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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그곳의 풍경
마래터널 가지꽃 게사니와 사라진 것들 나의 애착 이불 엘비스, 도넛, 그리고 구두장이 자매가 나누던 이야기_ 그리고, 다행이다 그곳의 풍경 완벽한 하루 2부 정오의 아버지 그림을 그리는 시간 이사 공씨네 김밥 피아노 어떤 만남 상관없어, 남의 감정쯤 말하지 못한 것 돌아오는 길에 왜가리를 보았다 잘 먹는 일 정오正午의 아버지 요양병원 장례식장 어쩌면, 코끼리처럼 3부 나는 요즘 중년의 시간을 건너는 중입니다 그날의 찰스 키핑 대전역에서 김승희 씨 청소부 상담 면접 나는 요즘 규화목단백석 그때의 기분 복도에서 함께 시poetry 중년이라는 축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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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끔 아침 해가 밝아 올 때까지 얘기를 나눴다. 바싹 야위었지만 눈빛만은 살아 있던 아버지를 함께 떠올렸다. 별로 다정하지는 않았어도 각자의 기억 속에 뭉클한 이야기 하나쯤은 남겨 준 아버지를 생각했다. 물론 당신 인생에 맞서지 못하고 서서히 무너져 간 아버지 때문에 엄마와 우리 인생도 힘들었다는 원망도 했다. 아버지가 그때 조금 더 힘을 냈더라면, 그래서 그렇게 인생을 버리지 않았다면 우리도 좀 달라졌을까.
---「자매가 나누던 이야기」중에서 우리는 나오는 길에 잠깐 차를 세우고 근처 개울로 내려갔다.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좀 닦고 싶었다. 개울로 내려가 손을 담근 그 순간 물이 어찌나 차고 시원하던지 언니와 나는 삼베 치마저고리가 다 젖도록 정신없이 물을 퍼올려 세수를 했다. 손과 얼굴을 닦고 마른 먼지가 땟국물처럼 엉긴 목덜미도 씻어내는데, 그때의 기분을 지금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엄마는 돌아가셨는데, 4월의 꽃은 만발하고, 흐르는 봄날의 개울물은 말할 수 없이 시원하고. ---「그곳의 풍경」중에서 꼭 떠나겠다, 마음먹고 떠나온 고향이었다. 그런데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사람도 도시도 온통 낯설고 무서웠다. 길을 건너기 위해 지하도에라도 들어가게 되면 한 번도 원하는 곳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올라갔다를 반복하다 보면 자존감이 무너졌다. 길도 못 찾는 바보가 되어 무한 반복의 궤도에 갇힌 기분을 느낄 때도 있었다. ---「완벽한 하루」중에서 어느 날 코끼리 한 마리가 빛과 바람 속에서 서서히 삭고 있는, 이제 더 이상 누군지 알 수 없는 뼈에 다가간다. 코끼리는 긴 코로 기억을 더듬어 빛바랜 뼈를 쓰다듬기 시작한다. 이곳저곳, 구석구석을 천천히 어루만지고는 크게 울음 운다. 뼈의 주인은 오래전 이곳에서 생을 마친, 수코끼리의 가족이다. 어느덧 자라 무리를 떠나 홀로 떠돌던 젊은 수코끼리는 잊지 않고 찾아와 그를 기린다. 그렇게 오랜 시간 쓰다듬고 어루만지던 젊은 수코끼리는 뼈를 두고 다시 혼자만의 길을 떠난다. ---「어쩌면, 코끼리처럼」중에서 이별은 천천히 찾아왔다. 다툼도 미움도 없이 그냥 조금씩 멀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졌다. 그중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면 나와 그 사람의 시간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김승희 씨」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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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펼쳐진 바다처럼
인생도 그렇게 아름답기만 하다면 사람은 누구나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도 먼 훗날엔 특별한 기억으로 남게 될지 모른다. 이윤의 에세이집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그런 순간들을 담은 짧은 이야기 모음집이다. 작가는 살면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과 감정을 마치 그림을 그리듯 다루고 매만진다. 그 글을 따라가며 읽다 보면 인생이란 어쩌면 기억의 띠로 이루어진 무엇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모든 것을 뒤로하고 고향을 떠났다. 그런데 막상 기차가 덜컹거리며 달리기 시작하자 흥분은 금방 불안과 뒤섞였다. …… 나, 어쩌지? 두려움이 몰려왔다. 이젠 누구의 뒤에도 숨을 수 없다. 누구도 내게 등을 내주지 않을 테니까. 불운에 마음을 더 가깝게 두는 나쁜 버릇 때문에 마음이 떨리고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_(본문 18쪽) 사람은 누구나 새로움을 꿈꾼다. 그래서 여행지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이는지도 모른다. 열아홉 살의 작가 역시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흥분된 마음으로 고향을 떠난다. 하지만 동경하던 도시로의 출발점에서 문득 두려움에 압도된다. 내 편 하나 없는 낯선 도시에서 살아갈 시간의 막막함에 오히려 길을 잃은 기분이다. “순간 기차가 터널을 벗어났다. 바다였다. 아침 햇살이 다투어 튀어 오르는, 끝없이 반짝이며 빛나는 바다가 열아홉의 내 눈앞에 펼쳐졌다.”_(본문 18쪽)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터널의 어둠 속을 벗어난 순간 어린 작가의 눈앞에 펼쳐진 빛나는 바다. 아름답게 펼쳐진 바다처럼 인생도 그렇게 아름답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인생의 쓴맛을 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기대는 자주 실망으로 바뀌고 해맑게 그려 왔던 어린 시절의 꿈은 점차 퇴색되어 쪼그라든다. 우리는 그렇게 나이 들어 간다.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적는다. “그렇듯 인생의 어두운 터널 끝에 항상 빛나는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면야 무엇인들 두려울까. 하지만 언제부턴가 산다는 건 오히려 지긋지긋한 멀미에 시달리면서도 목적지를 향해 그저 가야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운 좋게 반짝이는 바다를 만날 수도 있겠지만, 그런 행운이 없다 해도 그 또한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이제는 하게 됐다. 그런 나이가 된 것이다.”_(본문 19쪽) 3부로 이뤄진 책 『그림을 그리는 시간』 1부의 맨 앞자리에 놓인 [마래터널]은 인생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보여주며 작품의 바탕을 이룬다. 그리고 작가는 다시 말한다. “그래도 인생은 뭐, 별 탈 없이 흘러갈 것이다.”_(본문 201쪽) 그렇다. 인생은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특별하지 않아도, 다만 별 탈 없이 흘러가기만 해도 고마운 것임을 알아 가는 거. 그래서 이윤의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기쁘고 슬프고 혹은 행복하고 아픈 기억의 강을 따라 걷는 우리가 손 내밀고 싶은, 그런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