- p.103 조선은 ‘삼번의 난’을 이용해 성곽을 보수하고 변방을 강화했으며, 도성 축조에 대해 청나라와 담판해 불평등한 조항을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 p.116 삼번의 난과 김석주 같은 대신들의 야심이 어우러져 돈대가 탄생한 것이다. --- p.116 9할을 쌓은 것은 승군이니 어영군은 숟가락을 얹었을 뿐이다. --- p.150 조선이 국초부터 불교를 통제한 이유는 농사를 지어야 할 백성이 승려가 되어 국역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 p.165 승려에게 군사의 역할을 맡긴 것은 임진왜란 이후 새롭게 나타난 현상으로 이전까지는 승려들이 군역에 동원되지 않았다. --- p.166 다른 지방과 달리 강화도의 특성상 군역 이외의 세금이 면제되고 신분상승의 기회가 있어 병사가 되겠다고 전국에서 찾아오는 이가 많았다. --- p.178 돈대에서도 이 같은 생일 챙겨주기는 강화도가 아닌 타지에서 군역을 수행하러 온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 p.180 소설의 여러 주인공 중에서도 특히 관우는 최고의 명장이자 충신으로 그려지고 있다. 또한 신으로까지 추앙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 p.193 청룡언월도를 들고 있는 관우는 돈대 너머에서 최신식 군함과 자동소총으로 무장하고 침략해오는 외세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 p.199 서원 철폐 등으로 유림들과 정치적 적대 상태에 있었던 대원군에게 속죄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 p.214 수많은 집안에서 명예살인이 자행되었고 형장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천주교인을 처형했다. --- p.216 전투식량으로 가장 빈번하게 나오던 것이 미숫가루였다. (…) 칼국수를 만들기 위한 밀가루도 전투식량이었다. --- p.227 호랑이는 신성한 존재 같지만 백성들을 공포로 몰아넣는 매우 해로운 존재였다. 조선 초 한반도에만 6000마리에서 1만 마리 정도가 살았고, 매년 1000마리 정도가 잡혔다. --- p.250 호환을 막기 위해 출발한 착호군과 포수는 나라의 방비를 맡았다가 근대 이후에는 의병활동을 거쳐 독립운동을 통해 국권회복에 앞장섰다. --- p.254 팽나무는 한자로 박수朴?라고 하는데 박수무당의 그 박수가 맞다. 샤먼의 나무로 불리는 것이 팽나무이다. --- p.276 “시간이란 냉혹한 것으로 이 시간의 파괴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유적지의 보존 상태는 한 민족의 민족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 p.280 강화도는 여전히 전쟁중이다. 반공과 우익사상이 섬을 지배하고 있다. --- p.299 돈대가 민족주의로 참 피곤하다. 우리는 또 어떤 민족주의로 우상을 세우고 있나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 p.314 병자호란 때 후금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된 뒤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해안선을 따라 방어진지를 본격적으로 축조하기 시작한 것을 ‘해안관방유적’의 효시로 보고 있다. --- p.326 강화도에서 그 모든 인간의 적대 행위와 전쟁의 긴장감을 평화로 전환하는 것은 통일에 앞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 p.330 이 시간은 엔트로피의 성장에 의존해 시간의 흐름에 정착한 우리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특별한 관점에서 기술한 세상에 대한 근사치의 근사치의 근사치이다. --- p.344 근대 서구는 54개 돈대로 철통같은 방어진지를 구축했다고 생각했던 조선을 소수의 군대와 최신식 무기로 무력화시켰다. --- p.3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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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랑의 아픈 역사를 품고 있는 강화 돈대들”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불리는 강화도에는 54개의 돈대들이 우직하니 서 있다. 오랜 세월 서해를 지키며 지난날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략을 최전선에서 막아낸 이들 돈대는 1679년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의 지휘 아래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등지에서 승군, 어영군, 석공, 목수 등을 동원해 80일 만에 축조한 해상 방어시설이다. 특히 8900명이 동원된 승군은 40일 만에 여장을 제외한 돈대의 모든 작업을 마쳐 그들이 돈대를 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많은 이의 희생으로 탄생한 돈대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는 비극적이었다. 아픈 역사를 품고 묵묵히 서 있는 돈대를 그동안 잊고 지나쳐왔지만 이제는 돈대의 이야기와 역사적 가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강화도에 숨어 있는 보물인 돈대를 저자가 오랜 시간 찾아다니며 기록한 각각의 돈대에 얽힌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1부와 2부에서는 17세기 초반 격변하는 동아시아의 전세 속에서 강화도에 세워진 돈대의 기원을 추적한다. 영고탑 회귀설(寧古塔回歸說), 북벌론, 정경(鄭經)의 침입 등 정세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당파들에 의해 강화도에 돈대가 설계된 과정을 동아시아적인 관점으로 확대해 조망함과 동시에 조선 내부의 권력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며 돈대가 축조된 연유에 대해 살펴본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서구와의 첫 만남은 모두 전쟁으로 귀결되었고, 그 장소는 강화도의 돈대였다. 이에 3부에서는 19세기 말 최초로 접촉한 서구와의 만남이 왜 하필 돈대에서였을까라는 우연 또는 필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4부에서는 광복 후 한국전쟁과 군사 쿠데타로 인해 돈대는 전혀 다른 가치를 부여받아 과거의 군사 목적이 아닌 역사·문화 유적으로 각광받는 현실에 대해 살펴본다. 한동안 폐허로 잠들어 있던 돈대가 다시 눈을 뜬 것은 박정희 정권 때로 손돌목돈대 등 신미양요의 현장을 대대적으로 복원했는데, 갑곶돈대에서 초지돈대까지 약 10여 개의 돈대가 역사적 고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복원되었다. 현재 54개 돈대 중 10개는 멸실이고, 20여 개는 군의 소유이며, 나머지는 버려지거나 고증 없는 복원을 거쳤다.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 돈대는 몇 곳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세월과 함께 허물어져 방치되고 버려지고 이용당한 돌덩어리인 돈대가 이 책이 밑거름이 되어 많은 이의 관심 속에 ‘보편적이며 탁월한 가치’를 다시 되찾아 인류의 가장 순수한 역사기념물로 보존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