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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5
1부│예술의 눈초리에 매달린 속눈썹처럼 아트페어 · 13 입속의 사계 · 15 착시 · 17 안개가 잎을 키웠다 · 19 침묵에 눌린 건반의 입술 · 21 천년 달빛의 조연을 기리다 · 23 바람미술관 · 25 달의 빈집 · 27 꽃의 우화 · 29 무엇으로 지은 집이기에 · 31 빨간 첼로소녀 · 32 오로라, 색의 카덴차 · 34 푸른 시의 연인들 · 36 목련나무 교실 · 38 피죽새 · 40 2부│발톱은 눈 속에 튀어든 기억으로 웃자란다 마두금 · 45 너무나 가벼운, 담론 · 47 블루, 만져지지 않는 · 49 나비잠 · 51 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53 나신裸身 · 55 코피노 · 57 양서류의 피는 빨갛다 · 59 혹성, 혹은 어떤 일 · 61 바다는 썰물 중 · 63 개기월식 · 65 생크림케익 · 67 데인다는 말을 몰랐다 · 69 햇볕정원 · 71 3부│아직 물고기의 아가미는 선홍색이다 젖은 빵 말리기 · 75 롤러블레이드 · 77 카테리니, 카테리니 · 79 춤의 화법 · 81 맛별 돋는 밤 · 83 나비 날개에 스치다 · 85 보라에스키스 · 86 거울보기 · 88 하얀지문 · 90 견고한 마디 · 92 인화되지 않는 웃음 · 94 만인 옹기상 · 96 초록 물고기 · 98 디지털 상상력 · 100 가로등이 수상하다 · 102 반달로 뜬 추석 · 104 긴 통화는 암호다 · 106 4부│달에 간 널 보려고 시를 읽었다 조등弔登 · 111 밥나무 · 112 장미와 미라 · 114 검정의 페르소나 · 116 시바를 만나다 · 118 비밀 · 120 남겨진 말은 무럭무럭 자란다 · 122 카레엔 인도가 없다 · 124 셀룰러 메모리 · 126 소실점 · 128 단단한 집 · 130 설익은 예감 · 132 이별 아닌 이별 · 134 해설 | 김수이(문학평론가) 바람과 안개의 ‘내부’를 투시하는 이중의 심미안 · 1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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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가 실내화 벗어들고 나비를 쫓아다닌다
팔랑거리는 치맛단이 나비의 실루엣이 되어 갈 때 못갖춘마디에 매달려 있던 빈 수저 같은 이분음표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내린다 ---「빨간 첼로소녀」중에서 어느 미술 평론가의 “작품에 깊이가 없다”는 말 너무 깊게 들어버린 한 젊은 여류화가가 깊이를 앓는다 그녀가 저물어가는 그믐달처럼 베란다 난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내부를 보여주기 위해 점점 기울어가는 물병처럼 그녀가 한쪽으로 기울어가다 엎질러진다 ---「너무나 가벼운, 담론」중에서 심연의 동굴로 사라진 너를 달은 낮에도 깨어 지켜보고있다 염색물에 무방비로 던져진 천조각처럼 너는 물들어갔다 물들었다는 것은 영혼까지 번졌을 때 하는 말이다 아직도 퍼렇게 버티고 있는데 살아낸다는 것은 블루가 점점 희미해진다는 것 고요해진 너의 눈빛을 만난다 ---「블루, 만져지지 않는」중에서 한 생애가 저리 투명할 수 있다면 봄은 다시 오지 않겠냐고 던져진 꽃잎의 맨몸에 햇살이 드리워진다 벗은 몸이 흐릿해진다 진실의 불구덩이 앞에 드러난 누군가의 치부에도 구름의 담요 한 장 필요치 않겠냐는 말 방백처럼 들렸다 ---「나신裸身」중에서 하지 않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 사이에서 꽃은 시들어 가고 목탄으로 그리는 세밀화처럼 여자를 그리려던 바다가 밑그림에서 잠들어 버리면 어느새 바다에 다시 와 있는 여자의 손에 꽃잎 같은 아이가 나풀나풀 매달려 있다 그려지지 않는 것은 스스로 채색하고 완성되는 걸까 흑백 사진에 고스란히 남은 기억의 향기처럼 ---「바다는 썰물 중」중에서 가로등이 일일이 챙기던 골목의 대소사를 깜박할 때가 있다 익숙한 이웃들은 별일 아니라며 흐릿한 불빛 아래서 제 갈 길을 잘도 간다 훤한 대낮에도 찾지 못하는 게 널린 세상이라고 함께한 세월의 무게 외면하지 않는다 ---「가로등이 수상하다」중에서 화병 속 장미의 웃음은 사라진지 오래인데 시든 꽃잎은 물방울 속에서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치사량의 장미 꽃잎을 먹은 젊은 연인들처럼 황금빛 덧칠한 욕망은 미라를 붙들고 불 꺼진 어둠 속에서 끈질기게 번쩍였다 ---「장미와 미라」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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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애가 저리 투명할 수 있다면 봄은 다시 오지 않겠냐”
