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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며
반 고흐와 고갱, 파리에서 만나다 반 고흐, 고갱에게 매혹되다 반 고흐, 아를로 가다 주식중개인, 화가가 되다 빈센트, 아를에서 희망을 보다 희망이자 비극의 상징 노란 집 두 화가의 동상이몽 두 점의 자화상 고갱을 위한 선물 화가들의 집을 장식하다 두 화가가 함께 그린 그림 세상을 이롭게 하는 예술을 꿈꾸다 반 고흐의 희망, 고갱의 절망 예술가의 자립을 꿈꾸다 의자로 그린 화가의 초상 두 화가의 일상 고갱의 문제의식 반 고흐에게 카페의 의미 고귀한 야만인이 바라본 아를 두 화가의 밥상 같은 소재, 엇나간 생각들 반 고흐에게 미친 고갱의 영향력 활활 타오르는 사이프러스 같았던 예술혼 마침내 찾아온 파국 상극이자 운명인 두 사람 반 고흐의 불행이 낳은 작품들 원시의 상징을 찾았던 고갱 반 고흐의 거울 같았던 가셰의 초상 절망이 빈센트를 짓누르다 피어나지 못한 도비니 정원의 꽃 고갱이 발견한 원시의 본모습 글을 마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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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모두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아틀리에에 들어가 정식으로 그림을 배워본 적도 없었다. 오직 독학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던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고갱과 반 고흐이다. 이들의 독창성을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인상파 화가들의 초창기처럼 미술 제도로부터 떨어져서 ‘새로운 예술’을 추구했다는 것이 이들을 다른 화가들과 구분시켜주는 결정적인 특징인 것이다. ---pp.56=57,『희망이자 비극의 상징 노란 집』
반 고흐의 『붉은 포도밭』은 『씨 뿌리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실제의 풍경을 그린 것이라기보다 성서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적인 세계관이 물씬 풍기는 이 상징을 반 고흐는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고갱은 비슷한 주제를 ‘인간성 자체의 비극’이라는 현실적 문제로 치환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반 고흐의 유토피아주의가 고갱에게 오면 실존적인 비극성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p.113,『반 고흐의 희망, 고갱의 절망』 나무 아래 서 있는 행인들조차도 어떤 살아 있는 현실감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행인들은 이 그림의 중앙에 박혀 있는 특별한 무늬처럼 보일 지경이다. 말하자면, 고갱이 그려내고자 했던 것은 결코 ‘알리스캉’이라는 현실의 풍경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이 그림에서 고갱은 현실을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어낸 관념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이것은 현실에 기대고 있지만 결코 현실이라고 말할 수 없는,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 식으로 말하자면, 고갱의 마음에 있던 그 풍경일 뿐이다. 이런 고갱의 노력이 왜 중요한 것일까. 바로 그림을 자연에 대한 묘사라는 측면에 머물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p.139,『고갱의 문제의식』 반 고흐는 음악과 미술을 동일하게 생각했던 화가이기도 했다. 특히 바그너에 심취한 반 고흐는 고갱과 함께 음악과 미술의 상관관계에 대해 자주 토론을 벌였다. 바그너의 음악에 대한 반 고흐의 논의는 스테판 말라르메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말라르메는 음악을 꿈에 비유하면서 색채, 주제, 인물 성격 같은 복잡한 법칙을 동시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예술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런 생각은 그림을 작곡과 동일시했던 드가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색채의 조합과 음조의 화합을 같은 성질의 예술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나중에 등장할 칸딘스키의 추상화를 미리 예견했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p.181,『활활 타는 사이프러스 같았던 예술혼』 반 고흐는 그 미래를 기다리기에 너무 쇠약했고, 고갱 역시 마찬가지로 중간 계급과 부르주아의 위선으로 분칠된 프랑스의 문화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반 고흐가 육체적 자살을 선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고갱도 프랑스를 완전히 떠남으로써 사회적인 자살을 선택했다. 반 고흐가 세상을 떠나고 일 년 후인 1891년 고갱도 홀연 타이티를 찾아 프랑스를 버린다. 고갱의 이주는 단순하게 현실 공간의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고갱의 타이티행은 인상파가 그토록 혐오했던 프랑스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완벽한 실존적 거부이자 항거였다. 이런 측면에서 고갱은 반 고흐를 다시 만나지 않았지만, 일정하게 반 고흐와 같은 노선을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갱이 발견한 원시의 본모습」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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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불꽃을 안은 반 고흐 vs 고귀한 야만인 고갱
