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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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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도 쓰지 못할 것 같다. 결국 최초에 서 있던 시쓰기의 불가능성에 다시 들어서고 만다. 물론 알고 있다. 이러한 불안정한 생각들을 뚫고 한 편의 시가 불현듯 오면 그 방향으로 몸을 향하게 된다는 것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럼에도 이 그늘은 짙고 시에 대해서는 어떠한 위안도 소용없다. 나는 뒤척인다.
--- p.110 이 방도, 이 글도, 왜 쓰는지 모르는 이 작은 글도 구석이다. 글은 원래 왜 쓰는지 모르는 것이다. 글을 쓰다 말고 짚는 이마도, 내쉬는 한숨도 모두 구석이다. --- p.114 그리하여 글로 이리저리 표현해보고 무엇보다 지웠을 때, 하고 싶은 말의 형체가 나타난다. 지운 다음에 오는 말은 좀더 근접한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떨어져서 기다리고 있는 말이 있다. 더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울퉁불퉁한 과정을 거쳐 내가 말을 찾고 있다는 것을 서서히 납득하게 된다. 그리고 그 말을 간혹 찾아내기도 한다. 글은 기다려준다. --- p.130 도대체 글쓰는 이의 머릿속에 있는 무엇을 복원하는 것인지, 복원의 거절인지, 글은 어느 쪽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글은 쓰는 사람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보고 있다. 글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그러한 글쓰기의 미망에 작가들은 놓여 있는 것이다. 작가가 알지 못하는 것을 글은 보여준다. 어떤 우회에도 불구하고 글은 뚫고 움직인다. 그것은 작가가 가기를 원했던 길일 수도 있고 이후에 원하게 될 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현재는 가지 못하는 길이다. --- pp.154~155 이 감정을 놓아주는 일이 잘되지 않는다. 어떤 감정은 또렷한 통찰과 함께 냉소로 배웅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글을 쓰는 일이 여기서 비롯된다. 기억과 감정을 단지 노출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의지해서 글을 쓰면 순간 벗어나는 것 같다. 기억에 의지해서 기억을, 감정에 의지해서 감정을 벗어나는 것이다. 글을 쓸 때 가능한 일이다. 글이 어떻게 벗어남을 가능하게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사로잡힘을 해결하는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나는 그리로 나아갈 뿐이다. --- pp.211~212 언어를 붙잡는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무모하고 부질없는, 최대치의 행위이다. 인식할 수 있는 기호로 자신을 인식하려는 가장 소박한 소망이다. 슬픔이라는 말로 슬픔을 붙잡고 나는 슬픔을 지나갈 수 있다. 글은 지나가게 해준다. 그리고 결국 글만 홀로 남는다. --- pp.256~2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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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시가 움트는 자리, 詩란
각기 다른 시의 면면이 나란하게 이어져나갈 시의 흰 건반 시의 검은 건반, 詩란 시를 이야기하는 난다의 새로운 시리즈! ◎ ‘詩란’을 시작하며 특별히 ‘시’를 콕 집어서 화제로 삼은 자리는 맞다. 그러나 그다음 ‘란’이라 할 적에 이는 거창하게 지은 집이나 정리정돈을 완전하게 마친 방을 위시하는 건 아니다. ‘詩란’은 모서리거나 귀퉁이거나 가장자리와 같은 구석의 말을 사랑하는 이들의 면이다. 발음 끝에 절로 따라붙는 물음표처럼 미완으로 발산되고 자유로 수렴된다. 어쩌다 시의 ‘알’로도 읽히게 된 건 시치미가 그러하듯 시가 우연히 낳은 소소한 재미일 것이다. 시란 무엇일까, 그런 질문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도 아니나 그 품을 가두려는 정의 또한 아니다. 시론보단 가벼이, 아포리즘보단 헐거이, 시산문보단 느슨히, 그러므로 닫기보다 열기에 관심을 둔 글들이다. 