모호한 세계에서 의미를 건져 올리는 일 안개 속에서 무수히 타종되었던 바람의 문장은 궂은날 눈만 홀리다 금세 사라지는 여우별이거나 의식의 창을 가린 검은 조각의 매지구름이거나 깨어나 메모장 찾다 다시 든 그루잠 속에서 번개처럼 잡아챈 시의 나비 날개다 안개 장마당에서도 시의 눈속임을 하는 야바위꾼을 만날 수 있다 절벽은 어디에나 있다 그럴 땐 감각의 집어등을 밝히고 허밍, 몰입으로 숨죽인 뱃고동 소리가 더 멀리 간다 아사시한 안개 스토리가 이어지는 곳에서 안개를 먹고 자라난 사물 아이의 눈은 웅숭그레 깊어져 있다 ― 〈안개가 잎을 키웠다〉 부분 유지인의 시들은 독자를 희뿌연 새벽안개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안개는 불투명한 몸피로 세계를 가리면서 실상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시인은 모든 것을 희미하게, 비가시적으로 만드는 안개의 그러한 특성이 삶의 전모를 감추어 어쩌면 빈약하고 얄팍할 수 있는 세계에 깊이를 부여하고 있다는 걸 보여 준다. 그리고 유지인에게 이러한 안개 속을 헤쳐 나가는 과정은 예술의 다른 이름이자 동시에 삶의 방법론이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안개 속에서 “절벽은 어디에나 있”지만, “그럴 땐 감각의 집어등을 밝히고 허밍”을 하듯이, 안개 속에 가려진 희끄무레한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웅숭그레 깊”다. 여름은 호흡으로 너무 꽉 잡으려 하면 목울대를 타고 도망쳐 버린다 튀어 나가려는 여를 부드러운 ‘ㄹ’이 끌어당기고 ‘ㅡ’가 어르고 구슬려 ‘ㅁ’으로 주저앉게 해야 한다 안팎의 열기를 눌러 앉히고 사이좋게 공존케 하는 여름― 하고 발음하다 보면 단전 밑이 서늘해지고 치솟는 마음이 제자리를 찾는다 ― 〈입속의 사계〉 부분 안개 속에서 예술의 본질을 더듬어 나가는 일은 난해하다. 모호한 말들은 제자리에 내버려 두고 예술에 조응하는 말들만을 건져 올리는 과정은 수많은 비교와 고민의 과정이 따른다. 따라서 시인은 언제나 마음을 대신할 단어를 찾아 애를 태우면서 시가 되지 않는 문장들과 씨름하다 지친다. 하지만 유지인의 화자는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로와 어려움조차 시의 양식이라는 듯,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시가 될 수 있을 단어를 한 번 더 발음한다. 이러한 풍경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시를 읽는 우리들 속에도 있던, 언젠가 꿈꿨던 열망이 다시 꿈틀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무엇이든 오래 품으면 몸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지 밤마다 받아 마신 겹눈을 깨우는 이슬의 문장 듣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는 말이 있다고 우두커니 있을 때에도 하늘의 창은 열려 있어 통점의 마디를 딛고 생겨나는 마디들 “우리 기억에 불을 붙이자” 거침없는 보폭에 허공도 저만치 물러서고 바람의 측량이 시작되었다 ― 〈견고한 마디〉 부분 시집의 해설을 맡은 김수이 문학평론가는 유지인이 마치 “음악의 선율이 흐르듯 유려”하게 단어가 “우리의 몸과 마음에” 어떻게 “내면화하는가를 정교하고 아름다운 분석을 통해 묘사”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유지인은 사물을 치밀하게 묘사하지만 어렵지 않게, 대상을 정교하게 분석하나 이해보다 감응에 가깝게, 말로 그림을 그리듯 시를 전달한다. 시인의 화자를 따라가다 보면 “듣지 않아도 저절로” 시의 노래가 들리는 순간을,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처럼 “우두커니 있을 때에도” 몸에 맞닿는 예술의 빛깔을 마주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