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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halie Le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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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뭘 원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카스틸리오네 부인의 사진을 바라보며 그녀가 뭘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있다. 그녀는 춤춘다. 그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비가시적이니까, 그렇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신이 타인의 시선 아래 놓이는 순간부터, 그녀는 춤춘다. 그 춤에 관해서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오로지 사진만이 그녀 속 유령들의 그 끊임없는 움직임을, 상대방을 향한 오고 감을, 반복과 도약 들을 가시화하고 그럼으로써 판타스마타(fantasmata)라 부르는 것이 나타나도록 한다.
* 몸은 판타스마타에 의거해 춤을 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뭔가? 동작이 일단락될 때 춤추는 이가 마치 메두사의 머리를 본 듯 그 사위를 멎게 만드는 방식을 말한다. 동작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일순간 몸의 정수가 멎도록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의 방식과 절도, 기억을 고정시켜야 한다, 우리는 그 순간에 전적으로 돌과 같아야 한다. 춤의 정수는 바로 이 같은 형상의 부동화에, 유일하게 움직임의 감각을 주는 그 정지 화상 속에 있다. 사진은 상대방의 시선 밑에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여인의 춤을 포착하게끔, 어떤 비밀의 즉각성(instantane)을 드러내는 이 돌의 상태를 붙잡게끔 해준다. 그녀는 바로 그 사실을 전시하고 싶었으리라. * 댓츠 미 …… 댓츠 미 …… 댓츠 미 …… 그래, 이건 나야, 포즈를 취하고 상대방의 시선에서 스스로를 찾는 이 여자는, 댓츠 미, 이 강퍅한 시선의 유혹녀는, 제가 지닌 신체적 특질들로 능란하게 유희한다고 믿는 이 여자는, 댓츠 미, 자기 자신의 등장이라는 작은 연극을 광적으로 조직하고 그 열광을 숨긴다고 믿는 이 여자는, 댓츠 미, 동정을 살피고 상상의 이야기를 꾸며내며, 댓츠 미, 차용과 모방과 분노와 거짓말로 이루어진 이 여자는, 댓츠 미, 시체 같은 술병 더미 사이로 무너지는 이 여자는, 댓츠 미, 손에 칼을 쥐고 나타나는 이 여자는, 댓츠 미, 탁자 위에 놓인 그림틀 너머에서 우는 이 여자는, 댓츠 미, 불가해한 공물을 바치기 위해 설치된 제단인 양 악취 풍기는 몸뚱이로 바구니 안에 널린 죽은 개들, 그 사랑하는 것들의 몸 앞에서 절하며 우는 이 여자는, 그건 나, 분칠한 채 꼼짝 않는 이 가면 같은 얼굴, 나, 폐허가 된 물질 앞에서의 이 우울, 이 혼란, 이 비통한 애도는, 댓츠 미-. 그렇기에 그녀는 사진들 전부를 보여주어야 했으리라. 전부를. * 내가 상자를 연다. 방향을 잃고 헤매게 만드는 어둑한 통로로 들어선다. 텅 비고 불 꺼진 어떤 집의 복도다. 침실들로 이르는 어두운 통로를 지나고, 속삭임과 항의하는 듯한 중얼거림, 한숨, 억누른 비명, 드문드문 남은 말들, 갖가지 단념의 사이를 뚫고 나아간다. 어떤 날에 난 지나치게 큰 몸짓을 하다 실수로 사진들을 식탁보 위에 떨어뜨리곤 그 앞에 주저앉아 우는 노파, 꼭 그 사람 같다. 그녀는 아마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리라, 이 사람은 내 엄마야, 어린애의 시선으로 날 바라보면서 응, 그래, 그런 거 같지, 내 엄마야, 그런데 여기 이건 누구야? 그러면서 그녀는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그것이 자신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하고 날 쳐다보며 더 이상 생각이 안 나네, 그녀의 입이 떨린다. 