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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학이學而 위정爲政 팔일八佾 이인里仁 공야장公冶長 옹야雍也 술이述而 태백泰伯 자한子罕 향당鄕黨 선진先進 안연顔淵 자로子路 헌문憲問 위령공衛靈公 계씨季氏 양화陽貨 미자微子 자장子張 요왈堯曰 |
李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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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에서 장대로, 장대에서 지욱선사로,
『논어』에서 더욱 짙어지는 유교와 불교의 만남! 이지, 장대, 지욱선사가 쓴 세 『논어』 주석서를 관통하고 있는 유교와 불교의 만남의 양상이 어떤지를 『논어』의 첫 구절에 대한 견해를 통해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배우고 항상 익히면 기쁘지 않겠느냐!(學而時習之, 不亦說乎!)”은 잘 알다시피 『논어』의 첫 구절이다. 이지, 장대, 지욱선사는 이를 각각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이지(李贄), 『논어평(論語評)』: “배우면 열락(悅樂)이 있을 뿐 불평은 없도다. 그 얼마나 쾌활하며 그 얼마나 안락한가! 배우지 않으면 참으로 소인이 되어, 일생 동안 번뇌 속을 헤맬 것이로다.” (學則有悅樂, 而無?. 何等快活, 何等受用! 不學眞是小人, 一生惟有煩惱而已矣.) 장대(張岱), 『논어우(論語遇)』: “세상 사람들의 ‘배움’에 대한 인식이 참되지 못하도다. 만약 ‘배움’이 어떤 일인지를 인식하게 된다면, 곧바로 저절로 이 광휘 속에서 열락에 잠길 것이다. 오직 성인만이 이 열락의 한두 지점을 묘사하였는데, 이는 물을 마시면 차가움을 알고 꿀을 먹으면 달달함을 아는 것과 같다.” (世人只認學不眞耳, 若識得學爲何事, 便自然?此際光景. 獨聖人能描寫 一二, 所謂?水知冷, 食蜜知?也.) 지욱선사(智旭禪師), 『논어점정(論語點睛)』: “대체로 사람마다 영각(靈覺)의 본성이 있어서 애초에 외물에 얽매임도 없고, 그 근원에는 열락만이 있다. 이 같은 마음의 본성을 밝히지 못한 까닭에 셀 수 없는 두려움과 근심 걱정이 솟아나는 것이다. 배움이란 바로 이것을 깨쳐 나가는 지혜를 말함이다. 생각, 생각 그 본래의 깨어 있는 성품[本覺]을 깨쳐 나가 어느 순간도 깨어 있지 않을 때가 없는 것, 이를 ‘시습(時習)’이라 한다. 어느 때이건 깨어 있기 때문에 항상 열락(悅樂)이 있는 것이다.” (蓋人人本有靈覺之性, 本無物累, 本無不悅. 由其迷此本體, 生出許多恐懼憂患. 今學, 卽是始覺之智, 念念覺于本覺, 無不覺時, 故名時習. 無時不覺, 斯無時不悅矣.) ‘학이시습(學而時習)’에서 ‘학(學)’은 처음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구체적 과목으로 인식되었다가, 유교와 불교가 만나면서, 그 한 축을 담당한 주자학에 이르러 ‘깨달음[覺]’으로 정의된다. 여기서 주자가 생각하는 ‘깨달음’은 우리의 본성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미 여기까지만 해도 현실의 삶에서 인간의 본성으로 그 초점이 선회하였기에 다분히 불교적 영향이 짙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깨달음으로서의 학이 없다면, 일생을 번뇌 속에서 보낼 것이며, 이 깨달음이 있어야만 번뇌 없는 즐거운 삶을 살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다 장대에 이르면, 이런 깨달음의 결과로서 생겨나는 열락은 물 마실 때 차가움을 알고 꿀 먹을 때 달달함을 아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일상에서 진리를 찾는 선종의 사유와 그리 멀지 않다. 더 나아가 지욱선사에 이르면, 영각의 본성을 어느 한순간도 쉼 없이 깨우쳐 있는 상태로서의 학을 말하고 있다. 이지에서 장대로, 장대에서 지욱선사로 『논어』에서 유교와 불교의 만남은 그 농도가 점점 짙어진다. 또한 세 『논어』 주석서에는 부처, 선(禪), 깨달음 등의 언어가 계속 이어진다. 마침내 공자와 부처를 동일시하거나 부처와 공자의 제자들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상황까지 나아간 셈이다 어쩌면 유교와 불교는 서로 만나기 이전에 이미 상호 소통할 수 있는 지점을 공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는 곳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지만, 인간이라는 공통된 바탕 위에 가지는 고민이 유사하였기 때문이다. 즉 부처와 공자는 태어난 나라도 자라난 환경도 달랐지만, 공통된 문제의식이 있었다. 바로 삶은 ‘고난’이라는 점을 철저하게 인식하였으며, 그 고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발견하였고, 또 그 방법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득한 과거부터 수많은 시간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공통된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해답이 우리 문명을 떠받치는 중심축인 듯하다. 그 문제의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러하다. “어떻게 하면 고통 없는 본래의 나 자신으로 살아갈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