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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네덜란드_ 헤이그 Den Haag /1883년 1월~1883년 9월
10. 네덜란드_ 드렌터 Drenthe /1883년 9월~11월 11. 네덜란드_ 뉘넌 Nuenen /1883년 9월~1885년 11월 |
Vincent Willem van Gogh
빈센트 빌럼 반 고흐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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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의 말을 계속 떠올리고 있다. ‘Je ne veux point supprimer la souffrance , car souvent c’est elle qui fait s’exprimer le plus energiquement les artistes(고통을 회피하지 않겠다. 고통이야말로 예술가의 표현력을 가장 강렬하게 끌어올려주기 때문이다).’ (……) 나 자신을 전원화가로 지칭했는데,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앞으로는 더 분명해질 거야. 내가 그 옛날에, 밤이면 광부나 토탄 캐는 사람들의 집, 불가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고, 여기서는 직조공이나 농부들의 생활상을 관찰한 게 괜한 짓은 아니었더라. 작업 때문에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어. 온종일 농부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 새 나도 그 속으로 빨려들어가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거든.
네 편지를 보니, 전시회에서 보면 대중들이 밀레의 작품에 무관심한데 이런 상황은 예술가는 물론이고 미술상들에게도 맥빠지는 일이라고 썼더구나.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런데 무엇보다 밀레 자신 이런 상황을 느꼈고 잘 알았어. 상시에의 책을 읽다가 내가 놀랐던 건, 밀레가 화가로서 첫발을 내딛던 순간을 회상하는 부분이었어.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의미는 기억난다. ‘내가 화려한 신발을 신고 부유한 삶을 사는 신사였다면 이런 무관심이 정말 괴로웠겠지만, puisque j’y vais en sabots je m’en tirerai(난 나막신을 신고 다니니까 잘 헤쳐나갈 수 있다).’ (……) 내가 밀레의 말을 상세히 설명하는 이유는 ‘도시 사람이 농부를 그리면 생김새들은 제법 근사한데, 본의 아니게 자꾸 파리 외곽 변두리가 떠오른다’던 네 편지 내용이 생각나서야. 나도 전에 종종 그런 인상을 받았거든. 그런데 그건 화가 자신이 전원생활에 충분히 깊이 뛰어들지 못해서가 아닐까? 밀레는 이런 말도 했었지. ‘Dans l’art il faut y mettre sa peau(예술에 마음과 영혼을 다 바쳐야 한다).’ --- 「400번 편지에서」중에서 [감자 먹는 사람들]은 확실히 황금색과 잘 어울리는 그림이야. 아니면 잘 익은 밀밭의 깊은 색을 가진 벽지로 도배된 벽에도 잘 어울릴 거야. 이런 환경이 아니라면 절대로 걸어선 안 돼. 어두운 배경에서는 진가가 드러나지 않거든. 특히나 흐릿하고 밋밋한 배경에서는 더 볼품없어 보여. 무척 어두운 실내에서의 순간을 담은 그림이라서 말이야. 사실은 실제 장면도 일종의 금색 테두리에 들어 있었어. 난로의 열기와 불빛이 흰 벽을 가득 비췄거든. 그림에서는 잘려나갔지만, 실제로는 그 모든 게 함께 비춰진 모습이 관찰자의 눈에 비친 장면에 가깝지.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이 그림은 꼭 황금색이나 짙은 동색 테두리의 액자에 넣고 감상해야 해. 이 그림의 가치를 제대로 감상하고 싶다면 내 말을 꼭 기억해라. 이 그림을 금색 계열 옆에 두면 빛이 전혀 없는 곳에 두어도 빛이 느껴질 거야. 또한 밋밋하거나 새까만 배경에 뒀을 때 보여지는 대리석 무늬 같은 점들도 사라지지. 그림자를 파란색을 활용해 칠했기 때문에 금색이 가장 잘 어울려. (……)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 정말로 보여주고 싶었던 건, 이 농부들이 램프 불빛 아래서 집어먹는 감자가 바로 그들의 손으로 땅을 일구고 수확해서 식탁에 차린 것이라는 사실이었어. 손으로 하는 노동을, 그들이 정직하게 일해서 얻은 정직한 식사를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같이 좀 배웠네 하는 치들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말이야. 그래서 난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고서 그저 예쁘네, 잘 그렸네, 말하고 그치는 게 정말 싫다. --- 「404번 편지」중에서 〈방직기〉는 현장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크레용으로 다 그린 습작이었어. 