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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
선물 징검다리 네버 엔딩 스토리 숨바꼭질 시간을 되돌리면 눈먼 자들의 우주 사랑의 유통기한 동상이몽 안부 동호회 첫사랑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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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속으로
삼 년 만의 재회다. 나는 향을 사르며 영정 사진 속 지수의 얼굴을 바라봤다. 지수는 가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지수의 입술 사이로 치아가 살짝 보였다. 지수가 그토록 싫어했던 덧니는 결혼 후 교정한 듯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치아 교정의 영향으로 미묘하게 달라진 지수의 턱선을 눈으로 훑으며, 나는 지수가 이미 오래전에 나를 떠난 여자임을 실감했다. 나는 상주의 자격으로 서 있는 지수의 남편과 맞절하고, 그에게 의례적인 위로의 말을 건네며 일어섰다. 그런데 그가 뜻밖의 말로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당신을 압니다.” -24쪽 「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 나는 스무 살이 된 딸과 마주 앉아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는 모습을 잠시 상상해봤다. 그 자리에서 딸은 내게 무엇을 질문할까. 나는 딸에게 무슨 답을 해줄 수 있을까. 무슨 질문이든 간에 딸에겐 주저하지 말고 행복을 선택해야 한다는 답을 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항상 널 믿고 응원한다고. 주눅 들지 말고 네가 가고 싶은 길을 가라고.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언제나 지금이라고. 내가 너의 징검다리가 돼주겠다고. -74쪽 「징검다리」 “나도 지금까지 너 뒤치다꺼리하다 보니 반은 법조인이야. 형사 끝나면 다 끝날 것 같아? 민사로 가겠지. 너 때문에 입은 손해를 다 배상하라면서 말이야. 형사와 민사가 별개의 소송이란 건 너도 잘 알지? 뉴스를 찾아보니까 그놈이 찍은 광고가 다 내려갔다더라. 그게 끝일까? 광고주에게 위약금을 물어줘야 할 거야. 위약금은 보통 출연료의 두세 배라더라. 과연 그놈이 가만히 있을까? 만약 민사에서 지면 그거 다 네가 뒤집어써야 해. 내가 그놈이라면 너를 포함해 자기한테 악플을 단 모든 사람을 고소해서 합의금을 뜯어낼 거야. 내지 않고 버티다 보면 신용불량자로 등록되고 계좌도 압류될 거야. 경찰은 너 잡겠다고 전국에 수배령을 내릴 테고. 그러면 이 땅에서 사람 구실을 전혀 할 수 없게 되겠지. 삼면이 바다인데 어디로 도망갈래? 그러다가 마지막에 한강 물 온도 재는 거야. 그런 미래, 감당할 수 있겠어?” -92쪽 「네버 엔딩 스토리」 나는 나와 비슷한 또래인 B가 이런 아파트를 신혼집으로 살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B는 내 놀란 얼굴을 보고 손사래를 쳤다. “안방과 화장실만 우리 거고 나머지는 은행 거예요. 부모님 도움도 좀 받았고요.” “얼마에 사셨어요?” B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을 피했다. “뭘 또 그런 걸 물어보세요. 쑥스럽게. 인터넷 뒤지면 다 나와요. 그리고 여기는 근처에 있는 다른 아파트 단지보다 학군이 별로여서 저렴한 편이에요.” 저렴한 편이라고? 도대체 어느 정도가 저렴한 편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B가 안줏거리를 준비하러 주방으로 간 사이에 휴대전화로 이 집의 시세를 검색해봤다. 이 집과 같은 평형 매물의 최근 실거래가 중 최저가는 4억 8,500만 원이었다. B의 신혼집은 내가 연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십 년 가까이 모아야 겨우 살 수 있는 집이었다. -124쪽 「숨바꼭질」 “제안을 받아들이신 거죠?”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고작 한 시간도 흐르지 않은 사이에 제게 벌어진 일이 너무 버라이어티해서. 제 흔적을 세상에서 완전히 지우는 일이 이렇게 빨리 결정할 일인가요?” “287번째 범우 씨에게는 잠깐일지 몰라도, 저와 저를 스쳐간 286명의 범우 씨는 오늘 이 순간을 위해 긴 시간을 기다리며 준비했어요.” “제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면요?” 경선이 연필꽂이에서 문구용 커터를 위협하듯 꺼내 보였다. “이미 수도 없이 죽였는데 한 번을 더 못 죽일까. 저는 범우 씨가 전장에서 살인귀가 되는 모습은 차마 못 보겠어요. 그 전에 제가 죽여드릴게요. 확실하게.” -166쪽 「시간을 되돌리면」 그랬던 태산신도시가 개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자 두 배 넘게 시세가 뛰어올라 명품신도시라는 별명을 얻었다. 고양의 일산, 성남의 분당과 판교, 수원과 용인의 광교, 화성의 동탄처럼 태산이라는 동 이름도 브랜드가 됐다. 태산신도시 입주민은 자신을 고진 사람이 아닌 태산 사람이라고 칭했다. 다른 동 주민은 이를 고깝게 바라보면서도 태산신도시 개발의 프리미엄이 자기가 사는 동네에도 미치기를 바랐다. 이 같은 변화에 김인형이 태산동을 바라보는 감정도 복잡해졌다. -253~254쪽 「동상이몽」 민원인과 통화하는 동안에도 나는 경희 언니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쓰러진 동료 직원을 바로 옆에 두고도 일을 멈출 수 없는 처지가 기가 막혀 눈물이 터져 나왔고 목소리는 뭉개졌다. 민원인은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다며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다. 경희 언니는 잠시 후 도착한 구조대원의 발 빠른 심폐소생술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만, 그날 이후 콜센터에 다시 출근하지 못했다. 이 사건은 SNS를 통해 폭로돼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다. 폭로자는 뜻밖에도 누구보다 열악한 근로환경을 잘 견뎌왔던 윤하였다. -282쪽 「안부」 나는 조문객들에게 음식을 나르며 첫 키스의 추억을 떠올렸다. 스무 살 여름에 아무도 없는 대학교 박물관 구석에서 첫사랑과 몰래 나누었던 수줍은 첫 키스에서 나는 달콤한 연유의 향기를 맡았다. 어머니의 일기장 속 오빠와 사다코가 멀어져간 자리에도 그 달콤한 연유의 향기가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 -319쪽 「첫사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