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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론가 이동할 때에도 주변을 돌아보는 일 없이 재빨리 걸었다. 그런 그가 오늘만은 소처럼 느릿하게 걸음을 옮긴다. 그녀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를 따라붙었다. 신장 180cm 정도, 몸은 날렵하다. 책을 볼 때가 아니면 시선은 늘 정면을 향해 있으며 눈빛은 다감했다. 곧게 흐르는 턱 선은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다. 다부진 어깨를 가졌으며 군살이라곤 없는 몸이었다. 누구에게나 예의 발랐고 미소 짓는 모습은 세상 시름을 잊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었다. 외양상 어느 하나 부족함이라고는 없는 그가 수인의 관찰 대상, 밥이다. --- p.16
“괜찮은 년 데려 오면 기간은 더 짧아질 수도 있어.” 광모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의 결심은 확고해 보였다. 자신과 관계없는 여자 몇쯤 망가져도 상관없다, 아니 애초에 몸 좀 팔았다고 인생이 망가졌다고 할 수 있느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재황이 품어 왔던 기대, 혹은 신념은 분에 넘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주어진 생을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건 광모 쪽일지도. 홀로 거칠게 살아야 했던 지난 시간을 거치며 생존에 대한 두려움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재황은 본능을 제어하고 지성과 이성을 갈고 닦으며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도 흔들리는 건 대학 생활 몇 년으로는 본능에 충실해야만 했던 20년 가까운 삶의 흔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 p.57 의식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어떤 연유로 그게 필요해지는 순간 제자리에 놓여 있는 가구처럼. 수인은 제멋대로 바람도 피고 제멋대로 스스로 명을 끊어버린 아버지를 대신할 남자, 잠들기 전 시린 등을 안아 줄 남자, 식당에서 홀로 밥 먹을 때 마주 앉아 같이 먹어줄 남자, 영화 볼 때 혼자라는 사실이 쑥스럽지 않게 곁에 앉아 있어줄 그런 남자를 필요로 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이제 더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지만, 수인은 그나마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가구가 사라져버리면 닥쳐올 쓸쓸함을 감당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영을 꽉 붙잡지도 그렇다고 느슨하게 풀어주지도 못한 채 관계를 질질 끌어오고 있는 것이다. 오피스텔로 들어서며 인식기를 확인했다. 그는 겨울잠을 자는 짐승처럼 여전히 자취방에 박혀있었다. 수인은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았다. 인식기를 간이 선반 위에 올려놓고 물 속에 몸을 담갔다. 불빛은 심장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거렸다. 수인은 밥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했다. 이재황, 수인과 늘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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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은 오늘도 한 남자를 쫓으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다. 그리고 그것을 매일 수기로 일지를 쓴다. 그는 지금 정부 산하의 비공식 기관 ‘목장’에 고용되어 지정된 사람을 감시하는 중이다. 위치 인식기에서 깜빡 거리는 불빛으로 대상의 위치를 파악하고, 불빛이 움직이면 그녀도 움직인다. 함께 지하철을 타고, 거리를 두고 걷고, 음식점에서는 건너 테이블에 앉기도 한다. 마치 그림자처럼. 그리고 그 대상은 재황이라는 남자다. 재황은 수려한 외모에 성적도 우수한 명문대 학생이다.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 그저 『마틴 에덴』을 성전처럼 지니고 다니며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으로 누군가를 동정할 여유도 없이 산다. 고아로 자라 범죄에 가까운 일들을 일삼으며 살아남아, 꿈꾸던 대학까지 왔다. 하지만 여전히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고아원 시절 함께 비행을 저질렀던 광모에게서 연락이 온다. 그는 PC방 간판을 단 채 뒤로는 불법 성매매를 하고 있다. 그리고 재황에게 돈 필요하지 않느냐며 여대생들에게 명함을 돌리라고 권한다. 과거의 모든 어둠과 결별하고 더 상승된 지위를 꿈꾸지만, 그는 결국 명함이 든 가방을 손에 쥐고 만다. 그리고 몰아치는 운명의 파고를 느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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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모든 것을 낱낱이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다