힘들었지. 방직기 가까이 앉아 있어야 했던 탓에, 비율을 측정하는 게 유난히 힘들기도 했고. 그래도 직조공 그림자라도 그려 넣었던 건, 이런 말을 하고 싶어서야. 여러 개의 널빤지를 이어붙인 때가 탄 시커먼 떡갈나무 덩어리가 회색조의 배경과 대비를 이루고, 그 한가운데 검은 원숭이 같기도 하고 난쟁이 같기도 하고, 아니면 유령 같기도 한 인물이 아침부터 밤까지 널빤지를 두드리며 작업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고. (……) 무엇보다 참을 수 없었던 건, 방직공의 형체를 그려넣은 부분에서 널빤지 덜커덕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어. 그래, 맞아. 이건 기계 그림이야. 그런데 이걸 기계 설계도 옆에 나란히 둬봐. 내 그림에서는 확실히 유령이 느껴질걸. 사실은 전혀 기계 그림이 아닌 거야. 혹은 je ne sais quoi(뭔지 모를 무언가이지). 만약에 그 방직기를 직접 설계한 기술자가 그린 그림 옆에 내 습작을 세워도, 내 그림에서는 땀에 젖은 손으로 만져서 손때가 탄 떡갈나무의 결이 강렬하게 느껴지지. 그리고 바라보고 있으면 (방직공을 전혀 그려넣지 않았어도, 혹은 그를 아주 이상한 비율로 그려넣었더라도) 그 일꾼이 반드시 떠오르게 된다네. 설계사의 설계도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이지. 일종의 한숨이나 탄식도 널빤지 사이로 간간이 흘러나올 걸세. --- 「라44번 편지」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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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는 그림을 단 1점밖에 팔지 못했는데
죽어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가 된 빈센트 반 고흐, 스스로 자기 그림의 큐레이터이자 도슨트가 되어 설명해주는 듯한 상세한 뒷이야기들 빈센트 반 고흐는 지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화가 중 하나로 손꼽히지만, 살아생전에는 작품을 900여 점이나 쉴 새 없이 그렸어도 단 1점밖에 팔지 못한 무명화가였다. 죽기 반 년쯤 전에 친구의 누이가 [붉은 포도밭]을 사준 것이 전부였다. 10년 동안 그림에 매진했지만, 얼굴도 ‘못생기게 그리고’ 색도 ‘이상하게 칠하는’ 괴팍하고 무능력한 화가로 취급받았다. 그런 빈센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곁을 지켜준 것은 4살 터울의 동생 테오뿐이었다. 둘 다 비슷한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고 화랑에서 일을 시작했기에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며 편지를 주고받았던 것이 평생 이어졌다. 빈센트는 긴 방황 끝에 27세라는 늦은 나이에 화가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인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혹사에 가까울 정도로 그림 연습에 매진했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자 후원자인 동생 테오에게 엄청난 분량의 편지를 자주 썼는데, 특히나 그림을 그리는 전 과정을 자세하게 적었다. 지금 어떤 습작을 훈련 중인지, 그림의 대상은 어떻게 선정했는지, 어떤 기법으로 어떻게 완성할 것인지, 어떤 지점에서 왜 실패했고 어떻게 수정할 것인지, 무슨 액자에 어떤 조명을 설치해서 감상할 것인지 등등, 마치 스스로가 자기 그림의 큐레이터이자 도슨트가 된 듯이 상세히 설명해서, 오늘날 우리가 반 고흐의 그림을 더 정확하고 깊이 감상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런 의미에서 형제간의 편지글이지만, 담긴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화가 본인이 직접 설명하는 임파스토 기법(덩어리처럼 두껍게 칠하는 채색), 보색대비, 데생의 원칙, 자연을 그리는 이유 등을 듣고 나면 ‘못생기고 이상하게’ 보였던 그림들의 의미가 깊고 생생하게 느껴진다.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영어의 3개국어로 미술(예술), 종교, 문학 등등 다방면에 걸쳐 쏟아내는 인문학적 고뇌 죽을 때까지 이해받지 못했던 ‘고독한 화가’ 빈센트의 간절한 독백들 방대한 분량, 전문적인 회화 용어 외에도, 이 사사로운 편지글들이 읽기 힘든 이유들이 더 있다. 우선, 편지에 3개의 언어(네덜란드어, 영어, 프랑스어)가 복잡하게 혼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빈센트는 세 언어 중 어느 언어도 완벽히 구사하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학업을 중단하고 외국을 떠돌며 외국어를 독학한 탓에 외국어 문법은 물론이고 모국어 실력도 완벽하지 않았던 것이다. “빈센트가 구사하는 네덜란드어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브라반트 지역 주민들이 사용하는 구어에 가까우며 독일어 어법에 영향을 받은 표현을 빈번하게 사용한다. 