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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손금 속에는 13
열정백수의 노래 14 하늘이 내려다보시면 15 서른이 미생未生이다 17 집보다 더 좋은 것 19 청춘은 아름답다 20 성탄절 저녁 탱고를 듣네 21 서른의 예수 예순의 붓다 22 붉은 화첩 - 꿈인 듯 만산홍엽 23 길 24 양들의 침묵 25 물 26 달팽이에 관한 기억 27 울음 28 별을 향해 기도하다 29 혼자 차 마시기 30 늦가을 날 저녁 밥상 31 자비의 길 32 대화법 33 지복至福 34 시시한 시 35 차례 구름의 달 36 시간의 혀 37 경계 38 벚꽃세상 39 달 아닌 달 - 표지 그림 40 생일 41 반하거나 홀리거나 - 강호 과객 42 반하거나 홀리거나 - 마음이 하는 일 43 반하거나 홀리거나 - 예의에 대하여 44 반하거나 홀리거나 - 어느 하루 45 반하거나 홀리거나 - 당의정이 필요한 사람들 46 반하거나 홀리거나 - 연緣 47 반하거나 홀리거나 - 일 48 반하거나 홀리거나 - 도심산중 49 반하거나 홀리거나 - 혼잣말 50 반하거나 홀리거나 - 눈금 51 반하거나 홀리거나 - 칭찬 52 반하거나 홀리거나 - 계산법 53 코 54 도깨비 세상 55 각축에 억측 56 꽃이 된 항아리 57 봄은 늘 춘래불사춘 58 꽃 피는 계절 59 비몽사몽 사월 60 달이 아름다울 때 61 화양연화花樣年華 62 화신化身 63 초야草野 64 돌계단에 떨어지는 낙엽 65 스마트폰 66 문자 안부 67 청도 씨 없는 감 68 중추절을 축하함 69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 70 숨 고르기 71 화살의 행방 72 오연헌梧硯軒 하룻밤 73 청개구리 무설법문 74 야옹 선사 75 꽃 한 송이 76 숫자 놀이 77 복사꽃 세상 78 공중누각 79 중심축이 기우네 80 지하철 세 정류장 81 꽃을 사랑한다고 어찌 말하랴 82 환골탈태 83 찻잔 하나도 허투루 할 수 없는 내력 84 어디에도 있는 반려 85 무 배추보다 못한 시 86 마음 챙김 87 까마귀 떼가 우는 오후 88 무채색이 키운 시간 89 묵언의 실체 90 내 안에 91 인생칠십허영청虛影廳 92 칼 93 허당 94 못, 95 아직도, 생선 대가리 96 덧칠, 너란 덫질 97 산의 행방 98 달 아래 웃고 있네 99 코끼리와 성자 100 절규도 사치스러워 101 빙렬氷裂 102 바다거북은 바다를 사랑한다 103 붉은 시 104 월병 이야기 105 까마귀 문답 106 까마귀 물고 온 서신 107 말, 말, 말 108 꽃다발 - 노산 문학상 시상식에서 109 젊은 도공 봄밤 같은 110 동피랑 벽화에 숨은 시인 111 검은 호랑이해의 행복 수업 112 빵과 꽃 113 차벗들의 나이 114 내 기억의 서랍 115 향기로운 할喝 116 시인의 산방 117 작약 118 벗어날 수 없네 119 무릎, 꿇다 120 삼배, 하다 121 거리 두기 122 금줄 123 향기의 빛깔 124 햇빛 맑은 날의 꿈 125 마음도 늙어간다 126 붉은 줄 127 그날의 안부 128 시 한 줄 129 해괴解塊 130 결기 131 고양이 꿈속의 봄밤 132 기다림에 대하여 133 까마귀의 날들 134 재유 화병 135 혓바늘 136 죽비보다 무서운 것 137 여백 139 해설 고요의 건축술과 시인의 사라짐(이민호) 1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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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의 순간은 거룩한 순간
이 시집은 숨 쉬고 있는 생명에 끊임없이 눈길을 주고 있습니다. 달팽이, 베짱이, 쓰르라미, 개미, 매미, 바퀴벌레, 너구리, 청개구리, 원숭이, 고양이, 까마귀, 벌, 거미, 코끼리, 바다거북 등 미생을 고요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시인의 아바타로서 이 환유적 치환 속 묵언의 실체는 거룩하기 그지없습니다. 십이 월 어느 날 구도자의 탄생이 그랬던 것처럼 시인은 언어적 상징 질서를 거부하고 마침내 몽상가의 상상력 속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 시공간은 아직은 절망과 탄식으로 점철돼 있습니다. 