수척한 얼굴에 비해 지나치게 큰 입, 두 입술은 창백하고, 서로 닿는 부위가 하얗게 떴다. 말이 어눌해져 잘 나오지 않는 그녀는 자신의 어릴 적 사진들을, 자기 엄마의 사진들을 쳐다본다. 그녀는 말하고 싶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 할 말이 없다. 우는 수밖에. 옛날 생각만 하면 우는 것이 노인들의 기벽, 이라고 간호사가 말하며 사진들을 정리하고, 난 꼭 그 늙은 여자 같다, 나는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사진들을 계속 넘기면서 복도를 걷는다. 느리게, 구부정하게, 비참하게. * 등을 돌린 세 소녀가 넓적다리께까지 물에 잠긴 채 나란히 있다. 엄마는 이 셋 중의 한 명이다. 하지만 그중 누구일까? 물은 아무 움직임 없이 투명하며, 약간 흐릿한 회색빛 사진의 뭔가가 사라진 듯 불투명한 밝음 속에서 하늘과 한데 섞여, 올 굵은 흰 면으로 만든 수영복이나 수영모의 노골적인 반사광에 불과해 보인다. 등을 돌린 세 소녀, 그중 한 명은 물에 몸을 잠그고, 다른 한 명은 물속을 유심히 살피며, 세 번째 소녀는 꼼짝 않고 똑바로 서 있다. 잠수하는 아이, 탐색하는 아이, 아니면 몽상하는 아이일까? 포말을 일으키며 물에 몸을 던지는 아이, 관찰하고 조사하는 아이, 혹은 아무 생각 없이 먼 곳을 바라보는 아이인가? 엄마는 그 셋 모두일 수 있으리라.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엄마는 즐거운 소녀였고, 세심한 소녀였고, 꿈꾸는 소녀였을 것이다. * 루이즈는 제 앞을 바라본다, 카스틸리오네 부인은 제 앞을 바라본다, “딴 여자”가 제 앞을 바라본다, 나는 내 앞을 바라본다, 소녀들은 제 앞을 바라본다, 조르조가 자신을 보지 않는 제 어머니를 바라본다, 내 엄마가 자신을 아랑곳하지 않는 자기 엄마를 바라본다, 딴 여자가, 카스틸리오네가 날 바라본다, 나는 거울로 날 바라볼 때 내 엄마를 본다, 나는 썩어가는 개의 유해에 절하는 카스틸리오네의 끔찍한 만년 사진에서 내 내면의 황폐함을 본다, 아무것도 아니긴, 나는 이 여인들이다, 그리고 이 여인들은 ……) * 비르지니아 올도이니, 제 용모 전시밖에 모르다 반미치광이로 불행한 생애를 마쳤다고 치부되는 그녀의 불명예를 덮어버릴 검은 사진을. 향락, 영락 가리지 않고 제 존재의 스펙트럼 속 한없이 참되며 끝없이 열거 가능한 양태들을 전부 포착하려 했으며, 그런 식으로 사진기 앞 긴긴 포즈의 시간을 여인의 영원한 탄생기로 삼고자 한 그녀의 참된 초상을. 반면 그녀의 대척점에서, 다 망쳐진 생의 기억 한구석에 버려져 언어의 구제만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위해, 내 얼굴을 가진 이를 위한, 흰빛의 배광을. 어떤 은총 어린 모습을. 글쓰기는 암영을 저주하고 백광을 찬미하려는 게 아니다. 존재의 두 모습을 고르게 살피는 흑백의 노출 효과를 조성하고, 읽는 이-보는 이를 향해 잠시 두 개의 방을 설치할 뿐이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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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상 사진 예술가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 단 한 편의 자기 영화 [완다]를 제작하고 사라진 감독 겸 배우 바버라 로든, 퍼포먼스 중 무참히 살해당한 페미니스트 행위예술가 피파 바카의 생을 다룬 그의 3부작은 패배하고 이해받지 못하고 거부당한 여성예술가들을 재조명하려는 시도이자, 그 과정에서 자기 가족사의 비극을 돌아보고 상처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정제 과정을 거쳐, 지워진 어머니를 빛 앞으로 노출하고자 하는 염원의 표출이기도 하다.
이 목표를 위해 소설 『전시』는 지난 시대 한 여성예술가의 면면을 파헤치는 약전(略傳)에서 예술과 전시에 대한 단상적 에세이이자 에세이 형태의 전시로, 다시 제 어머니의 본연의 분위기를 온전히 되찾으려는 딸의 자전적 기록으로, 부단히 저 자신을 돌이키고 번복한다. |