게다가 어떤 경우에는 단어를 개인적인 의미를 담아 변형한다.(모이스 베이르블록)” “편지를 읽다 보면 읽기 민망할 정도로 수많은 맞춤법 오류와 문법적 오류가 눈에 띄고, 구두점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 이해에 방해가 되는 문장도 보인다……. 네덜란드어에 없는 영어나 프랑스어 표현을 네덜란드어로 직역하기도 하고, 남의 글을 인용할 때도 자신의 자의적 해석대로 옮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루이 로엘랑트)” 또한 빈센트는 목회자인 할아버지와 아버지, 미술상인 큰아버지 작은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종교, 미술(예술), 문학에 눈떴고, 집요하리만치 철저하게 파고들었다. 그 독서의 넓이와 깊이가 결코 만만치 않은 데다가, 사색의 내용들을 동생 테오와 빠짐없이 나누고 싶어서 며칠 간격으로 장문의 편지를 지치지도 않고 써내려갔기에, 부연설명 없이 둘만의 추억과 지인을 언급했거나 특정 작품의 구체적인 글귀를 인용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게다가 일부 중요한 사실들은 빈센트가 테오에게조차 거짓으로 말하거나 혹은 묵언으로 의도적으로 숨기기도 했다. 가령 이제는 꽤나 유명한 그의 여러 차례의 연애 사건과 기행들을, 그는 동생에게 말하기 창피했던 것인지 편지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그즈음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의 구절을 인용해 적거나 특정한 그림을 소개하는 식으로 시치미를 떼고 슬쩍 넘어갔다. 그래서 독자들이 이러한 공백을 채워서 읽는다면, 이 긴 편지글들은 흥미롭게 순식간에 읽힐 것이다. ‘옮긴이의 글’에서 빈센트 반 고흐 편지 전집 번역 의뢰를 받았을 당시, 필자는 영국에 머물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분량 때문에 망설여졌지만, 그래도 빈센트 반 고흐라니 일단 읽어보기나 하자는 마음으로 그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런던으로 건너간 빈센트의 이야기를 따라가던 도중, 그가 해 질 녘 런던 하늘을 묘사한 대목에 이르자 필자는 격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경험을 했다. 여름 한 철을 제외하고는 한국에 비해 이른 시각에 해가 저무는 탓에 아쉬움이 많았지만 노란색, 주황색, 빨간색, 분홍색까지 다양하고 화려한 빛의 스펙트럼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주던 그 아름다운 런던 하늘이 바로 위대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눈을 사로잡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렇게 필자는 런던의 하늘에 취해 반 고흐 편지 전집 번역이라는 대장정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빈센트 반 고흐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크게 세 가지일 것이다. 미친 화가, 천재 화가, 저주받은 화가. 정신질환을 앓다 생의 말년에 요양원 신세를 져야 했으니 미쳤다고 할 수도 있고, 그림을 제대로 배워본 적 없었지만 시대를 뛰어넘는 명화를 남겼으니 천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며, 평생 자기 그림 한 점 번듯하게 팔아 돈을 벌어본 적 없었지만, 사후에 그의 작품은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에 달하고 있으니 지지리 운도 없는 저주받은 화가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편지를 통해 들여다본 빈센트 반 고흐는 그 누구보다 평범하며 소심하고, 지극히 인간적인 한 사람의 화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자기 실력이 부족하다고 여기면서 그림 그리는 일에 온 힘을 쏟았고, 그가 죽기 직전까지 바랐던 건, 그럴듯한 그림을 그려서 돈을 벌어 먹고사는, 어쩌면 너무나 평범한 화가가 되는 일이었다. 이 책에는 빈센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663통을 비롯해서 동료화가, 친구, 다른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150통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편지가 갖는 가장 큰 의의라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명화가 어떤 이유로,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그린 그림인지 그 탄생 과정을 그의 설명을 통해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