치유와 사랑의 손길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침내 절대자가 현현, 기적과 구원을 이루었듯이 이 시집은 눈먼 존재들이 부활하는 거룩한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잡담으로 일관하고 있는 일상을 떠나 가장 내밀한 공간에 자신을 가두고 사라지는 시인의 모습은 릴케가 두이노 성으로 일탈을 감행했을 때처럼 의미심장합니다. 고요 속에서 들었던 천사의 소리는 ‘비가悲歌’였습니다. 고요의 순간들은 거룩해지기 위해 슬픔의 시공간을 거쳐 가고 있습니다. 이 시집은 슬픈 몸, 사람, 사물, 일상, 깨달음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풀었다 놓았다를 반복합니다. 고요하고 거룩함은 어떤 경계로도 구분 지을 수 없기에 백이십삼 편이 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별 무리를 이루며 회전하는 성좌처럼 거대한 합창이 되어 이 시공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온몸이 진동하는 경이로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별들은 이 혼돈 속에서, 어울림의 전율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이 시집은 바로 그 거룩한 탄생 직전의 고요 속에 있습니다. 고요의 건축술과 시인의 사라짐 1. ‘보이지 않는 것’을 건축함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창작 원천은 고독이었다. 필생 역작 『두이노의 비가』를 쓸 무렵 천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인이 어둠 속에 있을 때였다. 외부와 차단된 깊은 내밀함 속에서 궁핍한 시대의 존재론적 물음을 거듭하고 있을 때 신비한 내면에서 생명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되었고 삶과 죽음의 거룩한 발자취에서 드러나는 소리를 인간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시인된 소명을 되새기게 되었다. 그처럼 백이운은 고요한 순간들을 거듭 살고 있다. 이 시집은 그때마다 들리는 존재의 소리를 듣고 부름에 응답했던 고백록이다. 그러므로 이 시집은 그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의 시 역정을 같이 했던 사람들에게 중요한 계기moment를 마련한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다. 앙리 르페브르가 발굴한 이 아이러니는 여기저기 살아 숨 쉬는 순간의 역설이다.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한계와 무지몽매한 특권의 폭력 저편에서 홀로 더불어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의 현실적 장치이기도 하다. 개체로서 주체, 즉 구체적 세계 속에서 살아 움직이면서 서로 관계 맺는 인간 형상을 세우는 일이다. 삶의 가능성을 꿈꾸는 일은 공간적이다. 몽상가 시인에게는 시적 건축술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집에서 공간과 시인의 상호 관계를 온전히 드러내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언어적 상징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시인의 상상력과 만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백이운은 주체와 외부를 구분하지 않고 공간을 건축하듯 시를 쓴다. 칸트가 비판 철학을 기획하면서 ‘인간 이성은 자연 본성상 건축술적’이라고 언명했듯이, 앙리 르페브르가 이 이성의 장벽을 넘어 시적 공간을 해방시키려 했듯이, 백이운은 파편화된 일상 속에 흩뿌려져 있는 것들을 모두 하나로 집결시키고 있다. 이 비체계적이고 유동적인 공간에 시인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실존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관계의 연속이다. 사물과 타자와 시인이 오갔던 흔적이 이 시집으로 묶였다. 이때 비로소 시인은 사라지고 진정 시적 몽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하이데거는 1951년 다름슈타트 강연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에서 건축함이 근원적으로 거주함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본질적으로 ‘인간 존재의 근본 특성을 사유’하게 된다고. 