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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의 비탄
마술사 옮긴이의 말 |
Junichiro Tanizaki,たにざき じゅんいちろう,谷崎 潤一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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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먼 옛날, 아직 애신각라 씨의 왕조가 유월의 모란처럼 빛나게 번영하던 시절, 중국의 대도시 남경에 맹세도라고 하는 젊디젊은 귀공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첫 문장」중에서 왠지 귀에 익지 않은 묘한 목소리를 내는 서양인의 입술에서 ‘인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귀공자는 자신의 가슴이 저도 모르게 두근두근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는 물론 태어나서 한 번도 인어라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 p.29 인간은 진주를 사랑할 수는 없지만, 인어를 보게 되면 어느 누구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주에는 차가운 광택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인어는 요려 (妖麗) 한 자태 속에 뜨거운 눈물과 따스한 심장과 신비로운 지혜를 품고 있습니다. --- p.30 인어의 눈물은 진주의 빛보다 수십 배나 더 맑습니다. 인어의 심장은 산호 구슬보다 수백 배나 더 붉습니다. 인어의 지혜는 인도의 마법사보다 더 신비로운 재주를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영묘한 힘을 지녔으면서도 어쩌다가 배덕한 악성을 가진 탓에, 인간보다 비천한 어류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 p.31 키가 인간과 비슷한 정도인 그녀의 몸이 함빡 잠겨 있는 항아리는 높이가 네다섯 자쯤 될까요. 그 안에는 영롱한 바닷물이 찰랑찰랑 채워져 있어, 인어가 숨을 할딱일 때마다 무수한 거품이 그녀의 입에서 수정 구슬처럼 보글보글 자잘하게 일어나 수면 위로 올라갑니다. --- p.36 마치 숨이 멎은 듯 온몸을 꼿꼿이 긴장한 채 하염없이 멈춰 서서 찬란한 물항아리의 빛을 응시하고 있는데, 믿을 수 없게도 그의 눈동자에서 감격의 눈물이 가만히 스며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 p.37 나는 지상의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이 세상의 가장 행복한 운명이라고 생각했네. 하지만 대양의 물속에, 이토록 미묘한 생물이 사는 신비로운 세계가 있다면, 나는 오히려 인간이 아닌 인어의 종족으로 타락하고 싶네. 너무도 아름다운 저 비늘 옷을 허리에 두르고 이런 바다의 미녀와 영겁의 사랑을 즐기고 싶구나. --- p.39 눈알 전체가, 물속에서 물이 응고한 결정체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만큼 연푸른빛으로 맑았고, 그 밑바닥에는, 달콤하고 서늘한 물기를 품은 채 영혼의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영원’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숭엄한 빛이 가라앉아 있습니다. --- p.40 인어의 곁으로 다가가는 사람은 오직 주인인 귀공자뿐이었습니다.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둔 채, 물속에서 할딱이는 인어와, 물 밖에서 번뇌하는 인간은 온종일 말없이 마주 보며, 한 사람은 물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운명을 한탄하고, 또 한 사람은 물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부자유를 원망하며 무미한 시간을 쓸쓸히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 p.49 밤이 되면, 그녀의 눈망울에서 떨어지는 눈물이, 과연 이방인의 말대로 진주 빛깔의 환한 빛을 뿌리며, 암흑의 방에서 반딧불처럼 형형히 반짝입니다. 그 창백하고 밝은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면서 물속을 떠돌아다닐 때면, 그렇지 않아도 요염하고 아리따운 그녀의 몸은, 하늘의 별에 감싸인 항아처럼 맑고 기품 있게, 또한 어두운 밤의 도깨비불에 비친 유령처럼 저주스럽고 사무치게 귀공자의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 p.49 “그런데 아마 그 공원에는 더 예리하게 우리의 영혼을 위협하고, 더 새롭게 우리의 관능을 유혹하는 것이 있겠지. ―― 색다른 걸 좋아하는 내가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전대미문의 구경거리가 있을 거야. 그게 뭔지 난 모르지만, 당신은 분명 알고 있겠지.” --- p.75 그런데 당신, 설마 그 마술사를 두려워하는 건 아니겠죠? 인간보다 요괴를 좋아하고, 현실보다 환상 속에 살아가는 당신이 평판 좋은 공원의 마술을 보러 가지 않을 리가 없겠죠. 설령 그 어떤 신랄한 저주나 주술을 건다 해도 연인인 당신과 함께 보러 간다면, 난 절대로 유혹에 사로잡힐 리는 없어요. --- p.76 내가 그것을 보았을 때의 느낌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묘령의 여자 얼굴이 종기로 곪아 터진 듯한, 아름다움과 추함이 기발하게 어우러진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똑바른 것, 둥근 것, 평평한 것, 그렇게 올바른 형태를 가진 온갖 물체들을 오목거울이나 볼록거울에 비춰 보는 것 같은 그런 불규칙함과 우스꽝스러움과 메스꺼움이 한데 뒤섞여 있는 것입니다. --- p.87 나는 그들이 왜 이런 마의 왕국에 와 있는지 그 이유를 바로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성인이든 폭군이든 시인이든 학자든, 역시 모든 사람은 ‘신비로움’이라는 것에 끌리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 p.99 여러분은 마의 왕국의 포로가 되는 것이 그토록 두려우십니까? 인간의 위엄이나 형태라는 것에 그 정도로 집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의 겉모습이 나비며 공작이며 표범 가죽이며 촛대로 변했다 해도, 그들은 지금도 인간의 정서와 감각을 잃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의 가슴속에는 여러분들이 꿈에도 알 수 없는 무한의 쾌락과 환희가 넘쳐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 p.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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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자키 준이치로는 1886년 도쿄에서 태어나 1965년 생이 다할 때까지 끊임없이 자신만의 예술을 추구하며 작품 활동을 한 일본 탐미주의의 대표적 작가입니다. 