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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푸른 장미의 노래 - 혼자 넘는 시간 1 ˚ 13시간의 무늬 - 혼자 넘는 시간 2 ˚ 14 솔새의 연주를 들었다 - 혼자 넘는 시간 3 ˚ 15 댓잎귀신들이 수묵을 친다 - 혼자 넘는 시간 4 ˚ 16 장미와 롤리타 - 혼자 넘는 시간 5 ˚ 17 연두와 초록 사이 - 혼자 넘는 시간 6 ˚ 18 유일한 유혹 - 혼자 넘는 시간 7 ˚ 19 고양이 묻어준 자리에 봄까치꽃 - 혼자 넘는 시간 8 ˚ 20 독각 - 혼자 넘는 시간 9 ˚ 21 호접몽 - 혼자 넘는 시간 10 ˚ 22 풀섶이라는 곳 - 혼자 넘는 시간 11 ˚ 23 어느 화가의 노랑꽃창포 정원 - 혼자 넘는 시간 12 ˚ 24 초록 고요와 함께 - 혼자 넘는 시간 13 ˚ 25 바람과 함께 숲길을 걷는 일에 대하여 - 혼자 넘는 시간 14 ˚ 26 고요를 배우다 - 혼자 넘는 시간 15 ˚ 28 제2부 나의 원음(原音) ˚ 31 봉창이 밝아진다 ˚ 32 여인들의 먼 데 ˚ 33 보랏빛 향기 ˚ 34 장미의 천지간 ˚ 35 구증구포 ˚ 36낙관 ˚ 37 한 뼘 고요 ˚ 38 눈 밑에 낀 그늘 ˚ 39 풍경의 말 ˚ 40 환한 이승 ˚ 41 휘파람새 소리는 청량하다 ˚ 42 은방울꽃 어사화 ˚ 44대지의 초록기둥 노래 ˚ 46 나무와 새 ˚ 48 고요의 빛은 어디서 오는가 ˚ 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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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덫을 벗고 누리는 고요와 기쁨
몇 날 며칠을 두고 경향 간에 기별 한 점 없네. 한때는 고독의 용기를 꿈꾸었으니 푸른 안목을 반짝일 만도 하네. 반짝이는 건 지난봄 감꽃 졌던 자리에 알알이 매단 주먹송이들, 오늘의 일기는 쾌청하네. 누가 시키잖아도 자가 격리된 날들의 반복이라네. 이때쯤 죽순장아찌에 잡곡밥 먹는 점심의 습관은 망각을 이겨내는 지복이 아니던가. 산방에 들락거리는 바람엔 뼈를 말리고, 동박새서껀 저 울고 싶을 때 와서 울고들 가라지. 다만 괴로움의 민낯 같은 건 작년 폭우에 생채로 찢긴 석류 가지들. 정색하고 보면 끔찍한 얼굴일진대, 남은 가지에 터진 석류 속 그 맑고 붉은 보석들은 가령 독각의 사리라고나 할까. - 「독각: 혼자 넘는 시간9」 전문 고재종 시인은 ‘독(獨)’ 전문이다. 학문도 창작도 ‘독’으로 점철되어 있고, 이제 종교적 깨달음마저 ‘독각(獨覺)’이다. 무릇 ‘독’의 삶이란 스승이란 나침반 없이 혼자 인생길을 헤쳐 나가는 것인데, ‘고독의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 아마도 시창작에서 홀로 이룬 나름의 성취가 독각의 용기를 북돋우어 주었을까. 시 끝부분에 폭우에 찢긴 석류 가지들이 나오고 ‘끔직한 얼굴’인 터진 석류가 등장하는데, 그때 석류는 세속에서 고독하게 수행의 길을 걸어온 시인 자신의 아픔을 잘 드러내는 상징물 같다는 생각. ‘터진 석류 속 그 맑고 붉은 보석들’을 일컬어 시인은 ‘독각의 사리’가 아니겠냐며 자긍심에 찬 ‘푸른 안목’을 내비친다. 굳이 코로나 시절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자가 격리된 날들의 반복’이란 표현은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수행자의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텃밭의 고춧대를 좀 손보아도 나는 한가하네. 뒷산 숲에서 나온 고라 니가 그 초록의 전언을 마구 퍼 나르는 산천경개의 광휘라니! 이렇게나 무궁한 마음이 드는 날이면 매실주 한 잔에도 잎새들 반짝 뒤집는 일조차 무진하다네. 나는 나를 알고자 책을 읽고 나를 찾고자 시 몇 줄을 썼으나 이쯤 해서는 낙과의 청시 한 톨만 하겠는가. 다만 그 시구들이 어느 날 진리의 상형문자를 나툴 때까지, 반짝이는 초록과 함께 우주의 피륙을 짜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으면 하네. - 「초록 고요와 함께: 혼자 넘는 시간 13」 부분 우러러보는 능력을 상실해 온통 세상이 저잣거리로 전락해 버린 냉혹한 세상이지만, 한가에 처해 자연과의 접촉을 늘리며 거기서 찾아낸 시인의 문장들은 한 줄 한 줄 초록의 온도를 품고 있다. 그것이 생명의 심장을 맥박치게 하는 그런 온도를 품고 있는 것은 ‘나를 알고자 책을 읽고 나를 찾고자 시’를 쓰는 ‘무궁’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그 시구들로 ‘진리의 상형문자를 나툰’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시인이 매우 종교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무릇 종교성이란 신성의 경험을 말하는데, 시인이 ‘잎새들 반짝 뒤집는 일’조차 ‘무진’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가 존재의 ‘이면’을 엿보았기 때문이며, 이때 “그의 언어는 신비주의자들의 언어처럼 신에게 몸을 맡긴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언어”(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 언어는 침묵에서 겨우 터지는 소리인데, 여수 오동도에서 동백꽃 터지는 소리를 듣고 쓴 시 「환한 이승」에 보면, “그 붉은 사자후를 형형 토”할 때, “노래라면 노래 아닌 것이 없는 날도 있으니/ 내 먼저 사랑을 고백해본 적 없는 나도 터진다”고 고백한다. 이 시구는 역설적이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언어가 아닐 수 없다. 시인의 말 너무 늦은 질문이어도 좋은가. 이만큼에 서서 저만큼의 강을 물으며, 묵묵히 바라보는 경우가 잦다. 예전 어디선가 보았던 시간이 묵어 목전의 강물로 오는 것 같다. 황혼을 지피는 새들은 귀소를 서두르는가. 나는 약간은 처연하게 강 끝을 응시한다. 나는 서둘러 달려가야 할 집이 없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나에게서조차 잠시 물러난다. 저 무심한 강물이 물어대는 무언가 반박할 수 없는 질문들로부터, 아무리 사소한 질문일지라도 어느 소설가처럼 수백만 페이지를 샅샅이 뒤지지 않을 수 없도록 자꾸만 절박해지는 이 황혼으로부터, 방금 눈앞에 무엇이 지나갔지? 아니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저렇게 강물은 하냥 출렁거리고 또 시간은 조각조각 깨져 일렁거리는 목전. 이것은, 이 아닌 것은 대체 무엇인가 또 묻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