시라는 세계, 그 한 세계가 하나의 알이라면 깨어서 여는 것이 도끼일 수도, 주문일 수도, 날갯짓일 수도 있겠다. 아무려나 줄탁동기(?啄同機)이니, 쓰는 이와 읽는 이에게 동시로만 열릴 세계임은 틀림없으리라. ◎ 기다림 없이, 바람 없이, 『내가 없는 쓰기』 “그 무엇을 덜어내도 훼손되지 않고 여전히 넓은, 그런 시에 대해 생각한다. 어두워도 반짝이는, 어두운 부분도 반짝이는 시에 대해 생각한다. 위태로울 뿐 휘청이지 않는 시에 대해 생각한다.” 1. 언제나 문학의 전위, 그 전위에서도 최전방에만 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등단 30년 차, 여덟 권의 시집을 펴낸 시인에게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한결같이 시의 쪽으로, 미지로, 아직 없는 곳으로 향하는 이름이 우리 시단에 있다면 단연 이수명이라 하겠다. 그러니 시로 향하되 시가 아닌 자리를 엿보는 새 시리즈 ‘詩란’의 첫머리에 놓일 응당한 이를 떠올릴 적에, 의심 없이 곧장 향할 자리 역시 바로 그 이름일 터다. 1월부터 12월까지, 그러나 날짜도 요일도 없이, 모월 모일의 ‘쓰기’를 모았다. 매일같이 썼다는 점에서 일기일 수 있겠으나 그저 하루의 형상을 남기는 기록만은 아니다. 언제나 시의 주변을 배회하며 일상의 자리를 대신해 시의 가능성을 탐문하는 여정을 담았다. 나아가려는 목적 없이, 가닿으려는 욕심 없이, 부단히 씀으로써 시를 위한 자세, 시라는 자세를 만들어가는 연습이다. 내가 쓴 모든 글이 완전히 낯설어지는 순간을 기다리며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일까. 모르는 어떤 작가의 글을 처음 읽는 것처럼 내 글을 처음 만나고 싶다. 나는 나를 만나고 싶다. 이 불가능이 가능해지도록 한 글자 한 글자 끄적거린다. (165쪽) 2. 써지지 않으면 써지지 않는다고 쓴다. 아무 일도 없으면 아무 일도 없다고 쓴다. “시를 쓰는 일은 여전히 이상”하다고, “오래 안 되다가 되기도 한다”고 쓴다(16쪽). 그저 떠오르는 대로 쓴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직 씀으로만 나아갈 수 있는 곳이 있고, 씀으로만 해방되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슬픔이라는 말로 슬픔을 붙잡고” “슬픔을 지나갈 수 있”게 되듯이(262쪽).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쓰기를 묵묵히, “글은 기다려준다”(130쪽)는 점이다. 끝끝내 닿을 수 없고 장악할 수도 없는 사물의 세계, 혹은 의식 바깥의 영역으로 향하는 시인에게 쓰기는 정답을 위한 열쇠가 아니며, 다만 처음부터 잠긴 적 없는 문을 여는 일이다. 시는 자유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수단과 목적 모두로부터 벗어나는 연습일 뿐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씀으로써, 무엇도 남기지 않고 마침내 남지 않는 곳으로 시인은 간다. 기다리지 않고, 바라지 않고, 뒤돌아서 나는 쓴다. 향하지 않는다. 쓰는 것은 바라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쓰는 동안 나는 기다림과 두려움으로부터 조금 놓여난다. 쓰면서 기다림과 두려움과 그 비슷한 것들, 그것들을 역전한 것들에서 한 걸음 떨어진다. 쓰기는 멀어지기다. 틈을 만드는 것이다. 그 틈으로 호흡한다. 기다리지 않고 쓴다. 무엇인지 모른 채 쓴다. 의식의 결락이 일어난다. (21쪽) 3. 그간의 빼어난 시집들이 시의 내부, 시쓰기의 여정이었다면 이번 ‘詩란’을 통해서는 시의 밖이자 시의 주변, 어쩌면 시의 이전부터 시의 이후까지를 포괄하는 ‘쓰기’의 영역을 시도한다. 매일 씀으로써 매일을 낚아채는 것, 하루라는 우연 앞에서 “우연을 기다리고, 우연을 알아보고, 우연을 낚아채”며 마침내 “우연을 만들 줄도 알”게 되는 것(143쪽). 그렇게 시인은 오늘이라는 우연을 만나 남김없이 쓰고, 다음 오늘을 만나러, 다음 오늘을 만들어 건너갈 것이다. 이전 시집과 다음 시집, 지금까지의 시인과 다음의 시인, 그 사이를 잇는 다리이자 건넌 뒤엔 미련 없이 털어낼 사다리와 같은 쓰기. 시인 이수명의 이 새로운 쓰기는 이후로도 이어질 예정이니, 그 첫머리를 두고 『내가 없는 쓰기』라 이름한 연유 또한 그에 짐작해본다. 시집을 낼 때마다 더 쓸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남김없이 털어낸 듯해도 다음 시집이 이어진다. 다음 시집을 내는 것은 지금의 내가 아니라 다음 시인일 것이다. 나는 계속 다음 시인이 될 수 있을까. (3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