쉼표로도 나누지 않은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의 총체성은 백이운의 시적 공간에서 가능성의 시학을 열어 놓는다. 2. ‘보살핌’ 속에 거주함 시를 짓는 것은 인간 거주와 마찬가지로 주변 세계를 돌보고 가꾸는 것이다. 이 내재된 창조성으로 비로소 시인은 공간에 깃들어 살게 된다. 그러므로 시는 그저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구조화된 건축물과 같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어떻게 거주할 것인가를 사유한다. 나아가 시적 공간을 건축하는 가운데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하이데거는 특별히 ‘거주함’의 근본적 특성을 망각과 은폐로 점철된 인간 현존재의 ‘보살핌’에 가져다 놓는다. 그럴 때 시적 공간은 단지 형식적 공간이 아니라 시인이 의미를 부여하는 장소가 된다. 백이운의 시를 하이데거의 ‘거주함’의 네 가지 ‘보살핌’으로 살펴보면 세계를 수호하는 것이며 간직하는 일이다. 보살핌은 땅을 구원하는 가운데, 하늘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신적인 것들을 기다리는 가운데, 죽을 자들을 인도하는 가운데 인간 삶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매미만한 바퀴벌레 벌렁 나자빠져 죽어 있다 살아서는 올려다볼 꿈도 못 꾼 푸른 하늘 한 번도 눈 맞추지 못한 그런 연緣도 있는 거다. ─ 「반하거나 홀리거나-연緣」 전문 일상은 제 몸을 채우고도 넘치는 욕망과 거주하고 있다. 바퀴벌레로 환치된 욕망은 오래된 미래처럼 시원에서 기원하여 현재를 뚫고 느닷없이 눈앞에 드러난다. 욕망의 주검 앞에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중첩시켜 본다. 시인이 거주하는 공간은 ‘푸른 하늘’ 아래 구현된 땅이다. 대지는 지배자가 소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올려다볼 꿈도 못 꾼’ 사소한 것들의 공간이기도 하다. 당당히 하늘을 우러르는 자들은 그러한 소수자들을 ‘바퀴벌레’처럼 취급하고 배제하며 차별한다. 시인은 그 은폐된 공간을 푸른 하늘 아래 헤집어 놓았다. 망각된 실체의 적나라함이 시인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인연’ 앞에, 스치지 않았을 관계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인연의 보살핌으로 이 땅은 다시 구원받지 않을까. 메아리 없는 기도였다 탄식할 일 아니네 거기 산이 있을 줄 알았던 때문이니 그 산이 야반도주한 건지 원래 없던 것인지. ─ 「산의 행방」 전문 하늘은 탄식 이전에, 인식 이전에, 판단 이전에 존재했다. 그래서 기도는 메아리 없었으며 산은 거기에 없기도 했다. 산의 행방을 묻는 것은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찾으려는 언어도단이기도 하다. 고요함 속에서 시인은 밤을 타 도피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을 생각한다. 그 존재성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내밀함 속에서 본래 존재했던 순수 본질에 대해 의심할 여지 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확신이야말로 보살핌의 정점이다.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을 통해 설파했듯이 보이지 않는 것, 즉 본래 있는 것을 없다고 부정할 수는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없다고 표현할 길은 없다. 야반도주했던 시공간 속에 우리 모두 거주하고 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늘로 손 흔들어 다시 오라 맞이하는 것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너구리와 청개구리 말 안 듣는 원숭이와 눈먼 개미 떼 내 안에 이런 것들이 주인 행세 식객 노릇. ─ 「내 안에」 전문 너구리와 청개구리, 원숭이와 개미는 신적 존재의 변신이라 말할 수 있는가. 