1910년 스물다섯 살에 단편 〈문신〉으로 화려하게 등단한 이후, 〈소년〉, 〈열쇠〉, 〈기린〉 등의 단편 소설, 『슌킨 이야기』, 『만(卍)』, 『세설』, 『치인의 사랑』, 『미친 노인의 사랑』 등의 장편 소설을 비롯해 희곡, 평론, 번역 등 여러 분야에서 지칠 줄 모르는 창작욕과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인어의 비탄〉과 〈마술사〉는 1917년 각각 잡지 『주오코론』과 『신소설』에 발표된 단편으로 다니자키가 서른두 살에 쓴 비교적 초기 작품입니다. 〈인어의 비탄〉은 같은 해 화가 혼마 구니오의 그림과 함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지만 삽화 문제로 판매 금지 처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년 후인 1919년 슌요도에서 〈마술사〉와 함께 묶어 미즈시마 니오의 삽화로 새로 출간한 단편집이 『인어의 비탄?마술사』(이하 『인어의 비탄』)입니다. 화려하고 환상적인 분위기의 〈인어의 비탄〉, 기괴하고 퇴폐적인 분위기의 〈마술사〉는 아름다움을 향한 다니자키의 한없는 동경이 과감하고 환상적으로 그려진 단편입니다. 아름다움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포기하고 기꺼이 파멸해 가는 작품 속의 두 인물에게서 청년 다니자키의 흥분과 고뇌가 느껴지는 듯한 작품입니다. 물론 작품 자체만으로도 무척 흥미로웠지만, 제가 이 책을 출간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책 속에 실린 미즈시마의 그림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도쿄에서 열린 『묘한 그림』이라는 전시회에 관한 기사를 보다가 흑백의 인어 그림 몇 점이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다니자키의 단편 〈인어의 비탄〉에 실린 그림이라는 것을 알고 바로 작품을 찾아서 읽었습니다. 스토리 자체가 흥미로운 작품은 아니지만 화려하고 환상적인 다니자키의 문장들은 금세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그리고 미즈시마의 그림은 그런 다니자키의 문장을 더한층 선명한 이미지로 다가오게 해, 그림만 보았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었습니다. 백 년 전의 작품이지만 일본에도 몇몇 출판사에서 초판 형태로 복간이 되어 있어 이 기회에 국내에도 초판 삽화와 함께 소개해 보고 싶었습니다. 문학과 미술은 오래전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이 번역서를 출간하게 된 계기도 그림인 만큼 이 작품의 삽화에 관한 이야기를 잠깐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이 작품집이 발표되었을 무렵의 일본은 대중문화가 번성하고 책과 잡지 등 출판물이 성행하던 다이쇼 시대 초기로, 문학계에서는 그때까지 일본 문단을 주도해 오던 자연주의에 대한 반발로 다양한 사조의 문학 작품이 등장하던 때였습니다. 그 무렵 문단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작가 중 하나가 영국의 탐미주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아리시마 다케오 등 여러 일본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다니자키는 학창 시절에 와일드의 작품에 심취해 와일드의 번안 소설과 번역서를 내기도 했습니다. 『인어의 비탄』이 출간되었을 때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와 비견되기도 했는데, 책 속의 삽화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와일드의 『살로메』는 1909년 모리 오가이의 번역으로 처음 일본에 소개된 이후로 여러 번역본이 나왔고, 1913년에는 도쿄에서 상연되기도 했습니다. 삽화를 그린 오브리 비어즐리 역시 그 무렵 일본 예술계에 큰 영향을 준 화가로, 잡지에서 특집으로 다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인어의 비탄』에도 『살로메』의 삽화가 언급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다니자키에게도 강한 인상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살로메』의 삽화를 염두에 두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인어의 비탄』 속 삽화는 다니자키가 미즈시마 니오에게 직접 요청하여 그려진 그림입니다. 미즈시마는 도쿄미술학교에서 일본화를 전공한 화가로, 소설이나 희곡을 쓰는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1913년부터 오사카 아사히신문에 연재소설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아사히 신문과 잡지 등에 인어 삽화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아래의 인어 그림은 1915년 아사히 신문에 실린 그림으로, 4년 후에 그려진 『인어의 비탄』 속 인어와 조금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 후로도 그는 다니자키의 몇몇 소설에 삽화를 그렸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탄생한 그림은 그 당시 소설 삽화와는 꽤 다른 느낌입니다. 메이지 시대까지만 해도 삽화는 전통적인 우키요에 기법의 그림이 많아 서양화 화가들의 그림은 대중의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메이지 시대가 끝나갈 무렵부터 서서히 서양화 화가들의 삽화가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미즈시마의 그림과 함께 새롭게 출간된 『인어의 비탄』은 와일드의 『살로메』와 비견되며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실제로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고금 이래로 이 책에 비견될 만한 것은 비어즐리가 삽화를 그린 와일드의 뛰어난 작품을 빼고는 하나도 없다” 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삽화를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 작품으로 보기보다 소설을 읽을 때 잠깐 즐기는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던 제가 우연히 접한 오래된 삽화에 끌려 그 그림이 실린 책을 찾아 읽고, 이렇게 번역서까지 내게 되었으니 개인적으로 의미 깊고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다니자키가 문장으로만 표현한, 실재하지 않는 환상 속의 세계를 미즈시마는 자신만의 이미지로 그려 냈습니다. 책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도 저마다 자신만의 상상 속 세계를 그리며 작품을 감상해 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운 독서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