세계문학상 수상작가 전민식이 던지는 이 사회의 가장 서늘한 문제 2012년, 한순간의 실수로 컨설턴트라는 소위 잘 나가는 직업을 잃고 추락한 주인공이 고급 애완견을 산책 시키는 일을 하면서 인생 역전을 꿈꾸는 내용의 소설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로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전민식. 그는 이 소설로 “사람 냄새가 나는 소설, 훈훈한 소설”이라는 심사평을 들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정반대의, 사람 냄새와는 거리가 먼 차가운 소설로 돌아왔다.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통제하는 음모 가득한 비정한 사회. 이번 신작 『13월』에서는 그러한 사회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끝없이 방황하는 인간을 그린다. 개인 정보 유출 문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가입하고 이용하는 통신사와 금융기관, 쇼핑몰 등이 해킹을 당하는 일이 속출하고 있으며 그 정보를 이용한 보이스 피싱과 같은 신종 사기 수법이 날로 증가한다. 게다가 세계 최대 포털 사이트 구글의 ‘구글링(googling)’은 엄청난 성능의 검색 엔진으로 웹 상에 남긴, 기억에도 없는 정보들을 찾아내 섬뜩하게 만드는가 하면, 이를 악용해 한 개인의 정보를 모조리 다 알아내는 일명 ‘신상 털기’가 문제가 되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이전 정부에서 민간인의 정보를 찾아내고 감시했다는 ‘민간인 불법 사찰’에 대한 진의여부가 의혹만 남긴 채 종료되기도 했다. 내 정보가 안전하기는커녕 우리가 무너진 외양간처럼 위태롭다. 하지만 전자 통신망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이제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의존도가 높은 현대인들은 그만큼 정보 유출로부터 안전할 수가 없다. 『13월』은 이러한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위협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전화번호, 신용카드 사용 내역, 교통 카드 사용 내역, 적립 카드 사용 내역, 스마트폰 사용 내역 등등. 일상적인 일이니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정보들로 한 인간이 가진 취향이나 이동 경로, 성향, 심지어 철학이나 친구 관계까지도 파악할 수 있는 얘깁니다. 문명의 발달이 인간을 어제보다 편하게 만들어 준 건 분명하지만, 그만큼 인간의 삶을 감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저는 실감했습니다. _ 작가 후기 중 고아로 자라 일찍이 비행과 범죄에 노출되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꿈꾸던 명문대 학생이 된 재황. 하지만 그에게는 결코 평탄한 삶이 주어지지 않는다. 필연적인 가난으로 인해 위험한 유혹에 휩쓸리고 급기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마수에 빠져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다. ‘관찰자’라는 이름으로 그의 모든 일상을 기록하는 수인이라는 여자다. 그리고 수인이 소속된 곳은 ‘목장’이라는 수상한 이름을 간판으로 내 건 비밀 정부 기관으로 ‘인류를 위한 숭고한 프로젝트’라는 미명 하에 개인을 관찰하고 연구하여, 인종을 개량한다는 엄청난 음모를 가진 곳이다. 특히 주인공 재황은 우수한 유전 인자를 가진 인간이 열악한 환경을 어떻게 해쳐나가는지를 연구하기 위해 키워진 인물이다. 그는 꿈에도 그 사실을 모른 채 계획된 운명의 잔인한 시험들을 치른다. 소설은 주인공 재황과 그를 지켜보는 인물인 수인의 시점이 교차하며 긴장감 있게 전개된다. 아버지의 불륜을 훔쳐보다 관음증과 조울증 등의 정신 질환을 앓았던 수인은 누군가의 충분한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노력했으나 병력으로 인해 4대 보험이 되는 회사에 취직할 수가 없었고, ‘목장’은 처음으로 그녀의 능력을 인정해주었다. 수인은 타고난 예민한 감각으로 재황을 관찰한다. 애정 없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만 하는 가족과 구멍을 간신히 손으로 메우는 듯한 기분으로 만나는 연인 외에 철저히 혼자였던 그녀의 일상이 재황을 지켜보는 일로 가득 찬다. 그녀에게 재황은 점점, 전혀 모르지만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고 멀지만 가까운 존재가 된다. 그리고 벼랑으로 내몰린 상황에서 흔들리고 좌절하지만 그래도 다시 일어서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급기야 자신의 존재가 흔들릴 정도로 그에게 깊이 빠져든다. 그녀는 그에게서 누구에게보다 큰 위로를 받으며 점점 그의 그림자가 되어 가는 자신을 느낀다. 하지만 그림자이기에 결코 재황의 앞에 나설 수 없다. 직접 대면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는 존재를 사랑하는 수인의 모습은 관계에 지친 현대인의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13월’은 불안과 위기의 시간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는 이처럼 소설 전반에 깔린 정서를 아우르며 재황과 수인이 함께하고 또 서로를 영원히 잃어버리는 시간을 암시한다. 비밀 정부 기관의 음모에 의해 실험 대상으로 키워진 남자와 점점 그의 그림자가 되어 가는 여자. 『13월』은 고도로 발달된 문명 속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인간의 존재론적인 위기에 서늘한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이자 시종일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페이지 터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