시인이 이들을 제 몸에 받아들이고 더불어 거주함은 일종의 영접은 아닐까. 분명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존재들은 인간세人間世에 있지 않다. 장자가 말했던 처세가 이들에게 인간답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틀 속에 거주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신적 존재의 환유라 할 수 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위의 무제한성과 ‘말 안 듣는’ 경지는 언어의 상징 질서 밖 존재의 품성이다. 궁극적으로 ‘눈먼’ 맹목이 인간의 용의주도를 넘어 존재하는 신들의 격이 아닐까. 시인은 이 신적 존재들을 식구로 보살피고 있다. 꽃 피고 잎 지는 게 기적이라는 말씀 시간을 재촉하지 않는 품성 그대로 나무들 몸을 낮추고 쉴 채비를 마쳤다.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의 늠름한 뒤태 하늘로부터 받은 허허로운 충만에도 대지는 비장함 대신 너그러움을 택하고. 고개 숙인 결실들에 합장하는 어깨너머 세상에서 가장 낮은 길이 열리고 귀먹고 눈먼 바람이 선하게 앞장선다. ─ 「길」 전문 꽃과 나무와 바람마저도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이다. 죽을 자들을 인도하는 길이 낮게 열렸다. 시인은 죽음에 앞서가 그들을 이끌고 있다. 결국 죽을 자들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 고요의 순간에 시인은 어떻게 죽음 안에 거주할 수 있을까 응시하고 있다. ‘허허로운 충만’으로 표현된 죽음의 역설은 죽음을 죽음으로서 흔쾌히 맞이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훌륭한 죽음이 존재하도록 자신을 이끄는 가운데 시인은 거주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네 개의 틀 속에 거주하는 보살핌의 뜻은 백이운의 시에서 새롭다. 구원과 수용과 기다림과 인도함이 하나로 겹쳐져 백이운의 시를 건축하는 시학으로 자리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백이운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그 행위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시적 공간에 거주함을 뜻한다. 이 불이不異의 공간 속에서 시인의 사라짐을 사유하게 된다. 3. ‘몸’을 사유함 백이운 시에 담긴 시적 공간은 보살핌으로 거주하는 가운데 ‘몸’에 결집된다. 이때 몸은 물리적으로 구획된 빈 공간을 채우는 구성물이 아니다. 몸 자체가 하나의 공간을 이루며 망각된 기억을 되살리며 은폐된 의미를 복구하는 장소로 기능한다. 이때 몸은 선회의 계기이자 가능성으로 열린 개별적 주체이다. 백이운 시에서 관성적으로 밀려가던 주체의 행로는 멈춰 서 어느 곳으로든 방향 전환을 도모한다. 그처럼 몸은 결단의 집적체로서 시적 공간에서 재생한다. 바위가 막아서면 그 바위 돌아 흐르고 큰물이 덮쳐오면 그 등에 얹혀서 간다 흐름이 멈춘 뒤에야 큰칼을 벗는 운명. 흐르는 물이라고 뼈 없는 것은 아니다 흐름을 그쳤다고 물 아닌 것은 아니다 누구나 큰칼을 벗을 즘엔 물이 한번 뒤집히리. ─ 「물」 전문 물은 일반적으로 흐르는 존재로서 공간화되어 있다. 가뭇없이 사라지는 무의미한 공간성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물이 바위와 큰물과 결집될 때 또 다른 계기를 만난다. ‘돌아 흐르’기도 하고 ‘얹혀서’ 흐르기도 한다. 이 선회와 중첩은 거주함의 양상으로 백이운의 시를 변환의 장소로 공간화한다. 물의 환유적 치환은 몸을 상기시킨다. 시인은 ‘큰칼’이라고 하는 금줄과 같은 경계적 운명을 물의 선회에 겹쳐 놓는다. 시인은 고요 속에 멈춘 듯하다. 하지만 그 거주함 속에서 운명을 바꿀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이 뒤집힘의 장소성이야말로 그의 시 몸속에 새겨진 시성詩性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가능성에 열려 있다. 탈골의 상상력이다. 차를 머금어 빛나는 찻잔의 몸만큼 찻상 유리면 속에 빛나는 잔 그림자 내면이 저쯤은 돼야, 탄복하는 되풀이. 