후기 인상파의 두 거장이 그리고자 한 이상향을 찾아가는 이 시대 최고의 파워 라이터 이택광의 그림 읽기 1886년 4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 최초로 자신의 상담소를 개업했다. 정신의학과 다른 관점에서 인간의 마음을 다루려는 시도가 시작된 것이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실천하고자 했던 그때, 눈의 망막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그리고자 했던 한 명의 화가가 파리로 찾아든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이름 반 고흐. 누구나 그에 관한 에피소드 한두 개쯤은 술술 읊어낼 수 있을 정도로 잘 알려진 화가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그의 작품 세계는 천편일률적인 해석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다. 친숙함이 본모습을 가려버린 것은 고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반 고흐가 광기 어린 천재의 표상으로 회자되는 동안, 고갱의 존재는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 고갱은 밀레 못지않게 반 고흐의 작품 세계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반 고흐와 고갱의 유토피아』는 근대 문명의 논리와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끝까지 추구하려 했던 두 화가의 이야기를 다룬다. 인문학자이자 문화비평가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택광 교수가 혼돈의 19세기로 들어가 두 화가를 주목한 데는 시대의 불운을 온몸으로 부딪쳐낸 두 사람의 모습에서 혼탁의 시대를 걷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네이버 ‘오늘의 미술’에서 큰 인기를 끌며 연재되었던 이택광 교수의 칼럼 ‘인상파 아틀리에’를 뼈대 삼아 업그레이드시킨 것으로, 후기인상파의 두 거장이 꿈꾼 이상향과 그들의 조우가 빚어낸 예술의 본모습을 찾아 떠나는 인문학적 그림 읽기이다. 인문학자 이택광 시선으로 바라본 반 고흐와 고갱 이 책은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고갱 없는 반 고흐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가설에서 출발, 아를 시절에 탄생한 두 화가의 작품들을 비교해보면서 반 고흐의 눈으로 바라본 고갱, 고갱의 눈으로 바라본 반 고흐의 모습을 담아낸다. 앞서 『인상파 파리를 그리다』와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를 통해 인문학의 프레임으로 그림을 보는 독특한 그림 읽기를 보여주었던 지은이는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져 자칫 식상해 보일 수 있는 반 고흐와 고갱의 이야기로 또 한 권의 그림 이야기를 내놓았다. 불안정한 정국과 몸집만 커져버린 자본주의가 횡행한 시대, 두 화가가 살았던 19세기 프랑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보수적의 화단畵壇의 경향과 자본주의의 격랑 속에서 자신만의 이상향을 찾아가려 했던 반 고흐와 고갱, 불안한 시대가 잉태한 예술가와 그 작품이 지은이의 현미경 속으로 들어온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인문학적 시선으로 바라본 화가와 그림, 자칫하면 어렵고 무겁게 느껴질 법한 내용이지만, 사는 동안 한 번도 주목받아 보지 못한 두 화가를 바라보는 지은이의 시선은 애틋하고 따뜻하다. 여기에 지은이 특유의 간결한 문체와 담백한 어조는 부담 없이 우리를 두 화가의 세계로 안내한다. 두 화가의 예술혼이 꽃핀 아를에서의 한 철 후기인상파를 대표하는 반 고흐와 고갱, 마치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두 사람이지만, 그들이 평생 교유하며 우정을 나눈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함께 보낸 시간은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아를’에서 보낸 9주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간은 두 화가의 삶을 크게 바꿔놓았다. 오늘날 회자되고 있는 반 고흐의 걸작들을 만들어낸 시간이었으며, 고갱에게는 화가로서의 삶을 지속하게 해준 단비 같은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왜 아를이었을까. 반 고흐에게 아를은 파리의 속물주의를 벗어날 원시의 공간이자, 자신의 이상을 펼쳐낼 장소였다. 기존의 화풍이 아닌 새로운 예술적 실험을 구매해줄 만큼 당시의 미술시장은 너그럽지 못했고, 경제적 피폐를 거듭할수록 반 고흐는 배고픈 화가들의 삶을 사회적인 차원에서 해결해보려는 의지를 담은 ‘화가 공동체’를 꿈꾸게 되었다. 그림밖에 몰랐던 그가 꿈꾸는 유토피아는 지극히 예술적이고도 이상적인 것이었다. 잘나가던 주식중개인이었던 고갱의 눈에 비친 그의 발상은 한낱 어린애의 망상처럼 보였을 것이다. 일찍이 세계를 돌아다녀보았던 고갱은 세상을 쉽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추구한 이상, 즉 유토피아란 자신이 구축한 예술 세계였다. 그는 누구보다 유명한 화가가 되길 원했고 인상주의를 넘어선 자신만의 스타일을 갖고자 했다. 그런 그에게 아를은 그저 또 다른 프랑스였을 뿐이다. 그의 아를행은 생계를 위한 계산적인 결정이었고, 그마저도 화상이었던 반 고흐의 동생 ‘테오’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고갱이 타이티 섬이라는 더 원시적인 장소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처음부터 동상이몽에서 출발한 두 화가의 아를 생활은 파국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지향하는 예술관은 서로 달랐지만, 기존의 인상파를 넘어설 미학적 혁신이라는 공동 대의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아를에 머물며 새로운 시도를 펼쳐보였다. 동일한 화제畵題를 선택해서 각자의 개성을 담아 그려낸 이 시기의 작품들은 오늘날까지 길이 남을 훌륭한 작품들로 꼽힌다. 고갱의 방을 장식해주기 위해 그렸던 반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들은 지금까지도 그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새로운 혁신의 순간이 불꽃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진 듯 짧게 끝나버린 아를에서의 시간을 통해 지은이는 분칠에 가려지지 않은 반 고흐의 맨 얼굴과 그의 신화에 가려 잊힌 고독한 예술가 고갱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인상파 화가들의 완성한 모더니즘의 바깥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두 화가가 살아간 삶의 궤적을 살펴보는 일은 단순히 미술사적 관점의 문제는 아니다. 그들의 꿈꾸었던 유토피아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었을지라도 두 화가의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두 화가가 찾고자 했던 유토피아는 오늘을 사는 우리가 풀어야 할 이상과 현실이라는 숙제에 작은 실마리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