혼자 차 마시기는 사라짐의 되풀이 기억 속에 각인된 달의 지문을 지우며 누군가 쓸고 닦은 길 달팽이가 기어가듯. ─ 「혼자 차 마시기」 전문 차를 머금은 찻잔이건, 시인의 몸이건 빙렬로 갈라져 있다. 그러므로 고요 속에서 차를 마시며 몸을 사유한다는 것은 사라짐을 몽상하는 일이다. 이 몸들을 스쳐 갔을 기억과 상처를 지우는 일이다. 이런 모든 일은 내밀한 깊이에 거주함으로 가능하다. 홀로 있다는 것은 고독한 일이다. 그러나 그때 비로소 천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고요에 거주함은 상징적 언어로 가득 찬 시의 몸에 잔금을 내고 타자와 다리를 놓는 보살핌이다. 이 모두 시인이 사라짐으로 이루어졌다. -이민호(시인, 문학평론가) 저자의 말 시작 노트 혹은 짧은 생각 몇 마디 1 * 지구가 하나의 생명체이듯이 시조 또한 살아 있는 생물이다. 시인이 시조를 쓰지만 시조 또한 시인을 써낸다. * 자만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기 시조에 스스로 속지 말아야 한다. 시인은 그 시조의 실체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존재일 뿐이다. 시가 곧 그 사람은 아니다. * 가난한 시인보다는 청빈한 시인이 아름답다. 청빈한 삶보다는 자족하는 삶이 아름답다. 무소유의 반대 개념은 소유가 아니라 자족이라는 달라이라마의 가르침은 언제나 유효하다. * 잡은 생선 먹고 와인 마시고 염소나 키우면 됐다는 먼 나라 작은 섬 이름 없는 어부는 달라이라마의 거울이다. * 지혜로써 인내한다. 자신에게 엄격하지 않으면 시인,?시의 종장宗匠이 아니라 시의 기술자, 시를 국화빵처럼 찍어내는 기술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 찻잔을 계속 쓰면 차심이 들어 처음엔 보이지 않던 빙렬이 나타나든가 빛깔이 바뀌어 간다. 세월에 물든 찻그릇과 사용하지 않아 민낯일 뿐인 그릇은 느낌이 다르다. 시조라는 그릇도 그렇다. * 잘 만들어진 찻사발이 가마 안에서 불을 너무 강하게 받아 나올 때가 있다. 그런 경우 사발의 가치는 찻사발과 밥그릇의 경계에 놓인다. 불길을 너무 받은 찻사발처럼 감정과잉이 되지 않도록 경계한다. * 거친 느낌의 귀얄분청 사발은 힘차고 아름답다. 거친 붓질이 휘돌아 간 자국이 실로 거칠지 않기 때문이다. * 철들지 못해 시 쓰기를 멈추지 않으면서 철든 소리를 하고 싶어 하는 심사. 이런 모순이 정좌 속에 혼돈을 키우고 창작의 불꽃을 키운다. *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와 평상심시천변만화는 같은 말이다. * 생각도 하나의 물질이다. 죽은 자작나무가 품고 있는 차가버섯은 영약이 아니라 쓸모 없는 물질이다. * 흉내내기, 자기 복제는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얼굴 없는 자객이다. * 스승이란 스스로 되는 게 아니라 제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존재다. 자신이 제자라고 생각하는 이가 자기 제자가 아니라 자신을 스승이라 생각하는 이가 자기 제자다. * 제자가 곧 자신이 섬겨야 할 자기 스승이다. *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잔소리 치고 오도송 아닌 게 없다. * 열반송만 열반송이 아니라 죽기를 각오하고 쓰는 시가 다 열반송이다. * 머리로 쓰는 게 아니라 몸으로 쓰는 저 삼라만상의 열반송! 시작 노트 혹은 짧은 생각 몇 마디 2 * 일기일회一期 一會는 선가에서나 다회에서만 쓰는 말이 아니다. 살아가는 한 순간 한 순간이 다 일기일회다. *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즐겁다. 실수투성이인 인생에 객관적 시각은 평형 감각을 길러 준다. * 무명 도공이 기계적으로 만든 이 빠지고 금간 찻잔과 유명 작가가 작품으로 만든 찻잔이 백년 세월을 머금으면 골동이란 이름으로 같이 존중받는다.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준다는 데서 차별받을 까닭이 없어서일 것이다. * 어설픈 배려가 설혹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지라도 배려 없는 인간관계보다는 낫다. * 오늘 하루 내 삶에 만족하는 거기, 모든 것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